BAR TALK - 바와 나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처음으로 바에 혼자 앉아본 것은 2007년 홍콩에서였다. 친구가 먼저 귀국한 후 저녁부터 새벽까지 란콰이펑의 여러 바를 돌아다녔다. 당시로서는 좀 모험 같은 일이었다. | ESQUIRE,에스콰이어

처음으로 바에 혼자 앉아본 것은 2007년 홍콩에서였다. 친구가 먼저 귀국한 후 저녁부터 새벽까지 란콰이펑의 여러 바를 돌아다녔다. 당시로서는 좀 모험 같은 일이었다. 여자 혼자 칵테일을 마시는 광경에 ‘유혹’이나 ‘사연 많은’ 같은 수식이 당연히 따라오던 때였으니까.나는 스스로의 용기에 반쯤 도취되어 있었다. 트렁크를 가득 채운 옷 가운데 가장 멋진 조합을 고른 후 하이힐을 신고 밤거리로 나섰다. 네 곳의 바에서 열세 잔의 칵테일을 비우는 동안 가장 기억할 만한 일은 세 번째로 들른 바의 테라스에서 일어났다.처음 보는 남자가 내게 칵테일 두 잔을 샀다. 영국계 중국인이었고, 일주일 전 금융회사에서 해고당했다고 했다. 그 후 오갔던 대화를 자세히 기록하는 건 불필요한 일이다. 바에서 일어나는 ‘예측 불가능한 일’들은 대체로 (영화나 TV 쇼, 대중소설에서 과장된 어조로 묘사하는) 예측 가능한 과정과 뉘앙스로 진행되고, 그런 사건은 회고조로 정리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 시시해진다.그가 내게 건넨 첫마디 역시 무척 예측 가능한 질문이었다. “왜 혼자 마셔요?”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낯선 여자에게 던지는 첫마디를 네 가지 유형쯤으로 나눈다면, 이 순간은 4번 타입의 2번 문장쯤에 속하겠군. 외형에 대한 칭찬(“재킷이 멋있네요”), 근거 없는 데자뷔(“우리 본 적 있죠?”), 헌신성의 확인(“여기 단골이에요?”), 그리고 그가 택한, “혼자 오셨어요?”의 미묘한 변주들.물론 첫마디가 반드시 창의적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연스럽고 영리하게 굴수록 매력적인 인상을 남긴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 바에서의 대화를 둘러싼 상황이 좀 변했다. 주말 서울의 칵테일 바에서는 종종 여성의 비율이 더 높다. 혼자 바에 앉아 바텐더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여자 역시 드물지 않다. 술을 즐기는 여자들에게 바를 혼자 찾는 일은 모험보다 일상적인 여흥에 가까워졌고, 그중 상당수는 마음에 드는 몇몇 바에 단골손님으로 정착하기도 했다.최근 6, 7년 사이 서울에서 바 문화는 빠르게 뿌리내렸다. 칵테일 수준과 바텐더의 화법, 호스피탤러티가 함께 진화했고, 양식 있는 손님들은 바에서의 에티켓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바의 개성과 바텐더와의 교류를 따져 자신에게 잘 맞는 바를 고를 수 있을 정도로 선택의 폭 역시 넓어졌다.이런 변화는 낯선 사람들과의 친목에도 영향을 끼쳤다. 바에서 처음 만난 남녀, 서로 인사를 나누진 않았으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두 사람은 이제 좀 더 부드럽게 대화를 시작할 수도 있다. 진부한 첫마디나 “저쪽 숙녀분에게 칵테일 한 잔을” 같은 대사가 없어도 괜찮다.좋은 바에는 좋은 술이 있고, 음악이 있고, 그 장소에 대해 각자 품고 있는 애정이 있다. 또 다른 술집에 대한 이야기와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새로운 약속의 도모가 있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솔직해질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어떤 관계가 될지 모르는 사람이기에 형성되는 긴장이 있다. 그 순간부터 대화가 시작된다.마티니의 베이스로 어떤 진을 선호하는지, 다음 술은 무엇으로 마시는 게 좋을지, 지금 흘러나오는 노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 술집에는 언제부터 오기 시작했는지, 어째서 이곳을 좋아하는지, 여기에서 집은 가까운지, 나이는 몇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애인은 있는지.바에서 나선 이후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좋은 술친구로 지낼 수도 있고, 그 이상의 관계로 진전될 수도 있다. 바에 혼자 앉아 있는 일이 일상의 영역에 들어왔다 해도 이런 식의 만남에는 여전히 모험의 여지가 남아 있다.친밀한 인간관계 속에서 비슷한 대화만 나누다 보면 자의식조차 타성에 젖는다. 바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 앞에서 그 타성은 잠시 깨지기도 한다. 상대의 매력을 측량하는 동시에 나의 매력을 각별하게 가다듬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의자에 앉은 자세, 눈짓, 옷매무새, 말투와 속도, 나를 드러내거나 감추는 경계선. ‘그래, 나는 이런 여자였지’라고 새삼 자각하게 되는 순간은 꽤 유쾌하다.혈중 알코올 농도가 점차 높아지면 탐색 과정은 좀 더 부주의하고 유쾌한 분위기로 들어선다. 웃음이 잦아지고, 개인사가 대화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때로는 부적절한 칭찬이 대화의 단계를 역행시키기도 한다. “여자분이 이런 술까지 알아요?” “이건 여자분들이 좋아할 만한 맛의 칵테일이 아닌데.” 바에 단골로 드나드는 여자들은 대체로 자의식 강한 칵테일 애호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저 말을 꺼내는 순간, 그녀들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1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당신에 대한 판단을 끝낼 수도 있다.남자들이 모두 자리를 뜬 후에도 혼자 바에 남아 마지막 한 잔을 주문하는 밤도 있다. 그때 내가 말을 나누는 남자는 그 바에서 가장 중요한 남자, 바로 바텐더다. 좋은 바텐더는 지켜야 하는 거리감과 예의,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상대와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괜찮다. 심각한 상담에는 적절한 충고와 위안이 돌아온다. 지나치게 울적해 보이면 기분에 맞춰 칵테일을 추천해주기도 한다. “우울하시다면 포숑의 리큐어를 사용한 달콤한 칵테일은 어떨까요?” 같은 이야기에는 어떤 여자라도 진심으로 미소 짓게 된다. 유능한 바텐더의 직업 정신과 함께라면 침묵마저도 그저 편안하다.세상 남자들이 모두 바텐더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이 좀 더 재미없어지기도 하겠지만. 바텐더와 친해지는 건 어떤 면에서든 좋은 일이다. 다시 혼자 들르는 밤, 바에서 이상형의 남자를 발견하는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그 순간에도 그 남자와 나 사이에는 바텐더와 술잔이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