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필독서 - 어쩌면 체르노빌은 우리의 미래다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완벽히 통제된 안전한 원전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모순이다. 알렉시예비치가 체르노빌의 과거를 쓰면서 “가끔 내가 미래를 쓰는 것 같다”라며 불안해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체르노빌은 남의 과거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미래일 수도 있다. | 필독서,8월,강유정,책,신간

간혹 머리보다 먼저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들이 있다. 생각하고 판단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그들이 처한 인간적 비극 앞에서 무조건 마음이 아파오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20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벨라루스 출신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도 그런 이야기이다. 팔을 들어 올리면 뼈가 흔들리고 폐와 간 조각이 목구멍으로 타고 오르는 남편을 바라봐야만 했던 만삭의 아내 이야기나, 벽돌로 자기 머리를 내리치는 여자를 보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남자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문제는 이 이야기들이 한 작가가 머릿속에서 지어낸 허구, 픽션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며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논픽션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일들이 실제로 있었다. 실제로.는 1986년 4월 26일 밤에 발생했던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다루고 있다. 그땐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원전이 무엇인지, 원전 사고가 어떤 것이고 피폭이 무엇이며 방사능이 미치는 해악은 무엇인지 말이다. 건장한 남자들이 원자로를 석관으로 덮기 위해 원자로의 중심으로 향했다. 소들은 물에 다가가지 않았고, 죽은 쥐들이 널려 있었지만 고양이들은 먹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만은 무방비 상태로 피폭된 토마토가 더 튼실히 맺혔다면서 그것을 먹고, 물에서 낚아 올린 물고기도 먹었다. 보이지도, 냄새도 나지 않는 그것에 대해 사람들은 몰랐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몰랐던 것이다.아니, 엄밀히 말해 누구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기에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해체 작업자들은 방호복도 입지 않은 채 로봇마저 파괴되는 곳으로 향했다. 작업자들을 그리로 보낸 이들은 피폭된 방사선 수치조차 알려주지 않거나 알려줘도 거짓으로 일관했다. 작업자들은 정부가 상장과 메달을 주자 심지어 기뻐했으며 영웅 호칭에 감격했다. 어쩌면 그들은 소비에트가 아니라 유럽을 구하고, 세계를 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들이 방사능이 무엇이고 피폭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다면, 그래서 그 누구도 원자로 가까이 가서 그것을 덮지 않았더라면, 체르노빌은 국지적 사태가 아니라 전 지구적 종말의 시작이 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니 말이다.그런데 이 이야기가 그저 30여 년 전의 멀고 먼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과거의 일로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가령, 이런 것들 말이다. 한 늙은 양봉가가 다음 날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벌통에 벌이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은 걸 발견한다. 그는 그토록 신봉했던 소비에트 연방의 뉴스에서 왜 그런지 사태를 자세히 알려주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고, 마치 그런 일이 있지도 않은 것처럼 모르는 척한다. 심지어 지렁이조차 1미터 아래 땅속 깊숙이 파고 들어가 도망하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 어딘가 낯익지 않은가? 세월호가 침몰하고 메르스가 창궐할 때, 가만히 있으면 안전하고 메르스는 모두 정복되었다고 말했던 그런 목소리들, 그런 얼굴들과 말이다.그러니 체르노빌은 과거의 한 사건이 아니라 어떤 상징이며 암시라고 할 수 있다. 언제든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만일 원전이 있다면 체르노빌이 될 수 있다. 완벽히 통제된 안전한 원전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모순이다. 알렉시예비치가 체르노빌의 과거를 쓰면서 “가끔 내가 미래를 쓰는 것 같다”라며 불안해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체르노빌은 남의 과거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미래일 수도 있다.알렉시예비치의 글들은 목소리 소설, 코러스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규정된다.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을 경험하고 듣고 경유했던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그들의 언어로 기록한다. 체계나 서사 없이 나열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행간의 메시지와 작가의 판단이 전달된다. 그 끔찍했던 일들이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간절함도 느껴진다.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자행될 수 있었다면, 지금은 자본과 경제의 이름으로 모든 일이 허락된다. 경제적인 자원인 원자력. 그러나 과연 인간의 삶과 존재 그 자체보다 앞서는 이윤과 가치가 있을 수 있을까?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볼 수 있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의 힘이다. 는 그런 인문학의 힘을 들려주는 목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