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필독서 - 병은 사회적 상징물이다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영화 주인공은 대부분 비슷한 병에 걸린다 백... | 필독서,강유정,책,신간,독서

영화 주인공은 대부분 비슷한 병에 걸린다. 백혈병이나 뇌종양 같은 병에 걸려 앓다가 세상을 떠나곤 하는 것이다. 영화 주인공이 대장암이나 피부암처럼 병명에 ‘암’이 들어가고 한편 그 증세가 눈으로 확인되는 병에 걸리는 일은 더더군다나 없다. 영화 주인공에게 병은 일종의 시련의 상징이자 은유이기 때문에 굳이 그 고통을 시각적으로 확인시킬 필요가 없다. 아니면 그 질병의 고통을 환기할 필요도 없다. 사랑하는 연인들의 완성을 방해하고, 행복의 정점을 슬픔으로 전복하는 것, 이런 절체절명의 기능을 위해 암이 등장하는 거지, 진짜 암이 어떤 것이고 또 무엇인지 보여주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병은 기능이지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수전 손택의 역작 은 흔히 말하는 병에도 일종의 위계가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어떤 병에 걸렸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이미지와 느낌이 달라진다. 병이 투명한 게 아니라 사람들의 판단과 선입견에 오염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생각해보면 일제강점기의 독립 투사들은 대개 결핵에 걸린 것처럼 묘사되곤 했다. 지적인 안경을 낀 남성이 각혈하는 모습이 매우 관습적인 장면처럼 떠오를 정도이다. 의 여성 인물이 걸리는 질병도 결핵이며, 니콜 키드먼이 모든 여자들은 다이아먼드를 좋아한다며 노래 불렀던 의 여주인공 역시 결핵을 앓았다.많은 사람들이 백혈병에 걸렸던 것으로 기억하는 영화 의 여주인공이 앓은 비운의 질환 역시 결핵이다. 중요한 것은 사실 결핵이 무시무시한 전염성 질환이라는 것이다. 즉 암처럼 환자 내부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호흡기로 전염될 수 있는 질병인 셈이다. 하지만 언제나 결핵에 걸린 주인공은 뭔가 파리하고 지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그것은 진짜 결핵의 이미지라기보다 결핵이라는 질환을 사용해온 예술가들이 제공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그런 맥락에서 암은 매우 지독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상징을 갖고 있다. ‘사회 암적인 존재’와 같은 상용어구가 그렇다. 암은 하나가 주변을 오염시키고 결국 작은 변화가 전체를 무너뜨린다는 식의 전체주의적 발상을 문자적 비유로 담고 있다. 한편 암은 치유 가능한 병이기도 하지만 불치병이라는 이미지를 먼저 전달한다. 맥락 가운데서, 암 선고를 받는다는 것은 곧 죽을 병임을 의미한다. 암에 걸렸다는 것은 단순한 질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선고라는 단어의 무게감도 이와 상통한다.흥미로운 것은 사회적으로 유통되는 유행어나 시쳇말에도 일종의 흐름이 있고, 또 그것을 사용하는 언어 사용자들의 공감이 있다는 사실이다. 암이 사회적 진단으로 쓰인다면 어떤 병은 일종의 격리와 도덕적 평가를 포함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에이즈라는 단어, 질병이 그렇다. 사랑하는 연인들의 이별에 초점을 맞추는 멜로드라마 주인공들이 암에는 걸릴 수 있지만 에이즈에 걸린 것으로 묘사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치 한센병이 천형이라는 낙인을 받아왔던 것처럼 에이즈는 성적 방종과 부주의, 문란한 사생활의 결과물인 것처럼 여겨진다. 에이즈라는 질병에 이미 그런 이미지가 잔뜩 쌓여버린 것이다.결핵이나 암이라는 질병이 일종이 경외의 언어로 융해되었다면 에이즈는 공포와 경원의 언어로 소통되고 있다. 같은 영화에서 에이즈는 단순한 장치가 아니라 사회적인 대결과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저항의 언어로 특별히 선택된 질병이다. 미국 여성 평론가 중 가장 저명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수전 손택은 이렇듯 단어에 쌓인 이미지와 그 이미지의 활용법을 주목했다. 실제 유방암 판정을 받았던 수전 손택은 판정과 치료 과정에서 병의 이미지를 온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녀는 암이 사실 죽음과 동의어이며 암의 선고가 곧 죽음의 예고처럼 활용된다는 데에서 저서의 단초를 마련했다.병은 소문을 내야 한다고 하지만 때로 어떤 병은 비밀로 간직하고 싶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마음에도 흐름이 있고, 그 흐름에 따라 상징과 은유의 용법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마음의 감기로 불리는 우울증이 최근에 훨씬 더 고백하기 쉬운 질병이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진료 기록에 대한 우려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연예인들의 고백으로 공황 장애라는 용어가 일반화되기는 했지만 그런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쉽게 병원 문을 두드리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16세기 여성의 우울증은 바페르와 같은 이름으로 분류되어 황당한 치료로 다뤄졌다. 정신병이나 육체적으로 민망한 부위의 질환이 취급되었던 맥락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단어는 동시대의 맥락 가운데 오염된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은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