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분노의 방향에 대하여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광장은 사방으로 뚫려서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원래 광장이 아닌 곳까지 광장이 되어 있었다. 막혀 있는 길목 앞에서는 함성 소리가 오래 들렸다. 반드시 들려야 하는 소리였고, 반드시 들어야 하는 소리였다. 제발 새로 시작하자는 소리였다. | 분노,촛불,광화문,한국

도로는 숭례문 앞에서부터 통제돼 있었다. 차는 못 가고 사람만 갈 수 있는 길이 거기서부터 열려 있었다. 횡단보도에 핫팩을 나눠주는 4인 가족이 있었다. “핫팩 받아 가세요.” 가족이 번갈아 외쳤다. 뒤에 세워놓은 작은 입간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핫팩 나누어드립니다. 무료입니다. Free of charge.” 남편이 말했다. “딱 1000개 사왔어요. 날씨도 차고 해서.” 아내가 말했다. “광장 가는 분들 추우실까 봐….” 사람들은 그들에게 받은 핫팩으로 손을 덥히면서 같이 걸었다. 입간판 아래, 그들이 핫팩 1000개를 사서 나눠주는 진짜 이유가 쓰여 있었다. “정권은 짧지만 우리, 우리 아이들이 이끌어갈 대한민국의 미래는 길다.” 11월 12일 토요일 밤의 서울이었다.주최 측 추산과 경찰 추산을 비교할 일도 아니었다. 지하철 하차 인원 통계를 분석한 결과 집회 참가 인원은 약 132만 명이었다. 현장에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숫자였다. 시청 광장까지는 도저히 갈 길이 없었다. 멀리서 누가 마이크를 잡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분, 이제 시청 쪽은 진입하실 수가 없다고 합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늘 함께하고 계셔서요. 을지로 쪽으로 돌아가시면 상황이 조금 낫다고 합니다. 고맙습니다. 자, 다시 하야송 틀어주세요!” 보도는 이튿날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 쓴 기사 ‘100만 촛불, 국민의 힘 보여줬다’ 는 이렇게 시작했다. “87년 6월항쟁 이후 최대 인파가 서울 도심을 뒤덮었다.” 다른 언론사도 마찬가지였다. 역사적인 참여 인원, 집회 도중과 이후의 믿기지 않는 질서에 대한 기사가 쏟아졌다. 특파원 제임스 피어슨은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굉장히 축제 같고 평화로우며 긍정적인 분위기다. 사람들은 가족, 아이와 같이 나왔다.”한 밴드는 시청 인근 인도 옆에 트럭을 세워놓고 그 위에서 연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기타리스트가 말했다. “여기 올라서서 여러분 모여 계신 걸 보니 정말 혁명이라는 단어 말고는 생각이 안 나요. 그런데요 여러분, 저는 다치기도 싫고 아프기도 싫어요. 슬퍼하기도 싫어요. 이렇게 같이 노래 하고 춤추면서 우리 세상 만듭시다!” 그러곤 다프트 펑크의 ‘Lose Your Self’를 연주했다. 모여 있던 사람 한둘의 몸이 살짝살짝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즈음 숭례문 쪽에서 시청으로 향하는 인파가 갑자기 늘었다.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은 덕수궁 담벼락에 거의 딱 붙어 한 줄로 서서 걷기 시작했다. “응, 시청 쪽으로 다시 나가려고 그래. 응응, 먼저 맛있게 먹어, 응. 아빠 금방 갈게.” 아빠와 어린 딸의 통화였다. 그날, 서로의 거리는 이렇게 가까웠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아들인지 딸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안국역 주변의 분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는 덮밥을 나누고 있었다. “여기 덮밥 있어요. 드세요. 그냥 드려요!” 밤 10시 즈음이었다. 50리터짜리 쓰레기봉투를 들고 쓰레기를 주우며 걷던 대학생 커플은 이렇게 말했다. “아, 그냥 쓰레기가 있어서 줍고 있었어요. 네, 둘이 왔어요.” 경복궁역 쪽으로 걸어갈 땐 훨씬 낮고 단호한 구호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정연하고 강직한 대오였다. 깃발에는 ‘한국지엠창원비정규직지회’라고 쓰여 있었다. 그들의 기세가 주변에 전해지자지 나가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그런 날이었다. ‘이게 아닌데’ 싶었던 모든 것에 대해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거리에 다 같이 있었다.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박수를 쳤다. 소설가 김영하는 기고문에 이렇게 썼다. “친구 세 명이 모이기 위해서도 참으로 많은 것이 필요하다. 백만 명이 모이려면 뭐가 더 필요할까. 분노다.” 의 작가 정지우는 이렇게 썼다. “내가 믿는 것과 사회의 모습이 일치할수록, 우리의 삶은 부드러워진다. 관념과 현실이 일치 할 때, 개인은 사회에 조화롭게 적응한다. 반대로, 내 안의 관념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을 때, 사람은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낀다. 현실이 내가 믿는 관념과 어긋날 때, 우리는 서서히 분노를 느끼게 된다.” 우리는 광장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분노를 공유하고 있었다.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 이 분노는 어디서 온 걸까? 우리는 다시 2년 반 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집회 현장에서 한 여고생은 트럭으로 만든 연단 위에서 울 듯이 소리쳤다.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허무와 공허를 경험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저 자신이 미웠습니다. 그날부터 꿈을 꿀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렇게 모여 계신 어른들을 보니 저는 다시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집회는 대학생이 돼서 나가라는 부모님께는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내가 대학생이 됐는데도 이런 시위가 또 열리면 그게 나라야?! 저는 한국을 사랑합니다. 같이 외쳐주십시오, 나는 한국을 사랑한다!” 남양주시에서 온 고등학교 2학년 3반 학생이었다. 그 여학생이 허무와 공허를 경험한 2년 전 그날은 2014년 4월 16일이었다. 여학생은 4월 16일과 그날 이후의 경험을 더 구체적으로 나눴다. 자유 발언을 듣던 사람들은 거리에 앉아서 같이 울었다.다시 단호하게 물어야 할 일이다. 세월호가 가라 앉는 걸 생중계로 봤던 아침에, 우리가 믿던 어떤 근본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던 건 아닐까? 한국은 신속한 근대화의 상징 같은 나라였다. 그게 부모 세대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가끔 좀 이상하긴 해도 한국이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믿음은 있었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근대국가의 핵심이다.하지만 그날, 한국은 우리의 생명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나라였다. 2014년 에디터와의 인터뷰에서 사회학자 엄기호는 이렇게 말했다. “근대국가는 생명 권력이기 때문에 생명을 돌보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자연재해가 터지면 정치인들이 자기 잘못이 아니더라도 생명을 구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하는 것으로 권력을 증명하는 거예요. 푸코가 한 유명한 얘기입니다.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 이게 근대 권력이죠. 중세 권력은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입니다.”그날의 한국은 중세였다. 모두의 관념과 현실이 크게 어긋난 날이었다. 그것이 그날 이후 모든 분 노의 근원일 수 있었다. 생명을 구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사는 걸 돌봐주는 사람도 없어서 각자도생이었다. 이후에도 변한 건 없었다. 아주 기본적인 보호조차 사치 같았다. 고 백남기 농민이 어쩌다 유명을 달리했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신과 의사 안주연은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명백히 옳다고 생각했던 전제나 기본 믿음이 깨져 큰 충격을 받으면 정신적 외상(트라우마)를 입게 된다. 즉 약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인 것. 우리는 대통령과 청와대, 행정부에 대해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이들은 적절한 사과와 반성과 대책을 내놓지도 않고 있다.” 정지우 작가는 에 이렇게도 썼다. “한 사회에 분노가 만연해 있는 현상은 개인들이 가진 관념이 현실의 사회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분노가 만연한데 해소되는 건 없었다. 원인을 모르니 애도조차 불가능했다. 분노는 원인을 몰라서 방향을 잃었다. 혐오가 창궐했다. 팽창을 거듭하다 가장 약한 곳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우리 는 다시 무수한 죽음을 추모해야 했다.강남역 10번 출구와 구의역 스크린 도어 앞에서도 추모가 이어졌다. 혐오는 거기서도 기승이었다. 다시 한번 상식이 무너지는 광경을 우리는 똑똑히 봤다. 세월호 유족들이 감내해야 했고, 여성들이 맞서 싸워야 했던 혐오였다. 포스트잇과 꽃은 혐오에 맞서는 최소한의 양식이었다. 그것은 그대로 역사가 되었지만….2016년 11월 12일의 광장도 역사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광장의 인파가 무수한 개인의 집합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체험했다. 132만 명이라는 말로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핫팩을 나눠주던 가족, 다프트 펑크를 연주하던 밴드, 쓰레기를 줍던 커플, 연단에 섰던 모든 사람들은 언론이 세세하게 주목할 수 없는 그날의 주인이었다.무수히 많은 깃발 아래서 힘을 모았던 것도 각각의 개인이었다. 그날의 서울은 ‘광장에 모인 개인’이라는 자격만으로 평화로운 소통이 일어나는 현장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힘든 것도, 그들의 죽음도 다 우리 탓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거기서 서로 확인했다. 오로지 혼자인 줄 알았지만 그렇게 같이 있었다. 비로소 우리는 시민이자 개인이었다. 그렇게 분노의 원인을 공유할 수 있었다. 원인을 알면 방향도 정확히 설정할 수 있는 법이다. 어쩌면 그게 혁명이었다.착각하면 안 된다. 정부는 한국이 아니다. 우리가 한국이다. 그날 광장에 있었던 모든 개인과, 거기 없었지만 지금 같은 이유로 분노하는 모든 개인이 곧 한국이었다. 이 간명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다시 새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