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형 힙 타운 공식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서울도 세련된 동네의 연대기를 꿸 수 있게 되... | ESQUIRE,에스콰이어

서울도 세련된 동네의 연대기를 꿸 수 있게 되었다. 1990년대 후반의 홍대 앞부터 지금의 익선동이나 우사단로까지. 흐름이 바뀌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돈이 오가며 돈이 오가면 비겁한 사람과 상처받는 사람이 생긴다. 요즘은 이 순환을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부른다.젠트리피케이션에서 정말 흥미로운 부분은 입지 선정 과정이다. 누가 어떤 동네를 골라 그곳을 세련되게 만들까? 왜 홍대는 세련된 동네가 되어 외국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근처의 서강대 앞으로는 아무도 오지 않을까? 왜 문래동은 성수동 공장처럼 세련된 느낌을 내지 못할까? 동네가 유명해지는 패턴은 무엇일까?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유명해진 동네의 면면을 돌아보았다. 서울에 10년 이상 산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짚을 수 있는 흐름이다.급진적인 청년 문화의 본산 홍대가 있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삼청동에 사람들이 몰렸다. 홍대 옆 상수역 인근으로 세련된 기운이 퍼져나갔다. 이태원과 한남동의 뒷골목에도 뭔가가 생기더니 경리단과 그 건너 해방촌에도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어떤 사람들은 용산고 일대의 후암동에도 터전을 마련했다. 좀 더 단정한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경복궁 반대편 담장 옆의 서촌에 갔다. 서울숲 옆 공장 지대엔 젊은 사람들이 모이다가 스타트업 센터까지 생겼다.그러는 동안 홍대 권역은 바람을 불어넣은 콘돔처럼 터지는 일 없이 커져나가기만 했다. 6호선 합정역 근처에도 사람이 많아지더니 공항철도 홍대입구역이 개통되고 동교동 삼거리 쪽 출구가 열리면서 연남동이라는 새로운 힙 타운이 만들어졌다.2016년 7월 현재 가장 떠오르는 동네는 종로세무서 근처의 익선동과 을지로 공구 상가 뒤편의 을지로3가, 한남동 이슬람성원 근처의 우사단로, 그리고 망원역 2번 출구를 지나면 나오는 망원시장 근처다.방금 거론한 동네는 총 17곳이다. 홍대, 삼청동, 이태원, 한남동, 경리단, 해방촌, 서촌, 후암동, 서울숲, 성수동, 연남동, 합정동, 상수동, 익선동, 을지로3가, 우사단로, 망원동. 이 17곳의 동네는 앞으로 자주 한 집합으로 언급할 것이므로 ‘힙 세븐틴’이라고 칭해보자.힙 세븐틴이 커지는 패턴은 비슷하다. 인기의 순환 기류라고 해도 좋다. 소소하게 인기가 생기면 기성 매체가 동네를 주목한다. 연남동, 경리단길, 서촌 등의 점주들을 취재한 결과 같은 라이프스타일 잡지의 촉이 가장 먼저 뻗으나 진짜 큰 변화는 그 다음에 온다. 지상파 방송의 프로그램을 타면 아예 동네가 달라진다. 경리단길은 에 나온 이후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다음엔 공식 같은 일이 일어난다. 개성이 줄고 임대료와 유동 인구와 인지도가 증가한다. 땅값이 오르면 개성 있는 가게들이 사라진다. 지역민이 이용하던 세탁소나 철물점, 미용실 같은 지역 기반 상점도 동네를 떠난다. 면적 대비 매출이 낮은 카페가 못 버틸 만큼 지대가 오른다. 그쯤 되면 처음 문화를 이끈 사람들은 이미 사라져 있다. 이 순환이 다른 곳에서 같은 패턴으로 반복된다.힙 세븐틴을 지도에 띄우면 더 확실한 특징이 드러난다. 한강 이남이 없다. 동서로는 성산대교와 영동대교 사이다. 북방한계선은 삼청터널이다. 17곳의 동네가 모인 곳은 가상의 오각형 안에 있다. 한강을 아랫변으로, 성산대교 북단 성산로와 영동대교 북단 동일로를 좌·우측 양변으로 놓고 삼청터널을 최북단의 꼭짓점으로 정한 후 꼭짓점의 좌우를 각각 성산로와 동일로에 연결시키면 된다. 이 가상의 오각형도 앞으로 자주 언급할 것이므로 편의상 ‘힙 펜타곤’이라고 칭해보자.힙 펜타곤은 서울시의 역사와 맞물린다. 서울시가 공개한 ‘위성 영상을 이용한 시가화 지역 분석도’에 따르면 힙 펜타곤은 1979년 당시의 서울 시가화와 큰 연관이 있어 보인다. 서울시의 시가화는 지도에 단색으로 표시되는데, 1979년의 시가지 위성 상황은 강북과 영등포의 시가지화가 짙다. 이때만 해도 강남권은 도로가 지나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시가지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불과 9년 후인 1988년 상황은 놀랄 정도로 바뀌어 있다. 특히 영등포 동쪽의 서울 동남권 지역, 즉 강남권 개발이 두드러지게 표시된다. 시가지화의 모습도 다르다. 강북과 영등포권 시가지는 티셔츠에 쏟아진 커피처럼 불규칙으로 퍼져나가지만 강남권은 기획자의 의지가 느껴지는 격자형 개발이 눈에 확연히 보인다. 힙 펜타곤은 1979년 시가지화 구역과 상당 부분 겹쳐진다. 즉 세련된 동네가 되기 위한 조건은 구시가지다.실제로 힙 펜타곤 내의 17개 지역에 아파트촌이나 신도시는 하나도 없다. 모두 좁고 구부러진 골목으로 이루어진 일반 저층 주택가다. 구시가지 지역이 세련된 동네가 되는 건 젠트리피케이션의 국제적인 공통점이기도 하다. 도시 공동화로 낡아서 임대료가 떨어진 구시가지는 젊고 아이디어가 풍부하지만 자본은 모자란 젊은이들이 진입할 만큼의 매력이 있다. 하지만 구시가지 지역은 세련된 마을의 토양이 될 수는 있어도 씨앗이 될 수는 없다. 씨앗은 무엇일까?발아하려면 씨앗이 흘러 들어가야 한다. 힙 세븐틴은 모두 대형 유흥가와의 접근성이 좋다. 홍대는 당시 서울 서북부 최대 상권이던 신촌의 배후 지역이다. 삼청동도 대형 관광지인 인사동의 배후 지역이다. 홍대가 대형 유흥가가 되니 홍대의 배후 지역이던 합정과 상수와 망원이 새로이 세련된 동네의 범주에 들어선다.토양과 씨앗 다음엔 최초의 씨앗을 발아할 사람이 필요하다. 힙 세븐틴의 모체인 홍대, 삼청동, 이태원/한남동에는 각자의 프로메테우스가 있었다. 세련됨의 불꽃을 들고 오는 프로메테우스. 이들을 힙 프로메테우스라고 치자.1990년대 후반의 홍대에는 당시 무척 전위적인 문화였던 하드코어나 전자음악, 힙합을 하는 음악인, 공연 예술인이 있었다. 이들이 모여 홍대 앞이 점차 커졌다. 2000년대 초반 삼청동의 프로메테우스는 사진을 찍고 술을 마셨다. 디지털카메라 열풍이 불면서 삼청동은 사진 동호인들의 출사라는 기묘한 야외 활동의 메카가 되었다. 출사족은 삼청동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이 동네를 띄우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당시 삼청동은 와인 바 밀집도가 서울에서 가장 높았다. 지금과 달리 당시 와인은 삼청동 같은 곳에 가서 먹는 세련된 술이었다. 이태원과 한남동의 프로메테우스는 이국에서 왔다. 이곳은 미군 기지 등의 이유로 영어가 잘 통했고 뿌리깊은 게이 문화가 있었다. 게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우수 문화 생산자 및 소비자다. 동성애자가 영국의 소비 진작을 이끌었다고 주장하는 같은 책까지 나와 있다. 이런 힙 프로메테우스들이 힙 세븐틴의 토양에 싹을 틔워나가기 시작했다. 싹을 틔운 다음에는 양분이 공급되어야 한다. 새로운 가게의 가장 큰 양분은 충성 고객이다. 클럽과 카페의 이른바 ‘죽돌이’들이 끊임없이 끈질기게 모이면 동네가 태어난다. 세련된 동네엔 세련된 단골이 필요하다. 젊은 흐름에 예민하고, 전위적인 가게에 익숙할 만큼의 지식 혹은 문화적 소양이 있고, 단골이 될 만큼 시간도 많으며, 어느 정도 구매력도 있는 사람들이. 그런 꿈의 소비자층이 있다. 대학생이다.힙 세븐틴 중에는 서울 시내 소재 대학교와 접근성이 좋은 곳이 많다. 지도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는 2000년과 2007년, 2013년에 각각 ‘지도로 본 서울’을 공개했다. 그 데이터 시각화 서비스의 일부인 서울의 대학 항목을 보면 서울 시내에 위치한 대학의 위치와 힙 세븐틴의 위치 사이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어 보인다. 홍대-상수-합정-연남-망원 벨트 근처에는 연세대, 홍익대, 이화여대, 서강대라는 각각 정원 1만 명 이상의 대학교가 있다. 지적인 취미 활동인 레코드나 독립 서적을 출판하는 가게가 이 동네에 유독 많은 건 우연이 아니다. 다른 힙 세븐틴 역시 서울 시내의 여러 종합대학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이태원과 한남동 지역은 숙명여대와 동국대, 성수동 지역은 건국대, 세종대, 한양대.하지만 ‘어느 대학 앞’ 정도의 뭔가로 끝나지 않으려면 대학생 이상의 소비자가 필요하다. 대학생만큼 부지런하진 않아도 나름의 속물적 취향도 있고 호기심도 있으며 마음에 들기만 하면 호기롭게 조금 더 많은 예산을 쓸 수도 있는 사람들이 오기 쉬워야 한다. 아무리 세련된 동네라 해도 가기 힘들면 아무 소용없다. 힙 타운의 필수적 구성 요소는 교통 접근성, 특히 구매력 높은 소비자가 많이 사는 대형 아파트 단지 동네와의 접근성이다. 아파트촌에서의 접근성을 보여주는 지표는 서울시의 기능별 도로망이다. ‘서울시 기능별 도로 현황 2012’를 보면 힙 세븐틴은 서울시의 도시고속도로 유형 중 강변북로와 주요 한강 연결 교량과의 차량 접근성이 좋음을 알 수 있다. 홍대 인근은 강변북로의 서강대교 및 양화대교 북단과 연결된다. 한남동과 이태원, 경리단길 지역 역시 한남대교 북단과 반포대교 북단을 통해 연결되기 쉽다. 성수동과 서울숲도 성수대교를 건너면 나온다. 지도 상에서 강남과 조금 떨어진 삼청동 역시 남산1호터널만 지나면 바로 도착할 수 있다. 강남은 허름하고 세련된 동네에 놀러 갈 마음은 있는 모양이다. 홍대는 강남과 조금 먼 대신 목동과 강서구, 여의도의 접근성이 좋다. 대중교통도 중요하다. 특히 힙 세븐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망원-합정-홍대-상수 벨트와 해방촌-경리단길-이태원-한남동 벨트는 전부 서울 지하철 6호선에 걸친다. 이 9곳의 동네 모두 2000년대 들어 더욱 유명해졌는데 서울 지하철 6호선이 2000년 8월 7일에 개통했다. 정책이 유명한 동네를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연남동이 그렇다. ‘연트럴파크’라는 별명의 경의선숲길공원이 생긴 후 연남동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동네가 되었다. 이 조건 중 하나만 해당되는 곳은 세련된 동네가 되다 만 느낌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예를 들어 서울대 앞 ‘샤로수길’은 간선도로 접근성이 떨어지고 배후 상권이 없으며 인접 대학도 하나뿐이다. 문래동은 강남과 멀고 영등포구에는 종합대학이 없다. 세련된 동네의 조건 중 두세 가지는 갖춰야 서울에서 세련된 동네로 이름을 떨칠 수 있다. 지금까지의 패턴은 대체로 그렇게 흘러왔다. 이 모델을 이용해 예측을 해볼 수도 있다. 새로이 세련된 동네가 될 가능성의 씨가 보이는 곳은 용산구 용문동과 마포구 대흥동, 신수동 일대다. 둘 다 강변북로와 가깝다. 6호선 효창공원앞역과 대흥역도 있다. 용문동은 이태원 상권의 배후로, 대흥동은 홍대 상권의 배후로 볼 수 있다. 1979년 이전에 개발되어 옛날 느낌도 난다. 용문동 근처의 숙명여대와 대흥동의 서강대도 있다. 지금까지의 패턴이 연속된다면 이 두 곳의 이름값은 앞으로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아쉬운 동네도 있다. 흑석동이다. 흑석동은 구시가지가 잔존하고 중앙대와 숭실대가 근처에 있다. 올림픽대로로 국립현충원을 지나면 바로 나오니 강남 접근성도 높고 지하철 9호선도 개통했다. 그런데 한창 재개발 중이다. 세련된 골목의 토양인 저층 주택가 사이로 골목이 놓인 마을 전체를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짓는다. 서울 시내에 대형 아파트단지에 적당할 만큼 넓은 부지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정원 1만 명 이상의 종합대학이 있고 역사도 오래 되었는데 아직 세련된 느낌이 안 나는 곳도 있다. 고려대, 경희대, 한국외대, 성신여대, 서울시립대 등 대학이 다섯 개나 있는 청량리 일대다. 이곳의 부족한 점은 강남 접근성이다. 성수대교나 영동대교 북단에서 바로 청량리로 통하는 신규 간선도로가 생겨 강남에서 오기 편해지면 이쪽 이미지도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세련된 동네의 고유한 매력은 축적된 시간과 인간의 매력에서 온다. 오래된 동네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골목을 갑자기 만들 수는 없다. 힙 프로메테우스 역시 공산품처럼 사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시간과 인적 자본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의 범주를 넘어서므로 돈이 된다.대규모 재개발은 매력으로 돈을 버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좁고 구불거리는 골목이 있는 동네가 사라지고 어디에나 있는 아파트로 대체되면 그 동네 고유의 매력은 사라진다. 물론 재개발로 이득을 볼 회사나 토지주가 있다. 하지만 재개발 전에는 적당한 지대를 유지하던 동네에 외지의 돈이 들어와서 동네를 휘젓는 게 정말 원주민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주는지는 여러모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원주민 입장에서는 정든 동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보다는 기존의 동네를 무대로 조금 더 아기자기한 것들이 생기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도시는 흔히 자연과 반대되는 무엇인가로 표현된다. 하지만 때로는 도시 곳곳의 미세한 생장과 소멸이라는 순환 자체가 자연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서울은 그 순환이 무척 빠르다. 도시공학과 도시사회학의 여러 가지 이슈가 빠른 배속으로 재생하는 영상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지난 20여 년간 17곳의 동네 골목 곳곳에서 일어난 일 역시 그 순환의 일부다. 인간이 만든 법인이 법적으로 생명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만든 도시 역시 어떤 생물이 되어 사람들을 이리 몰고 저리 모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