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 좀 합시다! 삼촌!” 최승호는 뛰었다. 국정원 직원이 탄 차를 따라가 창문을 두드리면서 외쳤다. 늦은 밤, 최승호와 <뉴스타파>의 카메라를 발견하고 얼굴을 가린 여자에게는 이렇게 물었다. “저, 국정원에서 오셨죠?” 여자는 카메라 기자의 명함을 요구하면서 짜증을 내며 몇 마디 하다 피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서울중앙지법에서 나오는 길에는 몇 번이나 요구했다. “원장님, 그러지 마시고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공항에서 만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 실장에게도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해 질문했다. “저는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김기춘 전 실장도 대답을 피하고 자리를 떴다. 최승호는 말했다. “그래도 나라에 중요한 일을 하셨던 분이니까 이런 질문도 받으시는 겁니다.”
베테랑 PD라고 뾰족한 수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오래 기다려서 만났고, 더 쫓아 갈 수 없는 데까지 쫓아가서 해야 하는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4대강 수심 6미 터, 대통령님이 지시하셨습니까?” 이건 이명박 전 대통령 퇴임식에서의 질문이었다. “언론인들이 질문을 못 하면 국가가 망해요.” 최승호가 말할 때 이명박 전 대통령은 웃었다. 거긴 영화 <자백>의 장면이자 <뉴스타파>의 취재 현장이기도 했다.
2016년 11월 12일 현재 최승호 감독의 다큐멘터리 <자백>을 본 사람은 12만5442명이었다. 시사 다큐 역대 최고 성적이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무표정하게 대답을 회피할 때 객석은 실소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자리를 피할 땐 우산 속에서 활짝 웃는 얼굴이 카메라에 잡혔다. 객석의 웃음에 한숨이 섞여 있었다. 간첩 혐의로 유우성 씨를 기소했던 검사는 재판이 이뤄지는 동안 최승호를 여러 번 만났다. 매번 ‘나이스’하게 최승호를 맞았다. 기소의 핵심 증거가 국정원의 조작이었고, 유우성 씨는 간첩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온 후에도 그들은 웃으면서 퇴근했다. 그들은 호탕했고, 객석은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검찰은 국정원 직원을 증거 조작 혐의로 기소했다. 조작된 증거로 유우성 씨를 간첩으로 몰았던 검사들이 받은 징계는 1개월 정직이었다. <자백>을 상영하던 극장에서는 웃음소리가 자주 들렸다.
여전히, 최승호를 가장 정확하게 기억하기 위한 단서는 MBC
최승호와
MBC를 떠나서도 최승호는 PD이자 앵커다. 이젠 영화감독까지 됐다. 소속과 직함이 바뀌는 동안 멈추지 않았던 건 질문이었다. 질문이야말로 그가 기개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엄혹한 시대를 관통하는 저널리스트의 무기였다. 그는 말했다. “취재는 소중한 거다. MBC에 있을 때는 지금처럼 자유롭게 취재 하지 못했다. 간첩 조작 사건 같은 취재는 현재 대한민국의 어떤 언론도 할 수 없다. MBC에서 일할 때부터 권력 뒤에 숨겨진 이야기, 언론이 잘 다루지 못한 이야기를 해왔다. 앞으로도 계속 권력에 질문할 것이다.”
저널리스트는 질문함으로써 저널리스트가 된다. 질문이 곧 취재고, 질문이 곧 공격이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일부 진보 언론도 취재를 하겠지만, <뉴스타파>처럼 한 가지 사안을 갖고 오래 취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뉴스타파>는 광고료를 받지 않고 국민이 주신 귀한 후원금으로 운영하니까 취재처 제약 없이 자유롭게 취재한다. 그만큼 투명하게 운영한다. 세무 조사가 들어와도 눈 깜짝 안 할 정도로. 그래서 어떤 사안을 취재할 때도 겁이 없다. 우리는 당당하다.”
세상은 원래 조금 이상하고, 그걸 감추고 싶은 사람은 언제나 있었다. 우리는 늘 모르는 게 많았다. 그걸 파헤쳐 드러내는 건 다소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그게 권력의 속성일까? 권력을 감시하며 제대로 일하고자 하는 저널리스트의 직함이 타의에 의해 복잡해지는 시절, 직함을 잃은 후에도 기꺼이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는 데서 우리는 위안받아도 될까? 그들은 기꺼이 알려주고자 한다. 기다리고, 뛰어가서, 질문하고, 알림으로써 바로잡고자 한다. 최승호는 그런 저널리스트였다. <자백>은 그 단단한 증거였다. 언론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