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박근혜를 만들었는가 - 4. 노무현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누가 박근혜 를 만들었는가 ... | 노무현,박근혜,최순실,우병우,정윤회

누가 박근혜를 만들었는가4. 노무현조차 미처 알지 못했던 게 있었다.박근혜-최순실 커넥션의 농도였다.자연인 박근혜는 1997년 12월 15대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정치인 박근혜로 변신했다. 야인 박근혜를 이회창 후보에게 소개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이자 박근혜의 오촌인 박재홍 당시 한나라당 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박재홍 의원이 63빌딩에서의 상견례에 다리를 놔준 건 사실이다.박근혜가 이회창을 선택하게 만든 인물은 따로 있었다.당시 박근혜는 김대중 후보 측에서도 구애하는 대상이었다.영애 박근혜를 기억하는 산업화 세대의 박정희에 대한 향수는 막강한 정치적 자산이었다. 당시 김대중 후보 측에는 박근혜의 인척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가 있었다.JP의 권유를 뿌리치고 이회창을 지지한 건 박근혜-정윤회-최순실의 공동 결정이었다. 아버지 이후의 시대에도 살아남은 아버지 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반면에 최순실과 정윤회는 모두가 배신할 때도 곁을 지킨 사람들이었다. 정치인 박근혜의 시작점부터 세 사람은 공동 운명체였단 말이다. 정치인 박근혜 자체가 세 사람의 공동 기획이었다.의원 박근혜 앞에는 언제나 실장 정윤회가 있었고 뒤에는 비선 최순실이 있었다. 정계 입문 초기에 정치적 위기가 닥쳤을 때도 세 사람의 커넥션은 흔들리지 않았다. 2002년 이회창 대세론에 반기를 들고 이른바 2?28 탈당을 결행했을 때다.결사대장은 정윤회였다.2002년 5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돌아온 박근혜 의원의 깜짝 방북도 사실상 정윤회의 작품이다. 박 의원은 방북을 밑천 삼아 ‘통일 대박’을 주장하면서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고 총재를 맡는다.이때도 총재비서실장은 정윤회였다.박 총재는 16대 대선을 한 달가량 앞둔 2002년 11월 한나라당에 복당한다. 정치적 참패였다. 이때도 정 실장과 최순실이 함께였다.박근혜 대통령의 친동생인 박지만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피보다 진한 게 있더라.” 는 이걸 간과했다.정윤회와 최순실은 정치인 박근혜가 유력 대권 주자로 부상하면서 기꺼이 박 의원의 음지로 자리를 옮긴다. 박 의원 입장에선 오히려 두 사람한테 미안하고 고마웠을 수 있다.2004년 3월 탄핵 정국과 한나라당의 리더십 붕괴는 박근혜 의원한테 기다렸던 정치적 재기의 기회였다.박근혜 정권은 2004년 3월 24일 천막에서 잉태됐다.바로 전날 치러진 한나라당 임시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박근혜 한나라당 신임 대표는 이른 아침부터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에 참배했다.곧바로 여의도 중앙 당사로 향했다.정작 서여의도에 위치한 중앙 당사 안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않았다.대신 한나라당 현판을 떼어내 여의도공원을 걸어서 동여의도 쪽 중소기업 종합전시관에 마련된 천막 당사까지 들고 갔다. 지금은 여의도 IFC와 콘래드 호텔이 위치한 자리다.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씻어내고 노무현 탄핵 역풍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천막 당사는 정치적 광야였다. 그때 박근혜 대표의 곁을 지킨 건 최초의 친박 전여옥 한나라당 중앙선대위 대변인이었다. 전여옥 대변인은 자칭 타칭 박 대표의 최측근이었다. 실상은 아니었다. 단지 정윤회와 최순실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을 뿐이다.이때는 한국 보수의 퇴행기였다.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총재가 또다시 패배하면서 한나라당은 반동기로 접어든 상태였다. 당권은 문민정부 이래 내내 비주류였던 민정계의 최병렬 대표한테로 허무하게 넘어가버렸다. 민정계는 군부 독재 시절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출신들을 통칭한다.보수의 퇴행이 노무현 탄핵이란 한나라당의 패착을 낳았다.2003년 3월 12일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발의됐다. 정작 한나라당에 돌아온 건 벅찬 탄핵 역풍이었다.2004년 3월 18일 최병렬 대표가 끝내 사퇴한다. 한나라당은 사실상 리더십 공백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회창의 대선 패배로 대권 리더십도 잃었는데 탄핵 역풍으로 당권 리더십까지 무너지고 말았다.보수의 퇴행이 박근혜 시대를 낳았다. 한나라당이 4?15 총선에서 멸문지화를 피하려면 박근혜 의원의 정치적 자산이 필요했다. 산업화 세대가 지닌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와 노년층이 지닌 육영수 여사에 대한 연민과 대구?경북의 지역 기반이라는 3대 자산이었다.박근혜 대표가 있는 천막 당사로 대한민국의 보수 세력이 총결집하기 시작했다.천막 당사라는 아이디어를 처음 생각해낸 사람은 이병기 당시 여의도연구소 고문이다. 여의도연구소는 한나라당의 싱크 탱크다. 이 고문은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의 특별보좌관을 거쳤다. 나중에 박근혜 청와대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된다.박근혜 대표한테 구당사 안으로는 한 발자국도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조언한 사람은 윤여준 당시 한나라당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이었다. 윤여준 부본부장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책사로 개혁 공천을 주도한 장본인이다. 윤여준도 이병기도 이회창의 사람들이었다.문민정부가 실패하고 개혁 보수를 추구하던 이회창이란 주군까지 잃은 그들은 보수가 멸문지화를 당할 위기에서 독재자의 딸 박근혜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다.천막 뒤에는 박정희 유신 시대를 대변하는 김기춘 의원까지 있었다.시장 보수의 상징이자 이명박 서울시장의 형인 이상득 의원까지 사무총장으로 박 대표의 곁을 지켰다.천막 당사는 보수의 빅 텐트였다.박근혜 의원이 정치 입문 7년 만에 마침내 보수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2004년 4월 15일에 치른 17대 총선은 노무현의 탄핵 역풍과 박근혜의 후광 효과가 맞붙은 선거였다. 결과는 무승부였다.열린우리당은 152석으로 원내 다수당을 차지했다.50석 남짓으로 몰락할 거라던 한나라당도 121석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영남 지역은 사실상 한나라당이 석권하다시피 했다. 천막 당사로까지 내몰리며 수세에 몰렸던 한나라당을 구해낸 박근혜의 승리였다. 선거의 여왕이 등장했다.17대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의 '탄돌이'들만 탄생한 게 아니었다.?탄핵 역풍의 반작용으로 당선된 초선 의원들을 탄돌이라고 부른다.한나라당에는 박근혜 후광 효과로 당선된 초선 의원들이 있었다.비례대표 14번이 바로 유승민 당시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연구교수였다.7번은 전여옥 대변인이었다.11번은 나경원 변호사였다.이들이 17대 국회에서 원조 친박을 이룬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여기에 YS 상도동계의 막내 3선 김무성 의원까지 가세했다.한나라당 내 박근혜 계파는 유신 세력과 5공 민정계와 YS계와 이회창계에 소장파까지 아우르는 보수의 주류로 올라섰다.정윤회 실장이 돌연 ‘요양을 떠나야겠다’면서 여의도 국회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도 이 무렵이었다.?그때만 해도 최순실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여의도에선 거의 없었다.?정윤회와 최순실의 존재는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까지 이어지면서 박근혜 대표의 약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취를 감췄다는 건 역설적으로 이때부터 박-정-최의 박근혜 대권 프로젝트가 본격 가동됐다는 방증이다.정윤회와 최순실의 영향력은 삼성동 팀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됐다. 본격적인 비선실세로 변신했다.박근혜 정권의 비극은 여기서 잉태됐다. 정치적 창업 동지들을 공식화시킬 수 없었던 정치인 박근혜에게 비선은 숙명이었다. 는 이걸 놓쳤다. 천막 당사에서 박근혜 정권이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박근혜 정권은 박근혜-정윤회-최순실의 공동 정권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