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박근혜를 만들었는가 - 5. 조선일보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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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박근혜를만들었는가5. 조선일보의 시각은 달랐다. 박근혜 정권은 와 박근혜의 공동 정권이었다. 천막 당사 시절 윤여준 한나라당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은 선거 현장에서 박근혜 대표에게 단 세 마디만 하라고 주문했다.“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와?“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였다. 그리고 검찰에 출두하며 최순실이 했던 말과 똑같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였다.세 마디만으론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현실적으로는 당시 정치인 박근혜에게 콘텐츠가 부족했다.내용 없는 박 대표의 발언에 힘을 실어준 건 다름 아닌 였다. 총선 이후에도 의 박근혜 띄우기는 계속됐다. 박근혜 대표의 짧은 발언 하나하나에 주석을 달아가며 의미를 부여해줬다. 정치인 노무현에게는 콘텐츠가 풍부했다. 스스로 쌓아 올린 정치적 자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달변가인 노 대통령은 그만큼 말실수도 잦았다.박 대표는 말실수가 거의 없었다. 발언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발언할 내용 자체가 없었다.박근혜의 정치적 자산은 자수성가한 게 아니라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박근혜에게 이미지 정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육영수 여사의 머리를 하고 구체적이진 않지만 단호하게 들리는 단답형의 발언만 거듭했다. 이걸 노무현의 달변과 대비시키면서 원칙과 신뢰라는 이미지로 포장해준 게 바로 였다.에게 노무현 시대는 악몽이었다.노무현 대통령은 와 일전을 불사했다. 노무현은 보수 일변도의 언론 지형을 바꾸고 싶어 했다. 선출된 정치권력을 선출되지 않은 언론 권력이 좌지우지하는 것에 대한 오랜 문제의식이 있었다. 에 자꾸만 말싸움을 걸었다.언쟁은 노무현의 방식이었다. 입장에선 청와대와의 극한 대립은 엄청난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이회창을 통한 집권 저지도 실패하고 탄핵을 통한 권력 회수도 무위로 돌아갔다. 이젠 장기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이때 등장한 대항마가 바로 박근혜였다.박근혜는 노무현의 천적이었다. 노무현이 지역 구도 타파를 주장했다면 박근혜는 3김 시대 이후 한국 정치에서 거의 마지막 남은 지역 맹주였다.?노무현이 민주화 세대의 투사였다면 박근혜는 산업화 세대의 공주였다.?정치인 박근혜로서는 가 참 효과적으로 노무현 시대를 견제할 수 있는 도구였다.17대 국회는 진보 진영한테는 대통령 권력에 이어 입법 권력까지 확보한 절호의 찬스였다.노무현 정부는 4대 개혁 입법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다. 여야 대치 국면에서 박근혜 대표는 4대 개혁 입법 중에서도 가장 최전선에 있었던 국가보안법 개정과 폐지를 순전히 뚝심 하나로 막아냈다.안보는 보수의 DNA다.?국가보안법은 보수에게는 생명선과 같다.이때 어떠한 협상도 거부했던 박 대표의 똥고집을 는 원칙과 신뢰로 치장해줬다. 박근혜 대표는 2005년 내내 이어진 여야 대치 국면에서 의 도움으로 리더십의 신화를 쌓아 올릴 수 있었다. 정치적 자산이 없던 정치인 박근혜한테 자산을 몰빵해준 게 였단 말이다.박근혜를 선거의 여왕으로 만들어준 것도 다. 2006년 5?31 지방선거는 노무현 정권을 무너뜨린 결정타였다.박근혜 대표는 더 이상 2004년 4월 총선 때의 얼굴마담이 아니었다.?박근혜의 한마디가 지방선거의 표심을 갈랐다.2006년 5월 20일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의 지원 유세에 참가한 박 대표는 10센티미터 길이의 카터칼에 피습을 당했다. 귀 아래부터 턱까지 길이 11센티미터의 자상을 입었다.문제는 병원에서 수술받은 직후 깨어난 박 대표가 발언했다는 “대전은요?”였다. 애초에 이런 발언 자체가 없었다. 당시 유정복 비서실장과 선거 상황에 대해 얘기를 나눴을 뿐이었다.이걸 “대전은요?”라고 대서특필해준 대표적인 신문이 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영애 박근혜가 “전방은요?”라고 물었다는 맥락과 똑같았다. 박근혜 띄우기가 박근혜 신화화로 변질되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노무현이 실패할수록 보수의 박근혜 신화 만들기는 탄력을 받았다.노무현의 실패가 박근혜 권력을 낳았다. 탈권위주의적이고 개방적이고 수평적이던 노무현 정부의 민주주의 실험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권위적이고 폐쇄적이고 수직적이던 박정희 리더십에 대한 향수가 커져갔다. 박정희 리더십의 현대판으로 포장된 박근혜 리더십에 대한 대중적 기대로 수렴됐다.박근혜 권력은 민주주의의 실패를 먹고 자라났다.일부는 가 주동한 역사의 퇴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