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박근혜를 만들었는가 - 9. 이화여대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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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박근혜를 만들었는가

누가 박근혜를 만들었는가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2016년 12월호

9. 이화여대

박근혜 청와대의 결정적인 실수는 <한겨레>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점이다.

9월 22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비상 시기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은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9월 23일에는 황교안 국무총리까지 나섰다.

“의혹은 누구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의혹 제기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 한다. 유언비어, 불법에 해당하는 것은 의법 조치도 가능하다”라고 압박했다.

대통령과 총리가 하루 사이로 <한겨레> 보도를 비방으로 폄훼한 다음 사법 조치도 가능하다고 으름장을 놓은 셈이었다. <조선일보>와의 정면 대결에서도 완승한 청와대로서 <한겨레>는 해볼 만한 상대였다.

박근혜 정권의 지지층은 <한겨레>를 읽지 않는다. 프레임을 바꿔서 정국을 전환시키는 <조선일보>의 권능이 <한겨레>에는 없다.

<한겨레>는 9월 23일 “최순실이 K스포츠 재단이 공식 발족하기 몇 개월 전부터 재단의 취지를 설명하고 참여를 권유했다”는 보도를 한다. 최순실이 재단 설립을 주도했다는 얘기다. 정작 같은 날 미르 재단과 K스포츠 재단에 자금을 기부한 전경련의 이승철 상근부회장이 ‘두 재단은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것’이라는 언론 인터뷰를 해버린다. <한겨레> 보도를 무색하게 만드는 발언이었다. <한겨레>의 최순실 보도는 여기서 막혀버린다. 이렇게 청와대는 <한겨레>와의 승부에서도 싱겁게 완승을 거두는 듯했다.

<한겨레>가 청와대와 힘겹게 대치 중인 상황에서 정국의 돌파구를 마련한 건 뜻밖에도 이화여대생들이었다.

이화여대가 최순실과 정윤회의 딸 정유라의 입학을 위해 학칙까지 뜯어고쳤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원래 이대의 체육 특기자 종목에는 승마가 없었다. 승마 특기생인 정유라를 합격시키기 위해 원포인트 학칙 개정을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2015학번인 정유라는 대학 1학년 내내 출결도 불량했고 과제도 안 냈고 시험도 안 쳤다. 당연히 제적될 처지였다. 이대는 체육 특기생은 결석을 하더라도 출석으로 인정해주도록 학칙을 개정했다. 정유라 한 사람 때문에 입시 학칙과 학점 학칙을 연거푸 개정한 꼴이었다.

대신 이대도 받은 게 있었다.

2016년 교육부 재정지원사업 9개 가운데 8개를 싹쓸이했다. 그나마 선정되지 않은 1개 사업은 선정되지 않은 게 아니라 참여하지 않은 것이었다. 지원액 규모는 200억원에 달했다. 정권 비선실세의 딸을 이대에 입학시키는 대신 비선실세가 이대를 위해 힘써준 게 아니냐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하필 이대가 선정된 교육부 재정지원사업 가운데 평생교육단과대학 사업이 있었다. 여름 내내 이화여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미래라이프 단과대학 사업 말이다. 이대생 300여 명이 7월 28일부터 30일까지 사흘째 본관 점거 농성 중이었다.

미래라이프대학은 고교 졸업 뒤 취업해서 3년 이상 근무한 직장인이나 30세 이상 성인이 전공을 수료하면 이대의 4년제 학사 학위를 주는 제도다. 평생교육이라고 포장했지만 사실 학위 장사였다. 거칠게 말하면 최순실 같은 돈 있는 아주머니들한테 이대 졸업장을 팔겠다는 말이었다. <타짜>의 정 마담처럼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고 말하고 다닐 수 있게 말이다.

이대생들이 미래라이프대학에 예민하게 반응한 건 학교의 학위 장사 탓만은 아니었다.

과거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건 결국 자본주의의 결과인 불평등을 민주주의가 교정해주기를 원해서였다. 그때는 민주화가 시대정신이었다. 지금 이대생들은 자본주의의 결과인 불평등은 수용할 테니 민주주의가 과정의 평등만이라도 보장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결과의 불평등은 인정하지만 과정의 불평등은 인정할 수 없다는 건 21세기 자본주의의 시대정신이다. 최순실 같은 자가 돈을 주고 이대 나온 여자 행세를 하고 다니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었다.

이게 바로 경제민주화였다.

정작 이화여대 최경희 총장은 이대생들의 이런 경제민주화 요구를 경찰 21개 중대를 투입해서 분쇄해버린다. 최순실이라도 미래라이프대학에 입학시키려고 했던 게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결국 이대 사태는 최순실 게이트가 열린 9월까지 장기화된 상태였다.

이때 정유라 특혜 의혹이 터져 나온다.

미래라이프대학으로 들끓던 이대생들의 마음에 정유라가 불을 붙였다. 정유라는 헬조선의 왕녀였다. 이대생들 스스로가 정유라 특혜 의혹을 신문사에 제보하기 시작했다. 정유라가 계절학기에 출석한 적도 없는데 학점만 받아 갔다는 증언이나 비속어에 비문까지 쓴 리포트가 B학점을 받았다는 제보는 모두 이대에서 나온 것이었다.

최순실이 주도한 정유라 특혜 의혹을 비중 있게 다룬 매체는 <한겨레>와 <경향신문> 같은 진보 매체였다. 사실상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같은 보수 매체는 이런 제보를 무시하다시피 했다. 이게 <조선일보>의 한계이고 언론 간 철학의 차이였다.

평소에 헬조선 문제를 심도 깊게 고민하던 <한겨레>는 이대 사태가 보여주는 시대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정유라 입시 비리가 한국의 학부모들과 학생들한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 사건인지도 알았다. 미르 재단이나 K스포츠 재단에서 피부에 와 닿지도 않는 금액이 청와대와 재벌 간에 오갔다는 폭로보다 더 국민을 분노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경향신문>은 10월 19일 정유라가 2014년 12월 3일에 올린 SNS의 글을 공개한다. 정유라가 한창 이대 입시를 치르던 시기였다.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있는 우리 부모 가지고 감놔라 배놔라 하지 말고. 돈도 실력이야.”

그렇게 미르 재단이나 K스포츠 재단 쪽에선 청와대의 철통 방어로 막혀버리는 듯했던 최순실 게이트의 불씨가 헬조선의 분노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최순실 게이트는 사이비 종교라는 혹세무민적 휘발성에 입시 비리라는 한국 학부모들의 영원한 트라우마까지 건드리면서 청와대 권력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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