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제작 드라마의 명암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높은 완성도와 흥행을 동시에 챙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사전 제작 드라마는 왜 망했을까? | 드라마,사전 제작,구르미 그린 달빛,태양의 후예,달의 연인

전체 에피소드를 사전 제작해 방영에 들어가는 영미권 드라마와 달리 한국 드라마는 오랜 시간 생방송에 가깝게 제작했다. 본방영에 들어가기 전 2편에서 4편 정도 미리 제작을 끝내놓고 방영을 시작하긴 하지만, 드라마가 중·후반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아침에 촬영해서 오후 내내 편집하고 밤에 방영하는 스케줄이다.대본이 늦게 나와서, 배우들 스케줄이 안 맞아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조금씩 밀리다 결국 방송 시간에 맞춰 테이프를 넘기면 다행인 지경이 되어버리곤 했다. 스태프들의 혹사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류 열풍이란 허울 좋은 성과 뒤엔 과로와 사고로 목숨을 잃는 스태프와 보조 출연자들의 희생이 있었다. “우리도 사전 제작 도입하면 안 되나요?” 현장의 오랜 절규는 좀처럼 반영되지 않았다.답은 중국 시장에서 나왔다. 인구의 1퍼센트만 매료시켜도 1000만 명이 매료되는 사상 최대의 TV 시장. 한국 제작자들에게 중국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었다. 하지만 중국 당국의 깐깐한 사전 검열을 거쳐야 했다. 한국 방영을 끝내고 검열에 들어가면 이미 중국어 자막까지 붙은 불법 영상이 중국 포털 순회공연을 마친 이후라 제값을 부르기 어려운 상황.제작자들은 결국 사전제작 카드를 꺼냈다. 많은 이들이 피를 토하며 요구했던 ‘쪽 대본 철폐, 전편 사전 제작’은 그렇게 당위가 아니라 자본의 논리 덕에 도입되었다. 많은 이들이 허탈한 마음을 숨기기 어려웠지만, 이제 완성도도 노동 강도도 합리적으로 조정되겠지 싶은 마음에 기대를 걸었다. 2016년은 드라마 사전 제작의 영광스러운 원년이 되었어야 했다.연초엔 제법 긍정적으로 보였다. KBS 가 워낙 흥했으니까. 중국 시장에서 사랑받는 송혜교와 송중기, 흥행 불패 신화를 써왔던 김은숙 작가의 뻔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로맨틱 코미디의 결합은 수많은 옥에 티와 국수주의 논란을 돌파할 만큼 위력적이었다.먼지가 폴폴 날리는 재난 현장에서 개복 수술을 감행하는 의사와 보고 싶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민간인 여성을 향해 저격총 스코프를 겨누는 군인이 나오는 말도 안 되는 작품이었지만 시청률이 좋으니 만사 오케이였다. 중국 시장에 편당 2억2000만원에 전편 판매가 완료됐고, 동남아에서도 신드롬에 가까운 흥행 기록을 세웠다.의 성공은 KBS 또한 흥행할 것이란 낙관으로 이어졌다. 사전 제작에는 자본이 많이 필요해서 흥행 카드를 충분히 확보해둬야 하는데, 남녀 주연과 작가 모두 믿음직해 보였으니까. 당대 최고의 청춘 스타 김우빈과 수지가 주연을 맡고 의 이경희 작가까지 합류했다.“이경희식 신파 멜로라니 조금 올드하지 않아요?” “뭐, 중국 시장은 한국 시장과는 정서적으로 5년 정도 시차가 있다나 봐요.” 하지만 이들은 뚜껑을 열고 나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스타로 설정된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에게 멋대로 고백했다가 밀쳐내고 시비 걸기를 반복하다가, 사전 교감도 없이 공개 프러포즈를 해버리며 여자의 삶을 망쳤다.핑계는 딱 하나, 시한부 인생이라서였다.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데이트 폭력 수준으로 여자 주인공을 막 대하는 남자와 질질 끌려다니는 여주인공. 정서적으로 족히 15년은 퇴보한 설정에 시청자들은 말을 잃었다. MBC에서 를 하는데 왜 굳이 저걸 봐?이쯤 되니 SBS 를 바라보는 시선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준기, 아이유, 강하늘, 남주혁, 홍종현, 지수, 서현에 이르는 스타 캐스팅, 와 의 김규태 PD, 중국에서 역대급 흥행을 거둔 원작까지. 있는 것 없는 것 다 끌어모아 인적·물적 자본을 투입했는데, ‘이래 놓고 망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불안함이 물안개처럼 피어 올랐다.아니나 달라, 너무 많은 스타를 등장시킨 드라마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포커스를 나눠주느라 내용을 진전시키지 못하고 착실하게 산으로 올라갔다. 이준기와 강하늘이 망해가는 드라마를 살려보려고 고군분투하는 동안 큰 기대를 모으지 않았던 KBS 은 박보검과 김유정에게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안겨주며 여유 있는 압승을 거뒀다. 오로지 배우를 향한 의리로 을 본 한국과 중국의 시청자들은 드라마가 끝난 뒤 이 작품을 인내해낸 제 자신의 수고를 위로해야 했다.대체 이렇게까지 망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답은 명확해 보인다. 원금 회수를 장담할 수 있을 만큼 흥행 코드를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완성도와 작품성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을 미룬 탓이다. 근래 이경희 작가 작품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수지나 아이유의 연기력이 제대로 검증된 적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주인공 얼굴에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들이대느라 의상도 세트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김규태 PD의 스타일도 전작에서 이미 드러난 패였다. 하지만 반드시 흥행에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제작자들은 이 말도 안 되는 조합을 질러버렸다. 일단 팔아야 한다는 생각이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본을 압도하는 순간, 좀처럼 망할 이유가 없어 보였던 사전 제작 드라마들은 그렇게 침몰했다.높은 완성도와 흥행을 동시에 챙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사전 제작 드라마는 왜 망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