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졌다.
예거 르쿨트르가 와장창 깨져버렸다. 예거 르쿨트르는 명품 시계다. 닥터 스트레인지한테는 마지막 남은 모든 것이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네팔의 카트만두 뒷골목에서 좀도둑 일당과 마주친다. 예거 르쿨트르를 빼앗으려고 든다. 저항해본다. 이때 예거 르쿨트르는 망가져버린다.
시계가 망가진 게 아니다. 시간이 망가졌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살았던 이제까지의 시간은 끝났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잘나가는 신경외과 의사였다. 맨손으로 사람 뇌를 열어 총알을 빼낼 정도로 최고였다. 그 시절 닥터 스트레인지는 시곗바늘 같은 인간이었다. 스스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살고 있다고 믿었다. 정작 자신이 왜 그렇게 살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날도 예거 르쿨트르를 찼다. 람보르기니를 몰고 신나게 달렸다. 불의의 사고가 났다.
깨어났을 땐 병원이었다. 양손은 만신창이가 됐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의사 생명은 끝났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수전증을 앓는 양손에 집착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돌아가던 시곗바늘 같은 삶만이 유일한 인생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치료비로 재산을 탕진했다. 빈털터리가 된 닥터 스트레인지는 결국 사이비 의술에 빠져든다. 네팔의 카트만두에 있는 카마르타지란 곳에 가면 현대 의술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을 낫게 해준다는 얘기를 듣는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남은 재산을 탈탈 털어 카트만두로 향한다.
마지막 남은 것은 예거 르쿨트르뿐이었다. 시계 같은 삶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의 상징이었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예거 르쿨트르를 빼앗아 가려는 좀도둑들한테 성치 않은 손으로 반항한 건 그래서였다. 예거 르쿨트르를 빼앗기면 희망도 빼앗기는 거였다. 예거 르쿨트르가 깨졌을 때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지막 희망도 무너졌다.
그때였다.
모르도가 나타난다. 스승인 에인션트 원한테 데려간다. 에인션트 원은 지구 최강의 마법사다. 모르도는 에인션트 원의 제자다. 물론 그때까지 닥터 스트레인지는 들어본 적도 없고 믿어본 적도 없는 얘기다.
에인션트 원은 닥터 스트레인지를 각성시킨다. 시계가 망가지고 이제까지의 시간이 끝장났을 때 비로소 새로운 시간이 시작됐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시간에 관한 영화다.
다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역시 마법에 관한 영화가 될 거라고 예측했다. 마법사가 주인공이니까 마법에 관한 영화인 건 맞다. 횡설수설하는 마법 용어도 많이 등장한다. 아동용 마법 영화인 <해리포터>의 ‘아부다 카다부라’와 도긴개긴이다. ‘비샨티의 서’니 ‘아가모토의 눈’이니 ‘아스트랄 프로젝션’이니 중얼거리면 이뤄진다.
처음엔 마블이 이런 마법을 과학적으로 합리화해줄 거라고 믿었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양자역학을 다룰 거라는 얘기도 나왔다. 마블의 또 다른 히어로물 <앤트맨>에서 양자역학의 미시적 세계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니었다.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에인션트 원은 이렇게 잘라 말한다.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이 이해될 필요도 없다.”
그걸로 끝이다.
에인션트 원과 닥터 스트레인지는 마법을 부려 시간 왜곡이나 공간 해체나 유체 이탈이나 공중 부양 같은 짓을 한다. 손만 한번 휘저으면 뉴욕 도심이 <인셉션>의 꿈속처럼 섰다가 누웠다가 접혔다가를 거듭한다. 손을 몇 번 빙빙 돌리면 공간 이동과 차원 이동을 숟가락으로 밥 먹듯이 할 수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를 마법 영화로만 이해한다면 이런 설정은 정말 만화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 자체로도 즐길 만하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시각 효과적으로는 <입센션>에 <매트릭스>를 곱한 수준이다. 마법의 원리는 몰라도 마법의 결과만큼은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다는 말이다.
꼭 롤러코스터의 원리를 알아야만 롤러코스터가 재미있는 건 아니다. 다만 <닥터 스트레인지>는 시각적 롤러코스터에 머무는 킬링 타임 영화가 아니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이른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마블은 단순히 히어로 제조사가 아니다. 수십 년 동안 히어로가 활약하는 하나의 완결된 세계를 구축해왔다. 천지창조다. 흔히 마블 세계관이라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 현실의 뉴욕과 닮았지만 아이언맨이 날아다니고 헐크가 포효하는 마블식 뉴욕을 창조했다는 말이다.
실사 영화가 세계로 진출한 뒤부터 마블의 세계관은 더 정교해졌다. 세계는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 같은 다양한 요소로 이뤄져 있다. 마블의 히어로들은 각기 다른 능력을 발휘하는 영웅이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각각 마블 세계관의 어떤 측면을 상징한다.
캡틴 아메리카는 정치다.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 1편인 <퍼스트 어벤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다. 국가 전시 체제에 동원되는 히어로의 모습이 그려진다. 마블 영화 중에서도 수작으로 손꼽히는 <윈터 솔져>에서는 국가 시스템이 어느새 오염돼버렸고 더 이상 국가 체제를 믿지 않게 되는 캡틴 아메리카의 모습을 그렸다. 3편 <시빌 워>는 체제에 저항하는 캡틴 아메리카와 체제를 수용하는 아이언맨의 대립을 그렸다. 흡사 좌파의 우파 같다.
아이언맨은 기술이다.
기술은 자본주의의 엔진이다. <아이언맨> 1편은 기술적 진보가 인류 복지에 기여한다는 믿음을 담고 있다. 2편에서는 그런 믿음이 무너진다. 악당한테 넘어간 기술은 인류의 재앙이 된다. 3편에서는 기술 성장에 광적으로 집착하게 된 아이언맨의 모습을 그린다. 문어발식으로 확장된 아이언맨 슈트들은 성장에 집착하는 자본의 모습과 포개진다.
정치와 경제 이외에도 세계를 구축하는 중요한 요소가 종교다.
<토르>는 신학이다.
북유럽 신화를 모티브로 한 <토르>는 인간계와는 다른 아스가르드라고 하는 신선계를 배경으로 한다. 신이라고는 하지만 행동거지는 딱 중세적이다. 신이 인간의 모든 것이었던 시대 말이다. <토르> 1편과 2편 <다크월드>에서 그려진 신들의 삶은 인간과 별다르지 않다. 차이는 윤회다. 2017년에 개봉하는 3편 <라그나로크>에서는 신들의 종말을 그린다. 신은 그렇게 생로병사를 매번 똑같이 윤회한다. 생성했다 소멸하는 우주의 원리를 영원히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신들의 굴레다.
그렇다면 세계관에서 빠진 게 하나 있다.
철학이다.
철학이 없는 세계관은 벽과 기둥만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하다. 마블은 세계관을 입체화시키고 구체화시키려면 철학이 빠져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또 다른 에인션트 원의 제자 웡은 말한다.
“어벤져스는 물리적 위협으로부터 세상을 지키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차원의 위협으로부터 세상을 지킨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철학자다.
물론 마블에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나올 리는 없다. 어디까지나 마블은 대중 영화를 만드는 스튜디오다. 철학의 근본적 질문은 단순화시킨다.
죽음이다.
인간은 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죽음에 대한 질문은 시간에 대한 철학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죽는 건 시간이 흐르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에 관한 철학적 사유는 시간이란 무엇인가로 귀결된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예거 르쿨트르를 차고 등장하는 이유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중요한 마법 도구 가운데 하나인 아가모토의 눈만 있으면 시간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 우주의 시간을 조정하는 건 물론이고 특정 사물이나 인간의 시간을 따로 조정할 수도 있다. 시간 조정 능력이야말로 마법의 근원이란 말이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예거 르쿨트르가 망가졌을 때 비로소 그가 위대한 시간 마법사의 길로 들어서는 건 상징적이다.
망가진 닥터 스트레인지의 시계는 예거 르쿨트르 마스터 울트라 씬 퍼페추얼 캘린더다. 두께는 9.2밀리미터밖에 안 된다. 달이 차고 지는 걸 보여주는 문페이즈에 2100년까지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틀림이 없다는 연월일요일 표시 기능이 탑재돼 있다. 예거 르쿨트르 중에서도 영원한 시간을 의미하는 제품이다.
시계가 망가졌을 때 닥터 스트레인지의 시간도 망가졌지만 결국 오랜 수련 끝에 자신의 사명이 세상의 망가진 시간을 고치고 시간을 지켜내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시계 안에 갇혀서 한 방향으로만 흐르던 닥터 스트레인지의 시간은 예거 르쿨트르가 깨졌을 때 시계 밖으로 빠져나와 비로소 자유롭게 흐르기 시작한다.
<닥터 스트레인지>에는 4개의 차원이 등장한다. 현실 차원과 다크 차원과 아스트랄 차원과 미러 차원이다.
우리가 사는 곳이 현실 차원이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숙적 도르마무가 사는 곳이 다크 차원이다.
육신에서 벗어나 영혼이 움직이는 곳이 아스트랄 차원이다. 영계다.
현실을 반영하지만 현실과는 무관한 곳이 미러 차원이다.
<닥터 스트레인지>에서는 4개의 차원을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전투가 벌어진다. 악당들은 현실 차원에 다크 차원을 끌어들이려고 애쓴다. 이유는 하나다.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다크 차원은 일종의 블랙홀이다.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한 적이 없는 곳이다. 악당 케실리우스는 말한다.
“시간은 인간에겐 모독이야. 왜 인간은 죽어야만 하나? 왜 시간이 인간을 지배하게 둬야 하지? 다크 차원에는 시간이 없어. 모든 것이 영원해.”
닥터 스트레인지는 케실리우스가 다크 차원의 악마 도르마무를 끌어들이는 걸 막는다. 잠깐 가치관의 혼란이 온다. 케실리우스는 시간을 없애서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든다.
반면에 닥터 스트레인지는 인간이 계속 죽게 놔두기 위해 싸운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이런 식으로 주장한다.
“죽음이 있어서 인생은 의미가 있다. 끝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인간은 오늘을 산다. 영원은 영원한 무의미를 의미할 뿐이다.”
닥터 스트레인지와 케실리우스가 미러 차원에서 벌이는 전투는 <인셉션>을 능가하는 세계의 왜곡을 보여주지만 더 큰 사고의 왜곡은 둘 사이의 철학적 논쟁에서 벌어진다. 시간은 인간을 지배하는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가?
닥터 스트레인지는 고장 난 예거 르쿨트르를 고치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장 나기 이전의 시간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대신 고장 난 시계를 그대로 손목에 찬 채 생텀 생토럼이라는 뉴욕의 은신처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예거 르쿨트르 뒤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시간이 지나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될 거야, 크리스틴.”
크리스틴은 닥터 스트레인지의 썸녀다.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워진 닥터 스트레인지한테 예거 르쿨트르는 더 이상 지금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아니다. 자신이 속하고 싶은 시간의 징표다. 닥터 스트레인지에게는 사랑이 시간의 기준점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도 그렇다. 인생의 시간은 길지만 우리는 늘 자신이 어느 시간에서 왔고, 어느 시간에 속해 있고, 어느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느끼며 살아간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