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력을 차단하라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비싼 물건일수록 관리가 중요하다. 기계식 시계도 마찬가지다. | 시계,watch,자력,자석,기계식

사치품의 특징 중 하나는 손이 많이 간다는 것이다. 울과 캐시미어만 봐도 알 수 있다. 기계식 시계 역시 쿼츠나 디지털 시계보다 더 신경 써서 관리해야 한다. 시계의 기본 덕목인 정확성도 상대적으로 떨어진다.기계식 시계의 무브먼트는 내부의 윤활유 상태나 사용자의 자세 등에 영향을 받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오차가 커지기 시작한다. 등불 앞의 바람처럼 연약한 기계식 시계의 무브먼트를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는 다름 아닌 자력이다.시계의 무브먼트를 보면 모기장 모양으로 감긴 채 와이퍼처럼 흔들리는 부품을 볼 수 있다. 시계의 정확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밸런스 스프링이다. 밸런스 스프링은 탄성과 강도가 적절해야 하는데 이 소재를 만들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을 정도로 귀하다.자성은 밸런스 스프링의 길이를 줄이고, 그 결과 밸런스 스프링의 시간당 진동수를 바꾼다. 자성은 시계엔 백해무익하다.자성이 문제면 애초부터 좀 잘하지 왜 자성에 취약한 시계를 만들었을까 싶을 수 있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기계식 시계를 처음 만들었을 때를 생각해봐야 한다.당시 세계는 지금처럼 기계화하지 않았다. 자동차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에 도로가 자동차 폭만큼 넓을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자석이 없던 시대에 시계도 굳이 자력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기계식 시계 제작자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지금은 자석이 너무 많다. 주변이 다 자석이다. 냉장고에 붙어 있는 것, 그녀의 파우치나 당신의 스마트폰 케이스에 붙어 있는 것, 스테레오 스피커, 모니터, 태블릿, 전자레인지, 플랫 패널 T V까지. 우리의 일상이 크고 작은 자기장에 둘러싸여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시계 전문지 의 제이슨 히튼도 기사에 비슷한 이야기를 썼다. 오메가의 대표 스테판 우르크하르트가 밝힌 자사 시계 고장률 1위가 자성이라는 것이었다.기계식 시계업계 역시 자성이라는 위험 요소에 맞서왔다. 대표적이고 고전적인 대응책은 연철 케이스다. 케이스와 무브먼트 사이에 자성이 통하지 않는 연철 케이스를 끼워 넣는 것이다. 연철은 자성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다.자성 차단을 위한 연철 케이스에는 ‘패러데이 케이스’라는 별도의 이름도 있다. 뭔가를 씌워 외부 자극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콘돔 같은 방법론이다.시계 명가의 전통적인 항자성 시계는 콘돔형 방법론을 따른다. 롤렉스의 밀가우스와 IWC의 인제니어, 진의 항자성 시계는 모두 연철 케이스를 씌워 자성을 차단한다. 그래서 이 시계의 무브먼트 뒤는 모두 유리가 아니라 쇠로 덮여 있다. 기계식 시계가 귀금속화하면서 보잘것없는 무브먼트를 달고 있는 시계도 뒤를 훌렁 보여주는 경향과는 역행하는 셈이다.밀가우스와 인제니어라는 이름은 기능뿐 아니라 당시의 분위기도 담고 있다.‘밀가우스’는 ‘밀레니엄 가우스’의 준말, 즉 1000가우스까지 견딘다는 뜻이다. ‘인제니어’는 독일어로 ‘엔지니어’를 뜻한다. 강한 자성에 노출되는 특수 직군을 위한 시계임이 이름에서부터 드러난다. 밀가우스 역시 강한 자기에 노출되는 스위스의 핵 연구 기관 CERN 연구소의 의뢰로 만들었다.21세기 명품 브랜드는 한때의 수요를 현대의 신화로 재활용한다. 사실 기계식 시계는 자성을 꽤 많이 극복했다. 밸런스 스프링이 자성의 영향을 받는다면 소재 개선이 자성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이다.롤렉스는 자성에 강한 신소재 파라크롬을 개발해 밸런스 스프링에 사용한다. 즉 밀가우스의 연철 케이스 없이도 롤렉스 시계는 어느 정도 항자성 기능이 있다. 파텍 필립 역시 신소재 스파이로맥스로 밸런스 스프링을 만들어 자성에 대응했다. 말하자면 정관수술적 방법론이다.정관수술적 방법론의 최전선에 오메가가 있다. 오메가는 2013년 아쿠아 테라>15,000가우스라는 대단한 이름의 시계를 발표했다. 이름처럼 이 시계는 1만5000가우스에 달하는 자성에도 견딜 수 있다.비결은 역시 밸런스 스프링의 소재다. 오메가는 아예 금속이 아닌 실리콘으로 밸런스 스프링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런 식으로 세계와 시계는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