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작점이 된 책 한 권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김성곤 교수의 '처음 만나는 영화'를 보고 처음 영화글을 썼다. | 책,Book,김성곤 교수의 영화 에세이,처음 만나는 영화,김성곤

2000년 1월 5일이었다. 전역을 3개월여 앞두고 있었다. 말년 병장이었다.동기들과 잠깐 외출해서 부대 인근 PC방에 들렀다. 스타크래프트가 창궐하던 무렵이었다. 동기들이 테란이냐, 저그냐, 임요한이냐, 이윤열이냐로 옥신각신할 때 아래한글이 깔려 있다는 느려터진 PC를 골라 앉았다. 빼곡하게 적어 온 노트를 펼쳐놓고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에 대한 영화 평을 이라는 영화 웹진에 올리는 위해서였다. 노트에는 군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써댄 영화 평으로 가득했다.영화 평을 공개하기는 처음이었다. 같은 권위지의 김영진 같은 스타 평론가만 영화 평을 쓸 자격이 있는 줄 알았다. 이라는 영화 웹진에선 누구나 자유롭게 영화 평을 올릴 수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은 1999년 11월 13일에 개봉했다. 한석규와 심은하가 형사와 살인 용의자 역의 남녀 주연을 맡은 당대 최대 화제작이었다. 당시 한석규는 로 대박 난 흥행 보증수표였고 심은하는 전도연, 고소영과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이끌고 있었다.정작 장윤현 감독이 연출한 은 난해하기 짝이 없는 스릴러였다. 도대체가 해석 불가, 이해 불가였다. 관객들은 누가 좀 '텔 미 썸딩'해달라고 투덜거렸다.그렇게 인터넷에 올린 에 대한 영화 평은 제법 인기 글이 됐다. 악플이든 선플이든 댓글도 주렁주렁 달렸다. 어느 날 에서 이메일이 왔다. 정기적으로 영화 평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원고료는 없었다. 상관없었다. 난생처음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은 듯한 기분만으로도 보상은 충분했다.그렇게 군대 말년에 이라는 무명 웹진에서 에 관한 영화 평을 써서 글쟁이로 데뷔했다. 기자로서 첫 직장은 영화 주간지 이지만 최초의 대중적 글은 대단찮은 수준이긴 했어도 분명 이었다. 덕분이었다.군 입대를 앞둔 대학교 4학년 때인 1998년 를 샀다. 저자 김성곤이 누군지도 몰랐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운명처럼 이 책과 마주쳤다. 덕분에 영화를 읽는 법을 깨우쳤다.당시 시리즈가 인기였다. 정작 누구도 할리우드가 만든 저질 폭력물인 를 오락물 이상으로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 김성곤 교수는 를 이렇게 읽었다.“그때부터 두 사람의 인간적 교류와 교신이 시작되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번 미국의 영화와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낯익은 광경-즉 광야에서 방랑하는 백인 남성과 유색인 동반자의 우정-을 발견하게 된다.”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위험과 절대적 고립 속에서 매클레인은 비로소 인간 교류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무시하고 자신의 고집만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모두 파멸한다.” “는 크게 보아 인간 교류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김성곤 교수는 에서 미국 문화와 현대사회의 본질적 문제를 읽어내고 있었다. 김성곤의 책을 읽고 난 뒤 비로소 영화가 더 큰 세계를 보여주는 창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영화를 읽으면 세상을 읽을 수 있었다. 돈오의 순간이었다.그때부터 혼자 영화 평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영화 역사와 영화 이론에 기반을 둔 정통 영화 평은 아니었다. 처럼 영화를 통해 읽어낸 세상과 사회와 문화와 인간의 모습이었다. 당시엔 그 차이를 잘 몰랐다. 그저 영화를 보고 나면 무언가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갈망을 주체하지 못했을 뿐이다.영화로 본 세상을 글로 읽어내는 건 지적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하는 행위였다. 갈망은 입대를 하고 나서도 가시지 않았다. 세상과 단절되자 오히려 더 강해졌다. 그렇게 몇 년을 쓴 영화 평이 노트 몇 권에 이르렀다. 오직 쓰고자 해서 쓰였을 뿐 읽히고자 한 글은 아니었다.왜 그때 영화 평을 에 공개하려고 마음먹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18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구글링을 해봐도 “피 속에 파묻혀버린 주제의 스테레오화”라는, 저자 자신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싶은 젠체하는 제목만 검색될 뿐이다. 분명한 건 역시 에서 시작된 글이란 사실이다.나중에야 김성곤 교수가 유명한 영문학자라는 걸 알았다. 영화 전문지에서 시작된 기자 경력은 급기야 경제·경영 전문지까지 이어졌다. 글쓰기의 영역은 영화를 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까지 거의 전방위로 확대됐다.영화라는 창문을 통해 세상을 읽던 아마추어 영화 평론가는 세상을 육안으로 직시하고 세상을 읽어내는 저널리스트가 됐다. 그사이에도 책장 한편에는 한결같이 가 꽂혀 있었다. 평생 글쓰기의 시작이 돼준 고마운 책이다.“신기주 기자의 추천으로 이 책이 의 내 인생의 책 1위 후보로 올랐을 때는 놀랐고 고마웠다. 26년 전에 출간된 책을 아직도 기억해주는 독자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성곤 교수가 쓴 개정·증보판의 서문을 읽다가 울컥했다. 이 책과 처음 만난 1998년부터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방송에서 책을 소개한 인연으로 개정·증보판의 추천사도 부탁받았다.“이 책은 글쟁이 신기주의 시작점이었다. 불러주는 사람도 가고 싶은 곳도 없던 그 시절 이 책을 읽고 영화 평을 쓰기 시작한 게 모든 글쓰기의 시작이었다.”아직 김성곤 교수를 만나본 적은 없다. 여러 분야를 취재하면서 막연히 언젠가 한 번은 만나뵐 일이 있겠지 생각했다. 책과는 운명처럼 만났지만 저자와의 인연은 멀었다. 한 권의 책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 그걸 경험했기에 를 대신한 개정·증보판의 새로운 제목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