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위계와 질서가 있는 조직이다. 장기판의 말처럼 자기 자리가 있고 각자 행마가 있다. 같은 자리라도 성별에 따라 대하는 법도 다르다.
남성
王/회장
이제 한국 기업의 남성 오너는 2세 혹은 3세 경영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은숟가락을 물고 태어난 세습 왕회장을 상대하려면 왕의 행마법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장기판 안에서도 왕은 네모난 사각형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조심조심 한 번에 한 칸씩 밖엔 못 움직인다.
마찬가지다. 기업의 세습왕은 항상 한정된 소수의 사람들하고만 접촉한다. 대부분 자신이 깊이 신뢰하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한쪽으론 굉장한 지식과 식견과 인맥이 있지만 다른 쪽으론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문외한인 경우가 많다.
기업 안에서 이런 왕을 상대하려면 우선 왕의 관심사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남성 오너의 경우엔 학맥이나 인맥을 인용하는 게 효과적이다. 왕은 두 사람 모두가 잘 아는 누군가에 대해 안부를 주고받거나 은연중에 인물평 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오너들은 기업 안팎의 사람들을 장기판 위의 말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항상 그들을 어떻게 움직일지 골몰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세밀한 정보에 큰 흥미를 보인다. 특히 기획재정부나 금융감독원, 청와대나 국회 같은 정관계 쪽 유력 인사의 정보는 귀가 솔깃해서 듣곤 한다.
경청은 왕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다. 잘하면 왕의 정보원 역할을 부여받을 수도 있다. 주고받은 정보가 마음에 들면 직통 번호를 주는 경우도 있다. 왕을 상대하려면 왕이 필요한 사람이 돼야 한다.
단, 왕이 부자라는 점 때문에 옷이며 골프며 자동차 같은 얘기부터 떠들어대는 건 금물이다. 그런 개인적 취향은 동급의 친구들과 나누지, 장기판의 졸과 나누지 않는다.
士/비서실장
그룹에 따라 다양한 별칭이 붙지만 어디나 전체 조직을 조율하는 수석 참모가 있기 마련이다. 사실 이런 수석 참모들은 재무통이거나 전략통인 경우가 많다. 꼼꼼하고 빈틈없고 간교하고 근면하다.
이런 사실장은 함부로 가까이하는 게 아니다. 당신이 왕 앞에선 보이지 않았던 여러 행동들이 사실장을 통해 왕한테 직보된다. 좋을 리가 없다. 가능한 멀리하라.
車/사장
전형적인 직진형 인재다. 왕이 진격하라면 무조건 전진하는 직진성 덕분에 그 자리에 올랐다. 지금은 자수성가한 월급쟁이 사장이지만 야심이 큰 경우가 많다. 도전과 성취를 삶의 이유로 여기는 성격들이다.
차사장은 융통성이 없다. 말보단 결과를 중요하게 여긴다. 아부가 안 통한다. 차를 상대하려면 행마의 길목에서 비켜서야 한다. 직진을 방해하는 것들은 그게 무엇이든 장애물로 여긴다. 떠밀리기 싫으면 무조건 충성하라.
사람은 일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엄격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이론을 신뢰한다. 고로 차사장한테 관리 대상처럼 보이면 망한다.
象/이사
상이사는 가장 상대하기 까다롭다. 일만 잘해서도 안 되고 말만 잘 들어서도 안 된다. 가장 내부 경쟁이 치열한 자리이다.
편을 가르는 게 습관이 돼 있다. 당신이 자기 사람인지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 한다. 한번 눈 밖에 나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일을 못하는 후배보다 일을 잘해서 나중에 자기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는 후배를 더 불편해한다.
대신 줄을 잘 서면 이사와 함께 승진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사내 정치란 결국 어떤 상차림에 숟가락을 올릴 것이냐의 문제다. 장기판 위에서 우상과 좌상 가운데 누가 더 오래 살아남을지 가늠할 상상력이 필요하다.
馬/부장
사실상 회사를 지탱하는 핵심 인력이다. 본인도 일에 한창 재미가 들려 있는 시기다. 당신이 부장 못지않게 일이 재미있다면 좋은 선후배 사이가 될 수 있다. 마부장은 작은 장애물쯤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다. 필요하면 뜻밖의 창의성도 보여준다. 마부장도 그렇게 자기처럼 창의적인 후배를 예뻐하기 마련이다. 일은 마부장한테 배워라.
包/과장
포과장은 ‘무데뽀’다. 영업력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뒤처리는 나머지 사람들의 몫이다.
포과장과 마부장은 사실상 회사에서 당신이 따를 만한 상반된 롤모델이다. 포과장처럼 밀어붙이면 큰 성과를 이룰 수도 있지만 실패도 많다. 실패하면 포과장은 조직에서 버림받는다.
포과장 앞에선 “어렵다”거나 “안된다”는 얘기를 해선 안 된다. “해보겠습니다”라고 답하는 걸 좋아한다. 마부장처럼 친절하게 방법을 알려주진 않는다. 일단 해오라는 식이다.
반전이 있을 수 있다. 운이 좋다면 포과장은 차사장이 될 수 있다. 크게 이루기 때문이다. 마부장은 상이사로 변질된다. 작게 이루기 때문이다.
卒/사원
어차피 한 칸 한 칸 움직이는 인생이다. 혼자 왕따당하면 잡힌다. 옆자리 동료와 붙어 있어야 한다. 졸사원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여성
王/부사장
한국의 1000대 기업 가운데 여성 CEO는 5퍼센트 남짓이다. 당신이 직장에서 여성 최고 경영자를 직접 상대할 일은 거의 없단 얘기다.
셰릴 샌드버그나 인드라 누이 같은 여성 CEO가 아직 한국엔 없다. 대신 한국 기업 안에서 여성 최고 경영자보다 더 무서운 게 수렴청정을 하는 오너가의 딸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회장이 아니라 부회장이거나 사장이 아니라 부사장급이다. 조직의 결제 라인 바깥에 비켜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왕부사장은 대부분의 기업 정보를 자신과 인연이 닿은 비선 라인을 통해 듣는다. 왕부사장 때문에 기업 안엔 공식 라인과 비선 라인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사실상 비선 라인이 더 실세인 경우가 많다. 벼락출세를 하고 싶다면 이 라인에 끼어들어야 한다.
보통 왕부사장은 회사 안에 직할 부대를 거느리고 있기 마련이다. 전략기획본부든 대외협력본부든 회사 내부의 별동대가 따로 있다. 이 부서에 들어가야 한다. 왕부사장은 직할 부대만큼은 애정을 갖고 챙기기 마련이다.
왕부사장의 눈에 들려면 일도 좋지만 취향이 맞아야 한다. 여성 보스와 소통하려면 정치나 경제나 전략 같은 거시적인 얘기보단 사생활 얘기로 코드를 맞추는 게 효과적이다. 육아나 그림이나 음악 같은 소재가 적합하다. 왕부사장은 당신이 자신과 사적인 관계를 맺어야 자기 사람이라고 인식한다. 왕부사장 마음에 들려면 사생활을 팔아라.
士/이사
사이사는 유리 천장에 부딪힌 상태다. 혼자 힘으로 유리 천장을 깨기란 쉽지 않다. 운신의 폭이 좁단 뜻이다. 사이사한테도 비선 라인이 있다. 여성적인 사적 관계로 남성적인 공적 관계를 견제해왔다. 업무 능력과 사적 네트워크와 여성적 매력이 사이사의 강점이다.
지금 사이사한테 필요한 건 한 방이다. 모든 남성 경쟁자들을 한 방에 제압하고 더 이상 태클을 걸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실적이 있어야 유리 천장을 깰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이사의 눈에 띄려면 이런 기획을 제시해야 한다. 사이사는 왕과 친밀한 관계다. 왕과도 사적인 신뢰를 쌓아왔기 때문에 여느 남성 이사들보다도 더 입김에 세다. 그게 사이사의 적들이 사이사를 미워하는 이유다.
車/본부장
차본부장은 야심만만한 여자다.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본부장까지 올랐다. 그만큼 주변엔 시기하는 남자들이 많다. 차본부장 본인도 몹시 호전적이다. 적을 만드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차본부장의 전술은 언제나 선제공격이다. 먼저 나서고 먼저 제압한다. 무엇보다 남자 동기들끼리 결탁해서 자신을 포위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러자면 실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도 안다.
차본부장 역시 사적 관계를 몹시 중요하게 여긴다. 남자 후배가 자신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걸 좋아한다. 누나와 동생 같은 관계를 맺어놓으면 곧 자기 팀으로 당신을 데려가게 된다.
차본부장은 남자를 다루는 법을 안다. 남자들의 습성과 남자들이 언제 싸우고 언제 싸움에서 물러나는지도 안다. 독일 아마존 베스트셀러가 된 <오만하게 제압하라>에서 경영 컨설턴트인 저자 페터 모들러는 “적절하게 오만하게 굴어야 남자들의 콧대를 꺾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차본부장은 남성 동료를 연구한다. 남성은 여성 동료를 연구하지 않는다. 승패는 뻔하다.
象/팀장
여성 팀장과 함께 일하려면 무조건 결과부터 보여줘야 한다. 차본부장과 달리 상팀장은 아직 자리가 불안하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성과를 내면 인정을 받지만 그렇지 못하면 밀려날 수 있다.
무엇보다 남성 부하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 상팀장이 느끼는 불안감을 불식시켜주지 못하고 성과도 내지 못하면 미움받기 십상이다.
상팀장의 미움은 남성 상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해진다. 당신과 신경전을 벌일 공산이 크다. 사소한 일들로 꼬투리를 잡고 면박을 준다. 정작 당신이 그런 미묘한 불편함을 못 견디고 면담을 신청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딱 잡아뗀다. 상팀장 눈 밖에 나면 회사 생활이 고달파진다.
馬/대리
마대리의 관심사는 회사가 아니다. 시댁이거나 육아다. 회사 안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어린이집이나 조선족 아줌마와 통화를 한다.
동시에 마대리는 회사에서 밀려날까 봐 걱정이다. 집에 들어앉은 친구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상사한텐 머리를 조아린다.
대신 동료나 후배한테 일을 떠넘기기 일쑤다. 좋게 말해서 일과 생활의 균형이지만 현실에선 주변 동료나 후배한테 짐이 된다.
包/과장
드물지만 여성 중에서도 포과장이 있다. 저돌적이고 진취적이다. 야심만만해서 동료들보다 먼저 대리 달고 과장 달았다. 선배들과의 관계도 좋다.
한국 기업에서도 점점 포과장 같은 여성 인력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기 일에 열심이고 리더십까지 갖춘 경우다. 남성 포과장에 비해 여성 포과장이 더 경쟁력이 있다. 여성 포과장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경영학자들은 남녀 성별 비율이 균형을 맞춘 기업이 더 경쟁력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조직한테도 포과장이 필요하단 얘기다. 당신 주변의 포과장과는 적이 돼선 안 된다. 꼭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라. 크게 될 인물이다.
卒/사원
여성 졸사원은 그러지 말라고 해도 언제나 뭉쳐 다닌다. 여성 졸사원들과는 몰려다니지 마라. 위에선 우스운 놈으로 보이고 동료들한텐 졸로 보인다.
정작 여성 졸사원들 가운데 적잖은 비율이 조만간 회사를 떠난다. 장기판 위에서처럼 여성 졸사원 옆에 있으면 먼저 잡힌다. 그럴 시간에 남자 동료들과 시간을 더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