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는 왜 이렇게 늘어질까?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72분까지 늘어난 한국 드라마의 회당 방영시간이 60분으로 줄어들면 무엇이 달라질까? | 미디어,TV,드라마,방영 시간

몇 년 전 자료 조사를 위해 MBC (1991~1992 방영)를 다시 본 적이 있었다. 꼭 확인해야 할 몇 장면만 다시 보고 금방 원고에 매진하겠다던 생각은 세기의 걸작 앞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입맞춤하는 여옥(채시라)과 대치(최재성)의 몸부림은 어쩜 지금도 그렇게 절절하고 애틋하던지. 이런 작품을 몇 장면만 잘라서 보고 넘기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내적 비명이 태업의 훌륭한 변명이었다.그렇게 앉은자리에서 홀린 듯 몇 회를 본 다음 시계를 보고 잠시 기분이 얼떨떨해졌다. 생각보다 시간이 그리 많이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한 회 분량이 기껏해야 45분, 앞에 붙은 광고를 감안해도 50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한 회 70분을 육박하는 리듬의 드라마에 익숙해져 있다가, 45분 안에 할 이야기 다 하고 정서적인 포만감까지 고봉으로 눌러 담아 방영하던 시절의 마법에 할 말을 잃었다.그런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어지간한 드라마는 45분 안팎에 끝나곤 했다. 의 송지나·김종학 콤비가 SBS로 옮겨가 만든 (1995)도 광고 포함 50분 안쪽이었다.KBS (1996)나 MBC (1998), SBS (1998) 같은 명작은 60분 언저리를 넘는 일이 없었다. 작품의 호흡이 간결했고, 사람들은 10시에 시작해 11시에 끝난다는 심플한 방영 시간표만 기억하면 그만이었다.달동네 뒷골목에서 쓰러져가는 진구(손창민)를 붙잡고 오열하던 MBC (1997) 속 애숙(이영애)의 신산한 삶도, SBS (1998) 속 라라패션의 루저들이 개발과로 좌천되어 키우던 재기의 꿈도, 죄다 수다스러울 것도 부산스러울 것도 없이 회당 60분 안쪽으로 할 말을 마쳤다.시계를 조금 돌려 2009년으로 가보자. 그해 1월 9일 지상파 3사의 제작본부장과 드라마국장 6명이 모인 자리에서 지상파 3사는 과도한 경쟁을 지양하고 제작비 상승을 제어하자는 의미에서 드라마 방영 시간을 합의했다.이때 합의한 방영 시간은 72분이었다. 이런 규제가 없던 시절엔 슬금슬금 방영 시간을 늘려 드라마 한 편이 80분까지 늘어났다.'우리가 옆 방송사보다 5분 먼저 방영하면 사람들이 우리 드라마를 더 많이 보겠지’ 하는 단순한 편성 전략에서 시작한 싸움이었다. 곧 ‘우리가 옆 방송사보다 5분 늦게 끝내면 11시 심야 예능도 우리 프로그램을 더 많이 보겠지’로 이어졌다.'우리 드라마가 방영 시간이 더 기니까 광고를 그만큼 더 많이 수주할 수 있겠지’라는 경쟁도 방영 시간을 야금야금 늘려갔다. 급기야 9시 55분에 방영을 시작해 11시 15분까지 드라마를 이어가고 11시대 예능을 11시 25분에 방영하는 기괴한 방영 시간표가 구성되기에 이르렀다.다들 중간 광고를 포함해도 1시간 내외로 떨어지던 미드의 빠른 호흡에 열광할 때, 한국 드라마는 반대로 갔다. 하염없이 늘어졌다.결과는 초라했다. 드라마 중간에 OST를 깔며 상념에 젖은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의미 없는 장면이 늘어났고, 한 회 걸러 한 차례씩 플래시백이 등장해 앞에 몇 화 정도 빼먹고 못 본 시청자들도 대강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지경이 됐다. 서사 전개에 별반 도움이 안 되는 샤워 신이나 드라이브 신은 한국 드라마의 트레이드마크처럼 굳어졌다.이런 의미 없는 장면을 끼워 넣어 방영 시간을 늘리느라 방송사들은 천문학적 제작비를 지출해야 했다. 방송사들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때마다 자랑하며 즐거워했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알 수 있었다.1990년대에 비해 작품성은 저하되고 지출은 늘어난 속 빈 강정이었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결국 2009년에 72분 룰을, 2013년에는 다시 5분을 줄여 67분 룰을 합의했다.2017년 초 지상파 3사가 다시 7분을 줄인 60분 룰을 합의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넷플릭스 가 50분 안팎, 한국에서도 리메이크했던 CBS 역시 45분 안팎이었다. 무의미한 제작비 상승을 억제하고 완성도로 승부하자는 방송 3사의 절박함이 당연한 결과로 이어진 셈이다. 아낀 제작비만큼 탄탄한 서사를 보여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