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도 정치가 되나요?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패션이 정치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2017년식 대답.

패션의 정치학 - 에스콰이어

패션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현실과 맞닿은 분야일지 모른다. 철없는 이상론자들, 세상 물정 모르는 속물 집단으로 속단하기엔 입장이 분명하고 때론 격동적인 곳이니까.

어쨌든 고고하고 아름다운 패션의 기질도 결점 없는 유토피아적 세계관에서 비롯한 건 아니다. 더군다나 인류 역사상 위태로운 순간마다 패션은 늘 시대정신보다 선도적이었다.

프랑스 남성 귀족의 상징인 퀼로트를 거부하고 헐렁한 바지와 짧은 소매의 상의를 입은 비브루주아 계층이 없었다면? 현대의 기성복도 없었다. 패션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 운동가가 되었다. 그리고 상기된 태도로 변혁을 주창했다.

운동의 선두에 있는 건 늘 디자이너였다. 그들은 옷과 런웨이를 도구로 종종 정치적, 사회적 사안에 대한 개인적 입장을 드러냈다. 옷이 그들의 구호라면 런웨이는 궐기 대회쯤 될까.

지난 1년간 런웨이는 무척 정치적이었다. 영국의 브렉시트를 시작으로 미국 대선, 트럼프 당선으로 이어진 이 시기에 디자이너들은 저항적인 운동가였다. 분노의 표현으로 끝나지 않았다. 시대적 기준에 맞는 의식을 촉구했다.

20세기 남자들이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퀼로트를 버렸지만 현재는 옷의 양식을 건드리는 게 아니다. 요즘 디자이너들은 슬로건, 쇼적 장치로 저항한다. 인스타그램에 입장을 써 올리기도 한다.

1년 전, 영국패션협회에 속한 디자이너와 브랜드 대부분은 브렉시트를 반대했다. 90퍼센트였다. 알렉산더 맥퀸, 비비안 웨스트우드, 캐서린 햄넷의 후예들답게 거의 모든 영국 디자이너가 정치적이었다. 슬로건은 과격했고 쇼장의 공기는 서늘했다. 인스타그램에서 입을 다문 디자이너는 마치 브렉시트를 찬성하는 것처럼 보였을 정도니까.

미국 대선 직전에는 반트럼프 성향의 쇼가 패션계의 입장을 대변했다. 트럼프 당선 이후엔 저항성이 어떤 수치를 넘었다. 슬로건은 더욱 격정적이고, 구체적으로 절실했다. 패션계는 이민자와 성 소수자, 여성이 과반수를 넘는다. 그들이 이민자 문제와 인종차별, 성 소수자 차별, 여성 혐오를 가만 보고 있을 수 있을까?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발렌시아가의 남성 컬렉션은 시대적 요구에 걸맞은 세련된 방식 같았다. 러시아 근방 조지아 이민자 출신의 뎀나 바잘리아는 민주당 경선에서 패배한 버니 샌더스에 대한 헌정을 보였다. 버니 샌더스의 물결 모양 캠페인 로고를 발렌시아가 로고로 바꾼 것이다.

물결 위엔 ‘버니 샌더스’ 대신 ‘발렌시아가’가 써 있다. 옷은 그 어떤 파란색도 아닌 민주당 파란색이다. 다양성을 가진 ‘버니 샌더스들’이 런웨이를 걸어 나오던 사진은 순식간에 인스타그램을 통해 번식했다. 아마 파리 컬렉션 기간 중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기록되지 않았을까?

뎀나 바잘리아는 DHL이나 발렌시아가의 모기업인 케링 등 기업 로고를 옷에 차용한다. 그러나 이번 로고는 다른 기질의 것이었다. 웃고 넘기기 어려운 농담 같은.

CNN의 앵커 제이크 태퍼는 단숨에 패션 아이콘이 되어버린 버니 샌더스를 인터뷰했다. 런웨이 사진을 본 그가 파안대소하며 본인은 이른바 패션 피플은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패션계는 동의하지 않는다. 곧 버니 샌더스의 캠페인 패러디 로고가 쓰인 옷을 입은 패션 피플들이 거리를 장악할 것이니까.

그리고 그 옷을 입는 건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일이 될 것이다. 버니 샌더슨의 입장에도 잠정적 동의를 말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발렌시아가의 고객, 트럼프와 공화당 지지자의 교집합은 어떤 입장을 가질까? 발렌시아가를 비롯한 케링 그룹이 정치를 이용했을 가능성은 없을까?

답이 어떻든, 이제 브랜드를 고르는 기준에 정치적 입장이 자연스럽게 포함될지도 모른다. 윤리적이고 친환경적인 브랜드를 고르는 행동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처럼.

패션이 강력한 사회적 욕구의 분출구였던 시기가 있었다면, 지금은 한 단계 올라섰다. 세련된 설득력을 가지고 일상에 스며든다. 이건 역사적인 일이기도 하다.

‘패션이 정치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2017년식 대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