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별 짓기와 쇼핑의 경영학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백화점같이 나열하는 게 아니었다. 정체성에 정체성을 더해 구별하고 버림으로써 강화하는 식이었다. 다 알지만 어려워서 못 하는 일이었다. 미스터포터가 눈부시게 해내고 있다. | 브랜드,런던,웨스트필드,쇼핑몰,미스터포터

런던 시내에서 서쪽으로 조금 벗어난 셰퍼드 부시에 유럽 최대 규모로 손꼽히는 쇼핑몰 웨스트필드가 있다. 스타필드 하남의 벤치마킹 대상으로도 유명한 이곳은 넓은 부지를 기반으로 하이엔드 패션 부티크부터 스파 브랜드, 자동차와 전자 제품 브랜드의 체험형 매장, 각종 카페와 레스토랑 등이 하나의 군집을 이룬다. 높은 층고와 매장 사이사이의 널찍한 휴식 공간, 천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자연광까지. 규모만 놓고 보면 런던의 유명 쇼핑 거리 옥스퍼드 스트리트를 옮겨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럭셔리 이커머스의 선두 주자인 네타포르테 그룹(2015년 이탈리아 기반의 이커머스 육스와 합병해 육스 네타포르테 그룹이 되었다) 본사는 쇼핑몰 바로 위층에 자리한다. 이곳에선 1000여 명에 달하는 직원들이 전 세계에서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주문과 쇼핑 패턴을 파악하고, 새롭게 입고할 상품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온라인 쇼핑을 돕는 콘텐츠를 제작한다. 다국적 관광객을 필두로 10대 청소년, 가족 단위 고객이 점령하며 고적지처럼 변해버린 쇼핑몰 꼭대기에 이커머스 본사가 자리한 것을 패션의 권력 이양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풍경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몇 년 사이 쇼핑의 위상과 문법은 꽤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중 두드러지는 변화는 쇼핑이 여가의 일부로 여겨지던 시절이 지나고 있다는 것이다.지금은 바야흐로 ‘라이프스타일 시대’다. 소유로 대변되는 호황의 꼭짓점을 지나 장기 불황을 겪으며 사람들은 무엇을 구매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어느 글로벌 패션 전문가는 “식문화가 패션처럼 소비되고, 피트니스가 기존의 식문화를 대체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는 동안 쇼핑은 기술의 영역으로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진화를 이루어왔다. 특히 극진한 서비스와 호화로운 물성으로 대변되는 럭셔리 영역의 쇼핑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옮겨 왔다는 것은 꽤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제품을 취급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장담하던 고가 패션 브랜드들도 자세를 낮추고 이커머스 브랜드들과 앞장서 협업하고 있다. 전통적 유통업체인 백화점과 편집매장도 자체 이커머스 시스템을 구축해 고객 이탈을 막고 있으며, 유수 패션지를 발행하는 거대 미디어 기업 중 하나는 종이 잡지의 보조 역할을 하던 온라인 사이트를 쇼핑처로 탈바꿈시켰다. 럭셔리 이커머스의 바람은 이렇듯 거세다.네타포르테 그룹 산하의 미스터포터는 럭셔리 이커머스의 전쟁 속에서 단연 돋보인다. 네타포르테의 자매 사이트이자 남성 전문 이커머스로 2011년 2월 서비스를 시작해 지금까지 줄곧 새로운 쇼핑 경험을 제안하는 데 앞장서왔다. 이들이 업계의 선두 자리를 놓치지 않은 이유는 애초부터 남성의 쇼핑을 여성의 쇼핑과 완벽하게 분리시킨 전략에 있다. 최근 패션의 흐름은 젠더리스의 끝에 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별뿐 아니다. 연령과 계절, TPO 등 모든 경계의 벽을 허물며 소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고 있다.이러한 전방위적 움직임에도 미스터포터는 오직 남성만을 위한 쇼핑 영역을 견고히 다져왔다. 여성 전문 이커머스이자 브랜드의 모태인 네타포르테로부터 철저히 독립적인 브랜드를 구축함은 물론 ‘여성의 남자 친구’라는 시선으로 남성을 재단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철저히 ‘남성에게 쇼핑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에 충실한 태도를 보인다. 미스터포터가 지칭하는 남성은 여성 못지않게 쇼핑을 즐기는 이들뿐 아니라 패션계의 경박함에 조소를 보내며 쇼핑을 그저 해치워야 할 숙제로 여기는 이들까지 포함한다. 이는 결국 미스터포터의 주 고객층이 누구인가와 맞닿아 있는 문제다.미스터포터의 연간 리포트에 정리된 핵심 고객의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 평균 나이 35세, 금융권 혹은 디자인·광고·마케팅계 종사, 연평균 소득 2억6000만원. 30~40대의 전문직 종사자인 이들은 치열한 근무 후 찾아온 휴일에 발품을 팔며 이리저리 쇼핑을 다니고 싶지 않은 것은 물론 여자 친구나 아내와 쇼핑에 관해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도 않다. 미스터포터는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미스터포터가 제시하는 남성만의 세계는 지금 런던에서 가장 화려하거나 힙한 쇼핑 거리보다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에 세련된 태도를 겸비한 남성 전용 클럽하우스를 닮아 있다. 미스터포터의 매니징 디렉터 토비 베이트먼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온라인의 쇼핑 여정은 오프라인보다 훨씬 더 위태롭고 불안정합니다. 원하는 제품에 다다르고 그것을 구매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클릭 수만 봐도 알 수 있죠. 사람들은 온라인상에서 잠시라도 지루하거나 불쾌해지면 곧바로 나가버립니다. 네타포르테에 접속해 여성 패션 상품에 노출된 상태로 남성 패션 카테고리를 찾아 헤매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백화점에서 블루 셔츠 하나를 사기 위해 온갖 여성 코너를 뚫고 가야 하는 것과 다를 게 뭐겠어요?”미스터포터가 고객에게 판매할 제품을 선별하는 방식은 꽤 보수적이다. 선별 방식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쇼핑의 실패 확률을 줄이는 것, 두 번째는 선별한 후 또 선별하는 것이다. 실패 확률을 줄인다는 것은 성공 확률을 높인다는 태도와 전혀 다른 얘기다. 여기서 그들의 핵심 바잉 전략인 ‘모든 컬렉션의 편집된 시각’이 엄격하게 적용된다. 미스터포터의 편집된 시각이란 최신 트렌드를 입맛에 맞게 나열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구찌나 생 로랑이 선보인 공작새 같은 쇼피스나 트렌드세터들 사이에서 막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신진 디자이너를 발 빠르게 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는 일부일 뿐이다. 그들은 미스터포터라는 이미지를 거름막 삼아 모든 브랜드와 디자이너의 아이템을 ‘미스터포터화’시킨다. 예를 들면 열 가지 컬러로 구성된 존 스메들리의 메리노 울 스웨터 컬렉션에서 미스터포터다운 컬러 단 두 가지만을 고르고 나머지 여덟은 버리는 것이다.이러한 선별은 트렌드의 포화를 피해 미스터포터를 찾은 고객에게 ‘이곳에서라면 내가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겠어’라는 안정감을 전달한다. 쇼핑에 대한 확신을 깃들게 하는 것은 미스터포터의 바잉팀에게 매우 중요한 임무다. 질 좋은 코튼 티셔츠나 양말 등 오랜 시간 한 분야에 특화한 제조업체를 찾아내 제품군의 일정 비율을 유지토록 하는 것 역시 그 일환이다. 제품군의 종적 방향에서 다소 통제적 면모를 보이는 미스터포터는 카테고리의 확장, 즉 횡적인 방향성에서만큼은 개방적이다. 1만 파운드(약 1430만원)를 호가하는 파인 워치와 BMW i3를 누구보다 먼저 쇼핑 품목에 올리는가 하면, 송로버섯 셰이버나 회양목으로 만든 체스보드처럼 취향의 궁극에 닿아 있는 물건들까지 아우른다. 미스터포터가 정의하는 남성의 쇼핑이란 ‘자신의 삶을 위해 투자할 만한 것’이라는 관점 아래 꿰어지기 때문이다.여기서 쇼핑에 대한 관점을 전달하는 일은 미스터포터가 자체 제작하는 콘텐츠를 통해 이루어진다. 콘텐츠 전반을 디렉팅하는 제러미 랭미드는 이에 대해 “남성의 경우 특정한 맥락이 있어야 쇼핑의 필요성을 느낀다”며 “남자에게 다짜고짜 새로 출시한 디올 가방 얘기를 하면 제정신이냐고 되물을 것”이라고 설명한다.뉴욕 지사까지 합쳐 50여 명의 직원으로 구성된 인하우스 에디토리얼팀은 사이트와 SNS 채널은 물론이고 이라 불리는 타블로이드 형태의 간행물까지 정기적으로 발행해 플랫폼에 맞게 콘텐츠를 재생산한다. 네타포르테 그룹의 창립자 나탈리 매스넷이 정립한 ‘쇼핑이 가능한 온라인 매거진’이라는 비즈니스 콘셉트가 미스터포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셈이다.하지만 미스터포터의 콘텐츠가 네타포르테와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은 미스터포터가 제작하는 콘텐츠가 판매 제품이나 브랜드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브랜드가 제공하는 보도 자료를 재가공하기보다는 남성들이 즐기고 배우고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경험의 다양성 측면에서 접근한다. ‘어떻게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처럼 우아하게 생굴을 먹을 것인가’라는 기사 아래에 커프 링크스 아이템을, 역사적인 산악인과의 인터뷰 하단에 등산과 연계한 패션 스타일을 소개하는 식이다. 쇼핑 품목과 전혀 관계없는 교양, 정보성 기사의 비중도 꽤 높은 편이지만 논쟁을 불러일으키거나 공격적 태도를 취하는 기사는 철저히 배제한다.미스터포터에서 생산하는 콘텐츠는 비단 에디토리얼팀만의 영역에서 그치지 않는다. 바잉팀과 스타일팀은 물론 기술팀까지 함께 모여 콘텐츠와 제품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결과적으로는 어떤 콘텐츠가 특정 제품의 구매를 유도하는지에 대한 연관성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데까지 이른다. 리테일러와 미디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미스터포터의 행보에 이커머스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