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 몰래 짐을 버린 날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우리는 처음으로 각방을 썼다. | ESQUIRE,에스콰이어

결혼을 한다. 나와 P는 예단도 결혼식도 웨딩드레스도 없는 간단한 과정을 거쳐 8월에 부부가 된다. 우리는 2015년 3월에 처음 만났다. 친구, 친구의 대학 동기, 친구의 직장 동료가 모인 좀 이상한 자리에서 말은 안 하고 손수건으로 땀 닦다가 립밤 바르는 제일 이상한 남자가 P였다. P는 박력이 넘쳤다가 이내 수줍고, 관대하지만 이따금 옹졸하고, 헐렁거리는 듯 늘 세심하다. 나는 못 보는 것이 그는 늘 보인다. 그는 마음속에 큰 사랑과 더 큰 관용을 담고 사는 남자다. 우리가 건강한 연애를 이어갈 수 있는 이유다. 연애한 지 1년을 채우고부터는 같이 살았다. 함께 살기 위해 내가 준비한 건 나와 내 옷과 내 사랑뿐이었다. 나머지는 이케아가 적당히 해결해줬다. 엄마와 떨어져 살아본 적 없는 내겐 그 시간이 걱정 없는 스무 살의 신나는 자취 생활이었던 것 같다.함께 산 지 1년쯤 되었을 때, 한겨울의 길거리에서 P가 프러포즈를 했다. 결혼하기로 했다. 나는 웨딩드레스와 다이아몬드보다 좋은 가구와 멋진 공간이 중요하다. 그동안은 엄마 집이라는 핑계로 가구 취향을 정립하는 데 등돌려왔지만, 맙소사... 가구는 엄청나다. 쇼핑을 넘어선다. 공부하며 알아가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다. 의자 하나에 세계 지리, 세계 역사, 한 인물의 흥망성쇠, 사랑과 야망이 다 있다. 내겐 그 모든 과정이 ‘이터널 뷰티’를 소유할 수 있는 벅찬 감동이었다. 이사 날 빈집에 가구가 들어오는 걸 보자 이사의 피로도 다 잊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우리의 대격돌이 시작됐다.P는 섬세하다. 정확하다. 강박적이다. 그래서 물건이 필요하다. 우리 집에는 수지침, 신발 건조기, 종류별 아령, 두께별 요가 매트, 30cm 아이폰 충전선, 1m 아이폰 충전선, 3m 아이폰 충전선, 두 아이폰을 동시에 충전할 수 있는 멀티 잭, 성인용 오리발, 일회용 가글 팩 50개, 레이저 수평기, 달걀노른자 분리기, 개 발톱 모양 다듬어주는 기계, 스테인리스 빨대, 세라믹 칼, 달걀프라이 틀, 2m짜리 철봉, 길이별 점화 라이터, 요일이나 종류나 시간대별로 구분하는 약통, 입구 모양이 각기 다른 텀블러, 전선 정리 캡 30개가 있다.내 눈에는 잡동사니다. 그는 잡스러운 게 이렇게 많으면 그걸 정리한다고 온갖 정리함과 구획 칸을 또 산다. 그것도 잡동사니다. 정말 이 사람이 다이소에 그만 좀 갔으면 좋겠다. 이사하면서 이 모든 짐이 눈앞에 쏟아졌을 때 개미지옥에 빠진 기분이었다. 집에 오솔길이 생기다니. 내 이터널 뷰티와 개미지옥이라니! 짐을 좀 버렸으면 좋겠고, 그게 힘들면 정리를 잘해달라고 여섯 번쯤 이야기했지만 내 애인은 종종 게으르다. 그래서 어느 일요일 아침 P가 바이크 투어를 떠난 틈에 짐을 버렸다. 버려도 모를 것 같은 걸 골라서.P는 섬세하다. 정확하다. 강박적이다. 그에게 ‘버려도 모를 것 같은 것’은 없다. 투어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는 알아챘다. 분리수거장에 가봤지만 P보다 수거업체가 더 부지런했다. ‘너 정말 실망스럽다’는 말이 돌아왔다. 필요 없으니 사지 말라고 말했는데? 몇 번을 이야기해도 안 치운 게 누군데?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각방을 썼다.2년 동안 데이트할 때마다 나는 휴대폰과 지갑만 챙겼고 P는 가방에 이것저것 담았다. 내 택배보다 P의 것이 훨씬 많았다. 이미 알고 있던 일이 이제야 문제가 된 이유는, 이 집을 본격적인 내 공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결혼을 앞뒀고, 신혼집을 잘 가꾸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내게 그 전제는 짐이 없는 상태다. 각방을 쓴 다음 날 P가 말했다. “네가 비싼 가구 사는 거 마음에 안 들었지만 가만히 있었어. 그게 너니까. 안 치운 나도 잘못했지만 말 없이 버리는 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 앞으로는 버리고 싶으면 얘기해. 짐이 너무 많은 것 같긴 하니까 정리해서 버릴게.” 세상에. 우리 집에서 내 애인이 제일 아름답다.타인과 같이 산다는 건 조정과 이해의 과정이다. 동거인이 생기는 것, 결혼하는 것, 관계를 맺는 것은 모으고 비우는 나날들이다. 타협-결렬-합의-자기반성을 배우면서 단단하고 건강해진다. 이제 우리 집에는 수지침, 신발 건조기, 30cm 아이폰 충전선, 3m 아이폰 충전선, 두 아이폰을 동시에 충전할 수 있는 멀티 잭, 성인용 오리발, 레이저 수평기, 개 발톱 모양을 다듬어주는 기계, 달걀프라이 틀, 점화 라이터 한 개, 요일별로만 구분하는 약통, 입구 모양이 각기 다른 텀블러, 전선 정리 캡 15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