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방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아이유, 수지, 설리는 사방이 유리인 방에서 몇 년이나 살아온 것같았다. 유리 방 밖에 있는 사람들이 원하고 환호하는 대로 입고 말하는 일이야말로 그 세계의 법칙 같았지만, 지금은 다 달라졌다. | 아이유,수지,설리,여자 연예인

촬영 날 아침이었다. 아이유 측에서 인터뷰를 하루 미룰 수 있겠느냐고 양해를 구해왔다. 2015년 겨울, 미니 앨범 를 발매한 지 한 달 남짓 된 시점이었다. 아이유가 제작 전면에 나선 앨범이었고, 과연 매혹적인 출사표였다. 그때 아이유는 스물세 살이었다. 타이틀곡도 ‘스물셋’이었다. 가사는 이랬다. “어느 쪽이게? 얼굴만 보면 몰라/ 속마음과 다른 표정을 짓는 일 아주 간단하거든/ 어느 쪽이게? 사실은 나도 몰라/ 애초에 나는 단 한 줄의 거짓말도 쓴 적이 없거든.” 거의 모든 곡의 가사는 아이유가 쓴 것이었다. 가수로서, 스물셋으로서, 아이유로서의 정체성이 그대로 앨범에 있었다.사건은 촬영 전날 엉뚱한 데서 터졌다. 수록곡 ‘제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이었다. 논란의 왈가왈부를 떠나 소재 자체의 파괴력이 강력했다. 정작 선정적이었던 건 노래가 아니라 논란이었다. 그걸 다 복기할 필요는 없겠으나, 다만 그해 말에 열린 아이유의 콘서트를 다시 주목할 필요는 있다. 논란이 채 식지 않은 시점, 아이유는 무대 위에서 말했다. “제가 변함없이 사랑하는 곡을 들려드리겠다.” 그러곤 ‘제제’를 불렀다. 그런 논란, 저런 오해 다 알지만 이 노래는 그저 이런 거라는 웅변이었다. 아이유가 콘서트에서 ‘제제’를 불렀다고 YTN이 보도할 정도였다. 아이유가 오해를 돌파하는 방법이었다. 하루 미뤘던 촬영과 인터뷰도 예정대로 진행됐다. 아무렇지도 않았다.약 1년 반 만의 정규 4집은 차분한 선언 같았다. 는 지난 4월 21일 발매됐다. 프로듀서는 아이유, 한 곡을 제외한 모든 곡의 작사도 아이유가 했다. 타이틀곡 ‘팔레트’에서는 이렇게 노래한다. “이상하게도 요즘엔 그냥 쉬운 게 좋아/ 하긴 그래도 여전히 코린 음악은 좋더라.” 혹은 이렇게 썼다. “긴 머리보다 반듯이 자른 단발이 좋아/ 하긴 그래도 좋은 날 부를 땐 참 예뻤더라.” 아이유의 과거와 지금이 다 들어 있는 가사다. 아이유가 코린 베일리 래 콘서트의 스페셜 게스트였던 건 2011년이었다. 그때 아이유는 열여덟 살이었다. ‘좋은 날’은 2010년 12월에 발매한 미니 앨범 에 수록된 곡이었다. “나는요, 오빠가 좋은걸 어떡해, 아이쿠” 노래하던 열일곱 살이었다.지금은 다르다. 이제 아이유는 빨간 미니 원피스 대신 청바지에 흰 티셔츠, 체크무늬 재킷을 입는다. 흰색 티셔츠에는 25라고 쓰여 있다. 보는 사람도, 입은 사람도 편한 차림으로 ‘이름에게’ 같은 노래로 그 깊은 슬픔을 위로하기까지 한다. ‘이름에게’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끝없이 길었던 짙고 어두운 밤 사이로/ 조용히 사라진 네 소원을 알아/ 오래 기다릴게 반드시 너를 찾을게/ 보이지 않도록 멀어도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세월호가 완전히 뭍으로 올라온 건 4월 9일이었다. 5월 16일에는 온전한 사람 형태의 유골이 수습됐다는 보도가 나왔다.일 년에 두 번 발행하는 잡지 35호 표지는 수지였다. 의 문구 특집호였고, 수지는 귀에 팔로미노 연필을 꽂고 있었다. 패션 잡지도 아닌데 수지가 표지로 나섰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였다. 업계에선 “수지가 화보 촬영을 하고 싶다고 직접 의사를 전해왔대요” 같은 말이 풍문으로 돌았다. 화보를 기획하고 진행한 패션 에디터 장용헌은 이렇게 말했다. “직접 의사를 전해왔다는 건 좀 와전된 것 같아요. 다만 JYP 관계자분께서 수지 씨가 저희랑 한번 촬영하고 싶어 한다는 말은 몇 번 하신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번에 시기가 잘 맞은 거죠.” 와의 인터뷰에서 수지는 이렇게 말했다. “10대의 저는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뭐든지 잘해야 된다는 강박과 사람들의 만족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욕구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한결 마음의 여유가 생겼어요. 사람들의 시선과 강박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어요. 마음에 찾아오는 평온, 그것이 제가 제일 행복한 순간이에요.”화보에선 세상 모든 대상화를 부드럽게 외면하고자 하는 의지가 보였다. 뭘 더함으로써 성취하려는 자유가 아니라, 되도록 비움으로써 보여주려는 식이었다. 혼자 방에 있는 것 같은 머리, 화보에서 허용할 수 있는 한 거의 민낯에 가까운 얼굴, 풍덩한 옷도 마냥 편해 보였다. 올해 초 딩고 뮤직이 제작한 리얼리티 프로그램 에선 한없이 사생활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선 이렇게 말했다. “예능도 많이 해보고 방송도 많이 해봤는데 제가 막 신경 쓰지 않고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하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 해보고 싶었어요. 이런 거.” 장용헌 에디터는 이렇게 말했다. “촬영 현장에 올 때부터 비슷한 모습이었어요. 꾸미고 그런 거 전혀 없었어요. 수수하고, 운동화 신고, 화장기 없고, 본인 노래 들으면서 따라 부르고.”어쩌면 시작은 올해 초였다. 첫 번째 솔로 미니 앨범을 출시하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선 가능한 한 감추지 않고, 스스로 얼굴이 되고 싶은 매체의 표지 모델이 되었다.한국에서 성공한 여자 아이돌로 정점에 섰던 수지가 스물네 살이 되자마자 보인 행보였다. 스스로 자유로워지고 싶고, 그 모습으로 대중을 대하고 싶은 사람의 용기였다.설리는 존재 자체가 배신인 채, 가장 첨예한 행보를 이어가는 중이다. 인스타그램은 설리와 지구를 향해 열려 있다. 댓글 창엔 한국어와 영어, 일본어와 중국어로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려 있다. 찬사도 있고 욕도 있다. 시대가 만든 시스템 위에 설리도 있다. 사실상 가관인 건 미디어다. 뭐하는 매체인지도 모르겠는 매체들까지 설리의 업데이트를 십분 활용한다. 생중계하면서 제목을 붙인다. “‘리얼’ 설리, 이번엔 짧은 원피스 입고 위험한 포즈... 왜 이러나?” 이런 식이다. 한국 미디어의 성별과 연령과 후진성이 거기서 다 드러난다. 설리를 엿보는 남자, 훈계하고 싶은 꼰대이면서, 그걸 장사에 이용하기까지 하는 식이다. 그러곤 ‘에 흠’ 헛기침하고 모르는 척한다. 그 질문은 미디어의 것이 아니다. 정작 질문해야 하는 곳에선 침묵하면서 애꿎은 데서 청초, 청순, 섹시, 육감, 여신 같은 단어만 조물거린다. 거기서 설리는 타의에 의해 공공재가 된다. 그들이 원하는 숫자의 일부가 된다.여기서부터 설리의 통쾌한 배신이 시작된다. 설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브래지어를 입었든 벗었든, 누구랑 헤어지든 만나든, ‘속옷 좀 입어주세요’ 어쩌고 하는 댓글이 어디 실리든 말든 설리는 그 안에서 ‘헤헷’ 웃는다. ‘노브라’ 같은 시쳇말이 피드를 가득 채운 다음 날도 설리는 어제처럼 한껏 웃으면서 가뿐하게 입고 쿠바 어딘가에 있다. 그러다 갑자기 계정을 없애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사진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그게 설리의 선택이다. 설리를 향한 불특정 다수의 불특정한 바람을 한꺼번에 배신하는 선택이기도 하다. 설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니까, 들을 필요도 없으니까, 거기서 지구 최고로 예쁘니까.배우 엠마 왓슨은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선택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른 여성을 때리는 스틱이 아니다. 자유, 해방, 평등에 관한 것이다.” 설리는 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그때가 가장 예쁜 것 같아요.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찍고 싶은 사진을 찍을 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걸 꼭 해야 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럴 때 가장 행복하고 그런 자신이 예뻐 보여요.” 이런 말은 또 어떤가? “어릴 때부터 일을 했고, 자아를 찾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뭔가를 자세히 배우고 알고 생각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어린아이의 정신 상태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고 생각해요. 늦은 만큼 그런 것들을 좀 더 디테일하게 배운 것 같아요. 저 자신을 찾으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어요.”모든 건 설리가, 오직 설리를 위해 한 선택이다. 설리가 예쁜 건 그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다 아주 가끔 그녀를 둘러싼 말이 왈가왈부의 단계를 넘어 혐오로 흐를 때의 마음은 어떤 걸까? 조지 오웰의 그 유명한 소설 에서 그 답을 찾는 건 좀 이상한 일일까? 에는 빅 브라더만 있었던 게 아니다. 이런 문장도 있었다. “그는 이제야 ‘왜’ 그녀를 그토록 증오하는지 좀 더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그녀를 증오하는 것은 그녀가 젊고 아름다운 데다 섹스에 무관심하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동침하고 싶지만 절대로 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양팔로 안아달라는 듯 매혹적이고 나긋나긋한 허리에 순결의 상징인 역겨운 진홍색 띠가 감겨 있기 때문이었다.” 증오나 혐오는 좌절의 증거다. 설리는 무례한 댓글에만 맞서고 있는 게 아니다. 온갖 형태의 여혐과 증오에 ‘헤헷’ 하고 강력하게 웃으면서 무해하게 맞서는 중이다. 5월 17일은 강남역 살인 사건이 벌어진 지 딱 1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한국에서 여자 연예인으로 사는 일은 종종 가혹하다. 살아남는 일은 대개 냉혹하다. 살아남아서 기꺼이 솔직해지는 일, 심지어 자아를 찾으려는 시도는 정말이지 귀하다. 굳이 찾지 않아도 그럭저럭 예쁜 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유, 수지, 설리는 그럭저럭 살아가는 길을 각각의 방식으로 거부하고 있다. 혼자일 순 있으나 ‘자기만의 방’일 수는 없는 채 기획의 일부였다가, 스스로 그 시대를 벗어나고자 한다.아이유의 에 수록된 곡 ‘Black Out’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Hey Ms. 델러웨이. I love your party/ 이리 와서 나의 키스를 받아줘.” ‘Ms. 델러웨이’는 버지니아 울프가 쓴 의 주인공과 같은 이름이다. 파티를 장식할 꽃을 사려고 런던 거리를 배회하다 방으로 돌아와 바느질을 하면서 비로소 평화를 얻는 여자였다. 겉으로는 여유롭고 풍요로워 보이는 여자였다. 하지만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갈구하는 여자였다. 아이유는 원작의 제목 ‘Mrs’에서 ‘r’을 뺐다. ‘Mrs. 델러웨이’를 ‘Ms. 델러웨이’라고 씀으로써, 파티를 여는 여자의 혼인 여부를 알 수 없도록 했다. 여자한테 결혼 여부는 호칭에서부터 드러내야 할 만큼 중요한 게 아니니까. 아이유는 그걸 다 알면서 살짝, 가사에 쓰곤 이렇게 노래했다. “사랑이 많은 건 전혀 나쁜 게 아니래요.”사랑이 많은 것도, 솔직해지고 싶은 것도, 감추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무슨 옷을 입고 어느 나라에서 뭘 하면서 웃든 그 역시 무해하다. 좌절과 증오를 혼동하는 건 그녀들 탓이 아니다. 유리 방엔 금이 간 지 오래인데 유리 방 밖만 19세기라서다. 그러니 좀 진부하더라도 “여성이 글을 쓰려면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그 유명한 말을 다시 한번 인용해보면 어떨까? 시간은 흘렀지만 시대는 변하지 않았고 아이유, 수지, 설리는 기꺼이 선택했으니까. 꼿꼿이 살아남아, 그녀들만의 방을 보란 듯이 찾으려는 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