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신입사원> 출연 당시 영상을 봤어요. MBC가 아직 괜찮았을 때였고, 아나운서 공채를 방송으로 진행하는 패기도 있던 때였죠. 가끔 보세요?
컴퓨터에 저장해놓고 늘 봐요. 제가 한동안 일이 안 풀려서 찡찡대던 때가 있었어요. 그때 제 얘기를 다 들어주던 친구 하나가 “야, 너 이때 생각해봐” 그러면서 편집본을 보내줬거든요. 뒤통수가 뜨끈했어요. 그때부터 뭔가 해이해지고 나태해진다 싶을 때 그 영상을 한 번씩 봐요. 그때, 밝게 웃으면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할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죠. 네, 제가 열심히 해야죠. 잘해야 되는데. 하하.
가장 최근은 대선 특집 방송이었어요. 듣기에, 거기서 마이크를 잡았던 다른 모든 분보다 송민교 아나운서의 진행이 편했어요. 그래서 ‘아, 저게 송민교의 힘이구나’ 생각했어요. 차분해서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을 수는 있지만 듣기에는 제일 좋죠. 그런 한편, 같이 일하는 동료로부터 훔치고 싶은 재능도 있지 않나요?
젊음!
지금도 젊잖아요?
손(석희) 사장님이나 어르신들이 보시기엔 아직 핏덩이죠. 하지만 저는 스물다섯쯤 되면 제가 원하는 걸 다 이뤄냈을 줄 알았어요. 원하는 방송사에 들어가서 하고 싶은 프로그램과 해야 되는 프로그램 두세 개 정도를 무리 없이 잘 소화해내고, 꿈꾸던 차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굉장히 돌고 돌고 돌아 수많은 낙방과 눈물을 거쳤거든요. 그래서 기회를 비교적 일찍 잡은 나머지 세 친구가 부러운 거죠. 그렇다고 제 20대가 쓸모없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아나운서가 되기 전에도 이미 훈련된 방송인이었잖아요. 방송 사이사이에 입사 시험을 치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 일을 하게 되면서 느끼는 허탈함, 고충 같은 걸 그때는 몰랐죠. 제 경우는 그나마 여러 군데 떨어지고, 여러 군데 일을 하면서 약간 굳은살이 박혔다고 할까요? 에어백이 생겼다고 하면 맞을까요? 제 20대는 질척거렸고 새만금 갯벌 같았지만 그래도 얻은 게 있었다, 뻘에서 바지락이 자라듯이 나도 품고 있는 바지락 몇 개가 있으니까 지금 그걸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동료, 후배들에겐 어떤 매력을 훔치고 싶어요?
(강)지영이는 그 차돌 같은 당당함이 매력이에요. (안)나경이는 굉장히 차분한 면. (조)수애는 이제 2년 차죠. 풋풋함이 매력이에요. 그게 방송에 보여요. 선배들이 저한테 “너는 이제 닳고 닳았어” 그러면서 놀리곤 하는데, 그런 풋풋함을 빌려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럴 수 있나요?
송민교 아나운서가 지지 않는 것은?
물론 나이요. 하하. 이건 객관적인 것 같아요. 경험? 후배들보다 가시밭길을 조금 더 걸어봤으니까요. 약간의 자양분이 있지 않을까요?
스타가 되고 싶지는 않나요? 강지영, 조수애 아나운서의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는 수만 명인데, 요즘은 그런 게 중요한 시대처럼 여겨지기도 하니까요.
아무래도 사람이니까요. 얼굴 비치는 직업을 갖고 있는데, 더 많은 분들이 제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디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아주는 건 좋은 거예요. 그만큼 열심히 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제가 노력해야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해요.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빛이 잘 나지 않을 때는 허탈하기도 하죠. 숫자가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알지만 좀 아쉬운 정도?
모든 실력자가 드러내는 데 익숙한 건 아니니까요.
타이밍도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프로그램을 만나느냐도.
지금 연출부터 섭외, 출연까지 다 할 수 있다면 어떤 프로그램을 하겠어요?
<크라임 씬>은 시즌 1부터 열심히 봤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 연극부였거든요. 아주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비정상회담>은 정말 팬이에요. 너무 좋아해요. 한번 출연해보고 싶어요. 제가 어렸을 때 외국에 오래 살아서 그런지 <비정상회담>을 보고 있으면, 그분들이 본인들 나라 이야기할 때 휴가 가는 기분이 들기도 해요. 제가 늘 ‘두 가지만 시켜주면 월급 안 받고 회사 다닐 수도 있겠다’ 싶은 프로그램도 있었어요. <이문세 쇼>부터 <유희열의 스케치북>까지 이어지는 심야 음악 프로그램과 라디오, 너무너무 좋아해요. <별이 빛나는 밤에>는 이문세, 이적, 이휘재 씨 진행을 다 들었어요. 유희열, 이소라의 <음악도시>도 좋아했죠.
경험이 쌓이면서 아나운서로서의 지향점이 바뀌기도 했나요?
제가 무식한 건지 뚝심이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이루지 못했으니까 계속 이어지는 것 같아요.
아나운서로서 가장 큰 쾌락은 뭔가요?
누구나 칭찬이 좋잖아요. 누구한테 칭찬을 받느냐에 따라서 그 무게가 다른데, 정말 스포츠 중계의 대가인 임용수, 정우영 선배님이 “괜찮더라”, “많이 늘었던데”, “듣기 좋던데” 하고 툭 던지시는 말씀이 저한테는 정말 엄청나게 큰 힘이에요. 얼마 전에 오상진 선배님도 “테니스 너무 좋아하는데 잘 보고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테니스는 데이터 스포츠라서 승수 몇 점, 몇 승, 몇 패, 승률 몇 %, 5세트까지 갔을 때 승률 몇 %, 타이까지 갔을 때 승률 몇 %, 이걸 싹 정리해서 업데이트를 계속해야 하거든요. 신나고 재미있는데 고되기는 해요. 그런데 선배님, 선생님들이 툭 한번 쳐주시는 칭찬을 들으면 ‘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방식이 틀리지는 않았나 보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저는 정말 맨몸으로 뛰어든 거라서.
역시, 선수가 알아보는 선수군요. ‘듣기 좋다’는 말이 유난히 좋게 들리네요.
네, 특히 중계는 목소리만 나가는 거니까요. 누가 그렇게 물어봤어요. 왜 그렇게 스포츠 뉴스에 목을 매느냐고. 짧고, 요새 시청률 계속 떨어진다고. 저는 웃으면서 즐겁게 애드리브도 할 수 있는 방송을 하고 싶어요. 좋은 MC가 되고 싶어요. 아, 저 하고 싶은 프로그램 생각났어요. <팬텀싱어>요. 음악 좋아하고, 진행 진짜 잘할 수 있어요. 이거 꼭 실어주세요.
한국 저널리즘 지형도에서 아나운서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일까요? 기자나 앵커가 저널리즘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저널이라는 말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생각해봐야 될 것 같아요. 일기를 다이어리라고 하지 않고 저널이라고 하잖아요? 그렇게도 생각해본다면 분명 역할이 있어요. 진행과 대본에 살을 붙이고 힘의 완급을 조절하고 정보를 첨가하는 것은 아나운서의 역할이거든요. 그것을 마치 글 쓰듯 풀어내는 것도 저널리즘의 한 축이라고 생각하면 더 분명해지죠.
그 역시 여론이고, 넓은 의미의 언론 아닐까요?
네, 말씀 ‘언’이니까. 말씀으로 의견을 전하는 게 언론이니까요.
혹시 저를 좀 도와주시겠어요? 스포츠 중계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 아나운서니까, 저는 야구를 정말 몰라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거든요. “같은 팀 8개가 매년 시합을 하는데, 그게 매년 그렇게 재미있나?” 게다가 야구는 데이터의 예술이니까, 오래 봐온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야구장은 가보셨죠?
완전 반했어요. 해가 점점 떨어지고, 조명이 하나둘 켜지면서 선수들이 몸을 풀 때. 그럴 때 공이 미트에 꽂히는 소리도. 그래서 더 궁금해요.
야구는 일단 규칙을 공부하려고 하지 마시고요, 그냥 규칙을 잘 설명해줄 것 같은 친구랑 야구장에 딱 한 번만 가보세요. 제가 2009년에 친구 다섯 명이랑 부산에 갔어요. 둘은 롯데, 저는 두산 팬, 나머니 둘을 야구 문외한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야구 문외한 두 친구 사이에 딱 앉아서 오늘 얘네가 야구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대충 어떻게 굴러가는지만이라도 알게끔 해주고 이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야구장 가셨을 때, ‘저게 뭐야’ 하고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것 하나가 전광판인 것 같아요. 이름도 숫자도 너무 많아서. 그래서 그걸 설명해줬어요. 이름과 이름 앞에 적혀 있는 숫자의 의미. 그럼 그라운드에 있는 선수가 눈에 딱 들어오거든요.
벌써 알 것 같은데요? 언어 하나를 새로 배우는 느낌이에요.
전광판을 읽는 방법만 알면, 나중에 TV 중계를 들을 때도 ‘6-4-3 병살타’라는 말을 딱 알아들을 수 있어요. ‘아, 유격수, 이루수, 일루수 병살타구나’ 하고. ‘공을 유격수가 잡아서 이루수한테 토스해서 이루수가 일루수한테 줘서 두 명의 주자를 아웃시켰구나!’ 이게 딱 나오거든요.
진짜 좋아하는 게 느껴지네요. 기다릴게요.
아! 아까 숫자 이야기 하셨잖아요? 저는 제가 잘해서 커지는 숫자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보다 더 알려진다면, “송민교가 하는 방송이 좋아”라는 평을 받아서 큰 숫자를 갖고 싶어요. 헐벗고 물벼락 맞는 식으로 이용되고 싶은 생각 없어요. 정말 아이러니하고 너무 슬프게도 그렇게 해서 유명해지면 마치 방송을 잘하는 것처럼 많이 쓰이기도 하죠. 제가 너무 외골수 같고 고리타분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