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인 이유에서든 경험적인 이유에서든 하얀 속옷은 어딘가 낯선 기분이 든다. 어렸을 땐 뭘 모르고 입었을지도 모르지만 자아가 생긴 이후론 하얀 속옷을 찾아서 입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라프 시몬스가 이끄는 캘빈클라인의 2017 S/S 캠페인 사진을 보곤 하얀 속옷, 특히 하얀 드로어즈에 대한 흥미가 돋아났다. 라프 시몬스는 캘빈클라인의 하얀 드로어즈와 청바지를 입은 모델들을 스털링 루비, 앤디 워홀, 리처드 프린스의 작품 앞에 세웠다.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작품 앞에 하얀 드로어즈를 입고 꼿꼿이 서 있는 모델들은 전혀 왜소해 보이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작품보다 하얀 드로어즈를 입은 그들의 모습이 더 우아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럼 라프 시몬스는 수많은 속옷 중 왜 하필 하얀 드로어즈를 입혔을까? 본래 드로어즈는 노골적인 삼각 모양의 브리프보다는 보수적이지만, 벙벙하고 볼품없는 트렁크보다는 세련된 형태를 지녔다. 게다가 면과 폴리에스테르가 적절히 섞인 소재로 만들어 착용감도 편안하다. 그중에서도 하얀 드로어즈는 밋밋한 엉덩이도 볼링공처럼 탄탄하고 팽팽해 보이게 하는 시각적인 효과까지 준다. 저 멀리 태평양 건너에 있는 라프 시몬스의 속내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라프 시몬스도 하얀 드로어즈가 지닌 이런 엄청난 존재감을 일찍이 알고 거장들의 작품 앞에 하얀 드로어즈만 입은 모델들을 세웠으리라 짐작이 간다.
그래도 여전히 하얀 드로어즈는 부담스럽다고? 전혀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속옷이란 가장 먼저 입고 가장 늦게 벗는 것이니까. 중간에 샛길로 새지만 않는다면 나만 아는 우아한 비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