윔블던의 계절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잔디 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상쾌한 탄력과 고급스러운 성취감. 테니스에 대하여. | 테니스,윔블던

1990년쯤이니까 꽤 오래전 이야기다. NHK 위성방송이 막 송출될 무렵에 일본 방송을 많이 보게 됐다.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은 집안 분위기 덕이었다. 이름부터 발랄한 ‘와우와우(WOWOW)’에선 당시 한국 상업방송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문화 콘텐츠가 쏟아졌다. 각종 연주회, 각국의 전통 예술 공연, 고전 영화, 비인기 스포츠 경기가 광고도 편집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방영됐다. 연극이나 오페라의 쉬는 시간까지 고스란히 내비쳤을 정도니까. 일본이 자랑하는 고등학교 야구 대회 ‘고시엔’도 개막부터 결승까지 빠짐없이 보여줬다. 얼마나 문화를 사랑하고 아끼는지 만방에 알리려는 일본의 값비싼 홍보 전략이었다.윔블던 테니스 대회도 그중 하나였다. 예선 몇 경기만 건너뛰었을 뿐 1번 코트 경기를 중심으로 대회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자세하게 보여줬다. 당시 윔블던 대회는 정말 흥미진진했다. 실력이 비슷한 여럿이 정상권에서 각축을 벌였다. 남자는 스웨덴의 스테판 에드베리, 미국의 피트 샘프러스와 앤드리 애거시, 독일의 보리스 베커, 크로아티아의 고란 이바니세비치 등이 대회 때마다 혼전을 펼쳤다. 저마다 개성이 뚜렷해서 더 치열하고 흥미로웠다. 에드베리는 서브 앤드 발리 중심의 화려한 스타일이었다. 샘프러스, 베커, 이바니세비치는 서비스가 강했다. 애거시는 스트로크 중심의 수비형이었다.여자 쪽도 흥미롭기로는 만만치 않았다.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자 선수를 가릴 때마다 빠지지 않는 둘의 시대였다. 독일의 슈테피 그라프와 체코의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가 툭하면 토너먼트라는 피라미드의 꼭대기 부근에서 만나 접전을 펼쳤다. 스페인의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도 만만치 않은 강자였는데 나중에는 스위스에서 온 마르티나 힝기스라는 어린 선수까지 가세해 우승 예상을 어지럽혔다.개인적으로는 아르헨티나의 가브리엘라 사바티니를 좋아했다. 위력적이지는 않았지만 스트로크를 비롯한 모든 플레이가 깔끔했고...라기보다 예뻤기 때문이다. 가브리엘라 사바티니는 서울올림픽 테니스 여자 단식 부문에서 은메달을 기록했다. 그때도 인기가 상당했던 걸로 기억한다. 사바티니의 아름다운 자태가 화면에 잡혔을 때 모 방송국의 남자 캐스터가 방송에서 허용되지 않는 소리(신음 비슷한, 황홀경에 빠졌을 때 으레 낼 법한)를 내 징계를 받았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도 전해진다.사바티니는 1991년 윔블던 대회 결승 마지막 세트에서 숙적 슈테피 그라프에게 아깝게 6 대 8로 졌다. 그 경기를 보며 새삼 인생의 허망함에 사무쳤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다. 훨씬 나중에 당시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예를 윔블던 대회 중계에서 보고 흥분하기도 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야 샤라포바였다.윔블던 대회는 전영 테니스 선수권 대회의 별칭이다. 이 대회가 열리는 곳이 런던 교외 지역인 윔블던이라 흔히 윔블던 대회라 부른다. 전영 오픈 또는 브리티시 오픈이라고도 한다. ‘전영(全英)’이란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등을 포함한 영국 전체를 이르는 말이고, ‘오픈’이란 프로와 아마추어 가리지 않고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윔블던 대회는 US 오픈, 프랑스 오픈, 호주 오픈과 함께 전 세계 4대 테니스 메이저 대회로 꼽힌다.윔블던의 가장 큰 특징은 잔디 코트다. 잔디 코트는 서비스가 강한 선수에게 유리하다. 잔디 코트에 닿은 공은 바닥에 튕겨도 회전과 속도가 크게 줄지 않기 때문이다. 클레이 코트, 앙투카(벽돌 가루) 코트, 하드 코트에서보다 서비스를 받기가 어렵다. 세르비아의 고란 이바니셰비치가 2001년 와일드카드로 출전했음에도 우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름 아닌 시속 210km가 넘는 강력한 서비스였다.윔블던 대회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상대적으로 더 격식을 따진다는 점이다. 윔블던 대회는 선수 복장에 특히 매우 엄격하다. 흰옷만 입어야 한다. 3년 전에는 속옷까지 흰색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추가됐다. 그 때문에 잊을 만하면 논란이 불거진다. ‘팬티도 마음대로 못 입냐’는 것이다.윔블던 대회 중계가 한창 인기를 끌 때 그 중심에 앤드리 애거시가 있었다. 이 대머리 스타가 유명해진 이유를 간추리면 대충 네 가지. 첫째는 물론 뛰어난 실력. 둘째는 사생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염문을 뿌렸다 브룩 실즈와 결혼하더니 이혼한 후에는 다시 슈테피 그라프와 결혼하는 등 여성 관계가 화려하고도 복잡했다. 셋째는 특유의 기질. 걸핏하면 반항을 일삼았다. “성질머리로는 (역시 고약한 성질로 유명했던) 존 매켄로의 뒤를 이을 만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마지막은 화려한 패션 감각. 애거시는 한때 윔블던 대회 출전을 거부했다. 표면적 이유는 ‘잔디 코트가 플레이 스타일과 맞지 않기 때문’이었지만 아는 사람은 알았다. 흰옷만 요구하는 규정을 못마땅해한 것을.애거시는 몇 년 후 거부 선언을 접고 윔블던 대회 출전을 결정했다. 그때 사람들의 관심이 애거시의 옷 색깔에 쏠린 건 당연했다. 반항이 몸에 밴 악동이 규정에 고분고분 따를지, 아니면 평소 성격대로 소동을 일으킬지. 애거시는 예상외로 새하얀 옷을 입고 등장했다. 관중은 웃음과 박수로 애거시의 순종(?)을 기꺼이 축하했다. 다만 단 한 사람, 당시 캐스터의 생각은 좀 달랐다.“꼼짝 못 할 만큼 하얗군요. 저건 저것대로 반항이 아닐는지요.”윔블던 대회는 경제학에도 등장한다. ‘윔블던 효과(Wimbledoneffect)’라는 용어가 있다. 1986년 당시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는 이른바 ‘금융 빅뱅’을 단행했다. 은행을 구조 조정하고 규제를 대폭 철폐하고 금융시장을 외국시장에 개방했다. 과감한 결정의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금융시장은 외국 자본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고 말았다. 경제학자들은 자기 집 안방에서 남들이 잔치를 벌이는 영국 금융시장에 윔블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36년 프레드 페리 이후 영국 선수가 우승한 적이 없는 윔블던 대회의 상황을 빗댄 것이다. 영국인의 윔블던 대회 우승은 2013년의 앤디 머리가 겨우 해냈다. 77년 만이었다.경제학자들은 자기 집 안방에서 남들이 잔치를 벌이는 영국 금융시장에 윔블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올해 윔블던 대회 또한 흥미진진할 것이다. 7월에 벌어질 대회를 벌써 예측하는 게 섣불러 보이긴 하지만 올해 테니스계의 양상은 그만큼 신선하다.남자부는 ‘빅 4’ 체제가 붕괴될지도 모른다. 지난해 US 오픈에서 노바크 조코비치에게 역전승한 스위스의 스타니슬라스 바브링카(5월 1일 기준 ATP 랭킹 3위)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영국의 앤디 머리(1위), 세르비아의 노바크 조코비치(2위), 스위스의 로저 페더러(4위), 스페인의 라파엘 나달(5위)이라는 견고한 사각형이 이번 대회에서 무너질지 지켜볼 일이다. 특히 잦은 부상으로 인한 나달의 하락세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페더러 또한 나이를 속이지는 못할 것이다. 조심스럽지만 이번 윔블던 대회는 조코비치, 머리, 바브링카 셋의 각축전이 되지 않을까.테니스는 아주 힘든 운동이다. 남자 경기는 심하면 서너 시간도 넘게 걸린다. 종목 특성상 리치와 직결되는 신장도 중요하다. 그 때문에 체력과 체격이 뒤지는 동양계 선수가 발 디딜 틈이 좁다. 한때 중국계 미국인 마이클 창이 프랑스 오픈에서 우승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 성적을 내지 못했다. 요즘도 상황은 비슷하다. 일본의 니시코리 게이(7위) 정도가 랭킹 톱 10 안에 드는데, 플레이 스타일상 윔블던 대회 잔디 코트에서는 고전이 예상된다. 한국의 정현(78위)도 유망주지만 갈 길이 멀다.여자부는 훨씬 더 혼전이 예상된다. 절대 강자 세리나 윌리엄스(1위)는 임신으로 올해 더 이상 대회에 출전하지 않는다. 그녀의 부재로 우승 후보를 간추리기조차 힘들게 됐다. 독일의 안젤리크 케르버(2위)와 약물 징계에서 돌아온 마리야 샤라포바 정도가 손에 꼽히는 우승 후보다.세상의 구기 종목은 대체로 네트가 없는 경기와 있는 경기로 나뉜다. 네트 없는 경기의 대부분은 ‘골’ 또는 ‘홀’이라 부르는 구멍에 공을 넣으면 점수를 딴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인간의 본능 중 남성적 성욕을 대리 만족시킨다고 본다. 축구, 농구, 골프 등이 이에 속한다.네트가 있는 경기의 대부분은 공이나 셔틀콕을 네트 너머로 보내고 상대가 되돌려 보내지 못하면 점수를 얻는다. 이 안엔 인간의 정복욕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배구, 배드민턴, 정구, 세팍타크로 등이 이에 속한다(야구, 크리켓, 그리고 럭비와 미식축구는 좀 독특하다. 야구나 크리켓은 홈에 돌아오면 점수를 주니 인간의 귀소본능과 연관 지을 수 있겠다. 럭비와 미식축구는 전형적인 땅따먹기 경기다. 역시 정복욕과 연결된다).테니스는 대표적인 네트 스포츠다. 쳐본 사람은 안다. 스매싱이나 발리로 네트를 넘겼을 때, 그리고 상대방이 받아내지 못했을 때 오는 희열. 라켓에 공이 정통으로 맞았을 때 느껴지는 상쾌한 탄력.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테니스를 승패와 관계없이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멋진 백핸드 발리나 스매시를 한 번이라도 성공시킬 수 있다면, 게임에 이기든 지든, 세트를 이기든 지든, 결국 경기에서 이기든 지든 상관없다는 기분이 들 정도다. 아마추어 스포츠 중에서도 테니스가 유독 그렇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테니스의 매력이라고 느낀다. 단 한 번의 플레이가 잘되기만 해도 된다. 그 때에만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성취감이 있으니까. 그런 쾌감을 주는 스포츠는 아마도 테니스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윔블던 대회가 다시금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