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는 배, 플랫폼은 항구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좋은 배는 기꺼이 항해를 나섰고, 오래된 항구는 한산해졌다. | 미디어,콘텐츠,플랫폼

극장들의 히스테리가 폭발했다. 넷플릭스가 투자 배급하는 봉준호 감독의 신작영화 (2017)의 한국 내 극장 개봉 여부를 두고 국내 3대 극장 체인들이 잇달아 부정적인 반응을 드러냈다. 제일 먼저 입장을 명확하게 밝힌 건 스크린수 1위의 체인 CGV다. 통상적으로 IPTV, 스트리밍 서비스 등을 개시하며 ‘극장 동시 상영’이라고 내건 영화도 극장 개봉일로 부터 최소 3주간의 유예기간을 두는데, 그런 유예기간 없이 극장 개봉과 스트리밍 서비스를 동시에 오픈하는 것은 ‘영화 유통 질서와 영화 산업 생태계를 훼손하는 일’이라며 자신들의 스크린에 를 거는 일은 없을거라고 천명한 것이다. 롯데시네마와 메가박스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극장 스크린의 90%를 차지하고는 아르바이트 직원 착취에 앞장서고 스크린 마스킹도 제대로 안 해주는 데다 작은 영화는 툭하면 퐁당퐁당 징검다리 상영을 일삼던 3대 극장 체인들이 갑자기 영화 유통 질서와 영화 산업 생태계를 염려하는 우국의 광경을 보는 것도 근사한 구경거리이긴 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덕분에 일찌감치 상영을 결정 지은 대한극장과 서울극장, 그리고 한국 내 사용자 확충이 급했던 넷플릭스만 신났다.한국 극장들만 뿔이 난 것도 아니다. 한국 보다 더 엄격하게 영화 산업의 직능별 부문을 보호하는 프랑스에서는 극장 개봉 이후 3년이 지나야 스트리밍 서비스를 개시할 수 있다. 그랬으니 프랑스 극장 연합회가 칸 국제영화제에 넷플릭스가 배급하는 영화 와 노아 바움백 감독의 영화 (2017)가 진출하는 것을 반대하는 성명을 낸 게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봉준호 감독이야 ‘영화제를 돌아다니다 보면 흔히 있는 일’이라고 웃으며 일축했다지만, 이 두 영화 모두 칸 프리미어 상영 초반에 영사 사고가 난 것, 그리고 화면 가득 뜬 넷플릭스 로고를 보며 야유하는 관객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넷플릭스의 고향 미국이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다. 2015년 개봉한 이드리스 앨바 주연, 케리 후쿠나가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2015) 또한 극장 상영 후 90일의 유예기간을 두는 미국 극장가의 관행을 깨고 동시 개봉을 하려 한다는 이유로 미국 내 주요 4개 극장 체인으로부터 보이콧을 당한 바 있다. 넷플릭스가 “영화란 극장의 큰 화면에서 보는 것”이라는 오래된 명제를 무너뜨리고 극장이라는 전통적인 플랫폼을 파괴할 것이라는 공포가 세계적인 흐름이 된 모양이다.평소 진보나 혁신 같은 근사한 단어를 앞세우며 옛것을 무참히 무너뜨리는 식의 흐름에 꾸준히 반대해온 사람 입장에서 를 둘러싼 논쟁은 다분히 골치 아픈 일이긴 하다. 어찌 됐거나 기존의 영화 배급 질서를 넷플릭스라는 다국적 거대 자본이 위협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봉준호 감독이 를 넷플릭스와 함께 만들게 된 이유를 들어보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칸 프리미어 상영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봉준호는 이렇게 말했다. “시나리오를 좋아한 독립 영화 투자사들은 500 억원이라는 제작비를 버거워했고, 그 정도 예산을 아무렇지 않게 운용할 수 있는 거대 스튜디오들은 시나리오를 불편해하며 내용 수정을 제안했다. 그러던 차에 넷플릭스를 만났는데, 시나리오를 바꾸라는 요구도 없었고 등급에 대한 요구사항도 없었다.” 기존의 극장 중심 배급 시스템에서는 이 시나리오와 예산으로 상업적인 이윤을 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망설이던 제작사들의 틈을 넷플릭스가 공략했다는 이야기다. 영화가 공개된 이후에도 여전히 영화의 개봉 방식에 대한 갑론을박은 계속 이어졌으나, 동시에 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왜 넷플릭스가 아닌 기존의 영화 스튜디오 구조는 더 이상 와 같은 창의성을 지닌 프로젝트를 발굴하고 존중해주지 못하는 걸까? 콘텐츠를 성공적으로 선보이기 위해 플랫폼을 혁신하는 게 아니라, 플랫폼에 맞추기 위해 콘텐츠를 깎아내는 지금의 방식이 옳은 것일까?넷플릭스나 아마존 같은 온라인 영화 개봉 업체가 극장을 위협한다면 TV를 위협하는 건 역시 유튜브일 것이다. 올 상반기에 본 모든 영상 콘텐츠 중 가장 혁신적인 콘텐츠를 하나만 꼽으라 한다면 대답은 지상파나 CJ E&M, JTBC의 콘텐츠가 아니라 역시 유튜브 채널 ‘박막례 할머니’일 것 이다. 따지고 보면 콘텐츠 자체는 그리 새롭지도 않다. 메이크업 튜토리얼, 여행 방송, 먹방, 영화 리뷰 방송 등 박막례 할머니가 도전하는 내용은 이미 다른 유튜버들이 마르고 닳도록 했던 내용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 평소 유튜브 생태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70대 크리에이터라는 존재가 더해지며 뻔한 콘텐츠들이 새 생명을 얻었다. 뭐든 해보자고 하면 딱히 빼지는 않는 의욕적인 성미, 툭하면 튀어나오는 구수한 서남 방언과 추임새격으로 등장하는 욕설, 무당벌레 무늬 네일 아트가 망해도 “망하면 이건 산딸기라고 하면 돼. 스트레스받을 필요 없어”라고 눙치는 특유의 낙천성. 여기에 카메라를 들고 자막을 넣는 손녀와 할머니 사이의 애틋한 서사가 끼어들면서 박막례 할머니 채널은 울리고 웃기는 마성의 콘텐츠가 되었다. 올 상반기 DIATV의 모기업인 CJ E&M은 산하 케이블 채널들을 통해 수 많은 콘텐츠를 선보였고, 그 중 시청률이나 화제성 면에서 박막례 할머니의 채널을 뛰어넘는 작품도 많았다. 그러나 신선함과 흥미로움 면에서 박막례 할머니 채널을 따라갈 성취는 없었다.플랫폼은 다양한 예술이 대중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창구이자, 예술을 향유하는 이들이 서로 만나 각자의 생각을 향유케하는 광장이다. 그러나 이 플랫폼이 권력이 되는 순간 콘텐츠가 주저앉는 광경을 우리는 심심찮게 보았다.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2011~2012)은 지상파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 때문에 편성에서 탈락해 JTBC로 와야 했고, (2016~2017)를 비롯한 JTBC의 적지 않은 예능 프로그램은 목표한 시청률을 거두지 못하면 빠른 속도로 폐지됐다. 지상파 방송 3사 중 아직까지 단막극을 정기적으로 편성해 방영하는 채널은 KBS가 유일하다. 오랫동안 지상파 채널의 효자 종목이었던 시트콤은 이제 그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다.극장은 한 술 더 뜬다. 오랜만의 신작인 (2017)을 극장에 건 정윤철 감독은 개봉 일주일 만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2017)를 걸기 위해 자신의 작품을 징검다리 상영으로 치워버린 멀티플렉스 체인들을 향해 공개적으로 울분을 토했다. 재개봉 영화들을 마치 다양성 영화인 것처럼 같은 순위 카테고리에 넣는 배급사들 때문에 진짜 독립 영화들은 관객을 만날 기회 자체를 박탈당해왔다. 매년 반복되는 ‘천만관객’이라는 주문에 걸려 큰 영화에 큰 기회를 줘서 크게 벌어보겠다는 움직임이 쉬지 않고 반복되는 동안, 작은 영화들은 그 틈바구니에 끼여 질식하거나 아예 발아도 못한 세월이 길었다.유튜브나 네이버TV, 카카오TV, 넷플릭스, 아마존 등 온라인 플랫폼이 치고 나온 지점이 바로 여기다. 콘텐츠 제작자들은 이제 플랫폼의 높은 문턱을 두드리며 그 요구 사항에 맞춰 창의성을 깎아낼 필요 없이 바로 온라인에 올릴 수 있게 됐다. 지상파나 케이블 채널 만큼의 화제성이나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제작에도 들어가지 못하거나 다 만들어놓고도 대중을 만날 창구를 찾지 못하는 참사는 피할 수 있게 됐다. 윤성호 감독은 (2010)를 시작으로 (2013~2016), (2014), (2014), (2015), (2016), (2017)에 감독이나 각본, 크리에이터로 참여해 한국 온라인 시트콤계의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했고, 정치적 이유로 탄압받고 방송사에서 쫓겨난 저널리스트들은 유튜브와 홈페이지 기반의 온라인 매체 를 세워 더 날카로운 저널리즘을 이어갈 수 있었다.대형 스튜디오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고 싶은 이들은 넷플릭스나 아마존을 찾았다. 아직 스타가 되기 전의 존 보예가와 함께 갱생을 원하는 흑인 청년의 삶을 그린 넷플릭스 영화 (2014)를 만든 말릭 비탈 감독은 이 영화 한 편으로 선댄스를 비롯한 각종 독립 영화제를 휩쓸었다. 넷플릭스 처럼 독점 개봉 형태를 띠지는 않아도 야금야금 (2016)나 (2016), (2016), (2016)처럼 상대적으로 예산이 적은 작품에 공동 투자자로 참여하는 아마존 스튜디오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그러니 지금 극장이나 TV가 난처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오늘날의 상황은, 어쩌면 그간 너무 오래 우월적 지위를 무기 삼아 콘텐츠 제작의 자유를 제한하고 혁신을 등한시한 거대 플랫폼들의 게으름의 대가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TV에서 날고 긴다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은 하나둘 SM이나 YG, 미스틱과 같은 매니지먼트 회사로 이적하고 있고, 관객들은 를 극장에서 상영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비웃으며 야유를 보낸다.당혹스럽다면 이제라도 움직일 일이다. 지난 몇 년간 꾸준히 까다로운 접안 심사 탓에 입항에 애를 먹은 콘텐츠라는 배는, 이제 극장과 TV라는 오래된 항구를 미련 없이 떠나려 하는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