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스 방식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반스가 옛날 가치로 요즘 시장에서 승리하는 법. | ESQUIRE,에스콰이어

스니커즈의 세계는 흥미롭다. 정상에는 토털 스포츠 브랜드인 나이키와 아디다스가 있다. 시즌마다 주력 모델을 내세워 주거니 받거니 최고의 자리를 나눠 가진다. 동시에 뉴발란스와 컨버스 등의 브랜드가 각자의 영토를 지켜나간다. 절대 강자의 견제 세력이 늘 틈새를 엿보긴 해도 이 세계의 질서가 쉽게 재편될 거라 보는 사람은 드물다.반스가 의외의 다크호스다. 1966년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에서 시작한 반스는 최근 몇 년간 고무적인 성과를 거뒀다. 이는 단순한 트렌드 이상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제조업체의 전형적 경영 방식이나 진보한 기술을 쓰지 않고도 스니커즈업계에서 영향력을 키울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반스 성공의 핵심에는 연고주의가 있다. 연고주의 하면 혈연, 지연, 학연 등의 전통적 사회 관계가 떠오른다.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다. 정치든 외교든 브랜드 경영이든 전 세계인의 신망을 얻으려면 연고주의처럼 구태의연한 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반스는 달랐다. 남들이 ‘글로벌 스탠더드’를 목표로 경주마처럼 달려나갈 때 반스는 캘리포니아를 기반으로 지역에 고착한 문화를 끊임없이 키워나갔다. 자기 사람을 만들고 그들을 지속적으로 품었다.반스의 ‘자기 사람 정신’은 반스의 모태인 액션 스포츠 문화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 스케이트보딩과 서핑은 농구, 축구, 야구 등의 팀 스포츠와 다르다. 선수 간의 경쟁 의식을 부추기거나 엄격한 룰을 내세우거나 결과주의를 지향하지 않는다. 이기고 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어려운 기술을 성공해내면 모두가 함께 기뻐한다. 반스 소속의 한 프로 스케이트보더는 “스케이트보드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할 정도다. 프로 스케이트보더는 보드 위에 올라 경기를 하는 프로 선수이면서 사진가이기도 하고, 음악인인 동시에 화가이기도 하다. 반스도 이를 닮았다. 반스의 신발은 특정 기능을 위한 신발이라기보다 표현의 도구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반스의 각인은 다른 스니커즈 브랜드보다 유독 선명하다.반스 본사에서도 직원이나 임원들이 ‘가족’이라는 단어를 스스럼없이 쓴다. 반스가 창업자 폴 반 도렌을 주축으로 가족 모두가 비즈니스에 관여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반스는 의류 전문 회사 VF 산하다. 그런데도 반스는 스스로의 회사를 여전히 가족처럼 운영한다. 여느 회사라면 유물과도 같았을 창업자 가족 역시 브랜드의 얼굴로 내세워 함께 일한다.반스만의 독특한 기업 문화 역시 창업자 가족으로부터 시작됐다. 스티브 반 도렌은 청년 시절부터 직접 밴을 몰고 다니며 스케이트보더를 대회장에 실어 날랐다. 그는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훈련하는 선수들 옆에 선다. 직접 만든 핫도그와 햄버거를 대접하고 그들과 농담을 주고받는다. 반스의 직원과 소속 선수들은 스티브 반 도렌을 ‘산타클로스’ 또는 ‘대부’라는 애칭으로 부른다.반스의 가족 정신은 인사 문화까지 확장된다. 반스의 주요 모델 개발에 참여한 스케이트보더 토니 알바나 스티브 카발레로는 당연히 전설 대접을 받는다. 은퇴한 선수나 부상당한 후원 선수까지도 현역 수준의 대우를 받는다. 그중 일부는 반스 직원으로 일하기도 한다. 그들은 선수를 발굴하고 관리하거나 다큐멘터리 영상 제작 같은 문화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기획한다. 브랜드와 함께한 영광의 시절을 박제하는 대신 그들의 삶을 지원하는 셈이다.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집단인 동시에 사회적 공동체로도 기능할 수 있다. 반스가 그 증거다. 비결은 문화를 대하는 방식이다. 많은 캘리포니아 지역 거주자가 지역 연고의 농구팀과 축구팀을 응원하는 것처럼 반스라는 브랜드를 응원한다. 반스 특유의 공동체적 운영 덕분이다. 연대 의식의 수명은 소비에 대한 욕망보다 길고 끈끈하기 마련이다.반스를 대표하는 로고. 스케이트보드 실루엣 속의 ‘오프 더 월’. 반스는 특별한 뭔가가 되는 게 아니라 특별한 사람들을 대변하고자 했다. 탁월한 전략이었다. 반스를 대표하는 로고. 스케이트보드 실루엣 속의 ‘오프 더 월’. 반스는 특별한 뭔가가 되는 게 아니라 특별한 사람들을 대변하고자 했다. 탁월한 전략이었다.반스 에라의 발목 부분에 도톰한 완충재가 들어 있다. 스케이트보더의 발목을 보호하는 장치다. 반스가 스케이트보더의 요청을 받아들인 수많은 증거 중 하나. 반스 에라의 발목 부분에 도톰한 완충재가 들어 있다. 스케이트보더의 발목을 보호하는 장치다. 반스가 스케이트보더의 요청을 받아들인 수많은 증거 중 하나.스케이트보더가 미끄러지는 걸 방지하고자 반스는 와플 모양 밑창을 만들었다. 그 후 계속 바꾸지 않았다. 그렇게 와플 모양 밑창은 반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스케이트보더가 미끄러지는 걸 방지하고자 반스는 와플 모양 밑창을 만들었다. 그 후 계속 바꾸지 않았다. 그렇게 와플 모양 밑창은 반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반스 특유의 뭉툭한 앞코와 주요 부분을 두 번 꿰맨 더블 스티치. 소비자보다 앞서나가지 않은 편안한 디자인. 반스 특유의 뭉툭한 앞코와 주요 부분을 두 번 꿰맨 더블 스티치. 소비자보다 앞서나가지 않은 편안한 디자인.“반스와 스케이트보드가 함께 성장했다.” 반 도렌 가문 3세 크리스티 반 도렌의 말이다. “반스는 브랜드 입장이 아닌 스케이트보더 입장에서 신발을 만드는 곳이다.” 많은 스케이트보더 역시 그에 화답한다. 반스 스니커즈는 섣불리 미래의 신발로 진화하지 않고 원형 모델을 그대로 유지한다. 이 역시 소비자를 앞서기보다 소비자를 살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소비자에게 귀 기울이는 태도, 여기서 반스의 힘이 나온다. 기획, 디자인, 프로모션 등의 제작 과정에서 독선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이다. 브랜드를 만들 때 오만함은 큰 함정이 된다. 오만함으로부터 탄생한 제품엔 온갖 치장과 수식이 필요하다. 오만함을 대중에게 이해시킬 트렌드세터와 인플루언서가 필요하다. 그에 걸맞은 블록버스터급 광고도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반스의 창업자 폴 반 도렌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대중이 반스에게 주는 건 무엇이든 받고, 대중이 원하는 신발은 무엇이든 만든다.”쿨하다는 것. ‘쿨함’은 반스라는 브랜드의 이미지를 묘사할 때 뺄 수 없는 개념이다. 2000년대를 지나며 수많은 기업이 규모와 종목을 막론하고 붙잡고 싶어 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런데 쿨하다는 건 정서적인 규모 및 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비자에게 일방적인 마케팅 공세를 퍼붓거나 브랜드의 가치를 가르치려 드는 브랜드는 쿨한 브랜드로 여겨지지 않는다. 반스는 최고가 되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했다. 그 덕분에 쿨한 브랜드의 대표 주자가 될 수 있었다.“최고라고 외치지 않기 때문에 창의적인 사람들 모두를 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작은 문화를 존중한다.” 반스의 신발 디자인 디렉터 라이언 포제본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반스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스스로 반스를 찾아왔다. 1970년대의 펑크록 아티스트나 2000년대의 힙합 뮤지션 모두 마찬가지였다. 거금을 들여 모셔오는 갑을 관계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서슴없이 반스 신발을 신고 지낸 날들에 대해 털어놓는다. 반스가 정서적으로 작은 규모를 유지하기에 가능한 일이다.반스는 규모가 큰 회사다. 전 세계에 직원이 8000여 명, 한 해 매출이 약 23억 달러다. 하지만 반스는 성공하다 보면 숙명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규모에 도취되지 않으려 한다. 라인업의 확장에도 신중하다. 1976년에 나온 반스의 첫 번째 스케이트보드화 ‘에라’가 이를 대변한다. 반스 특유의 더블 스티치, 스케이트보딩에 최적화한 와플 형태의 고무 아웃솔, 레드 컬러의 오프 더 월 로고까지, 4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반스가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투자에 앞장서는 일도 있다. 문화적 인프라 구축이다. 반스는 2001년 500만 달러를 들여 음악 페스티벌 ‘워프트 투어(Warped Tour)’를 인수했다. 뉴욕과 런던에 반스 문화의 구심점으로 불리는 다목적 공간 ‘하우스 오브 반스(House of Vans)’를 세우기도 했다. 지역 단체와 손잡고 스케이트파크도 만들었다. 1990년부터 2000년 사이 반스가 미국 전역에 지은 스케이트파크는 12개에 달한다.캘리포니아의 해변 도시 헌팅턴비치는 서퍼들의 천국으로 불린다. 그곳에 있는 반스의 스케이트파크에 4~5살짜리 꼬마와 10대 청년들이 한데 모인다. 그들은 각자 스케이트보드 기술을 연마하거나 BMX 자전거로 장애물을 넘는다.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이곳에 반스 매장은 없다. 대신 지역 명물로 꼽히는 스케이트 편집 매장 잭스 개라지(Jack’s Garage)가 있다. 스케이트파크의 일부 기물은 새로 만들지 않고 헌팅턴비치 고등학교에서 쓰던 걸 그대로 가져왔다. 반스는 이 결정에 대해 ‘지역 스케이트 역사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라고 설명한다.브랜드와 사람과 문화가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반스가 만들어가는 문화이며 정신이다. 2004년부터 경영 전반을 책임지고 있는 반스 부회장 더그 팔라디니는 반스의 자연스러움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미완성의 아름다움을 존중합니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계획되어 있어도 좋겠지만, 조금은 흐트러지고 실수가 있어도 그 나름대로 아름다움이 존재하죠. 반스는 늘 그런 콘셉트를 반영하려고 노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