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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바퀴와 묵은 하룻밤

두 바퀴에 최소한의 짐만 싣고 무작정 서쪽으로 달렸다.

BYESQUIRE2017.07.12

듀카티, 멀티스트라다 1200 - 에스콰이어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이따금 생각에 잠긴다. 한참을 생각하다 보면 늘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럴 때 한숨을 크게 쉬고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들여 다본다. 디지털을 통해 접하는 세상은 내 머릿 속보다 더 엉망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충격적인 뉴스가 도마에 오른다. 새로운 뉴스 피드를 따라갈수록 가슴이 더 먹먹하다. “그래, 그냥 다 잊고 시원하게 한번 달리자!”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더 강하고 오래 버티려면 힐링도 필요하다. 갑자기 결정한 1박 2일 투어. 당연히 목적지도 계획도 없다. 그냥 모터사이클을 타고 달리고 싶은 만큼 달리다가 머물고 싶은 곳에서 짐을 풀면 된다. 음식은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 거다. 장소가 좋으면 노숙도 괜찮다. 그러니 준비물은 많이 필요하지 않다. 텐트, 침낭, 코펠 한 개가 전부다. 스마트폰을 위한 여분의 배터리도, 최신형 스마트워치도 필요 없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난다.

길이 있든 없든 몸이 이끄는 방향으로 달리고 싶다. 그러니 모터사이클 만큼은 마음이 잘 맞아야 한다. 이럴 때 호흡을 맞추고 싶은 녀석들은 많다. 이번엔 두카티다. 노면에 딱 붙은 날렵한 녀석 말고, 차분한 분위기의 멀티스트라다 1200 엔듀로가 제격이다. 카키색 연료 탱크에 커다란 사이드 케이스를 단 모습만으로도 듬직하다. 포장도로든 오프로드든 가리지 않고 묵직하게 나아갈 실력을 갖췄다. 키를 깊게 꽂고 시동을 건다. ‘우르르릉!’ 힘찬 출발 신호와 함께 턱 막혔던 숨이 트인다. 마음이 한결 평온해진다.

뒤도 안 돌아보고 집을 나선다. 익숙한 길을 따라 도심 외각으로 흘러간다. 서울에서 출발해 1박을 즐길 여행지는 어차피 뻔하다. 250km 정도 달리면 대충 목적지에 닿겠지. 두 번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서해로 무작정 방향을 틀었다. 초여름 이맘때면 화성 우음도 주변이 이국적인 풍경이다. 넓은 초원과 높은 하늘 사이로 시원하게 달릴 수 있다. 간간이 시화호로 이어지는 물줄기가 길을 막지만, 잘 돌아가다 보면 분명 어디론가 길이 연결된다.

듀카티, 멀티스트라다 1200 - 에스콰이어

듀카티, 멀티스트라다 1200 - 에스콰이어

평탄한 포장도로에서 벗어나 비포장도로로 들어설 때 갑자기 라이딩 분위가 전환된다. 아무리 오프로드에 뛰어난 모터사이클이라도 자연이 허락한 만큼만 갈 수 있다. 그 신호를 유심히 살피는 게 바로 라이더의 몫이다. 스로틀을 강하게 감는다. 멀티스트라다의 뒷 바퀴가 주르륵 미끄러지며 꼬리를 세차게 흔든다. 이럴 때 힘으로 제압하면 안 된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몸을 맡긴다. 모터사이클과 함께 흘러간다. 뒤로는 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시원하게 속도를 낸다. 멀티스트라다 위에 서서 오로지 비포장도로를 빠르게 통과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 근심 걱정이 없다. 그저 자유로울 뿐.

“서해의 벌천포해수욕장이 그렇게 좋더라. 물도 깨끗하고.” 갑자기 누군가 추천해준 장소가 떠오른다. ‘그래, 벌천포로 가자.’ 화성 공룡알 화석지에서 갑자기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내비게이션상 국도로 120km나 떨어진 곳, 2시간 20분이나 달려야 하는 거리다. 그때 시간은 오후 3시 50분.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달려야 한다. 아산만 방조제를 지나 38번 국도를 타고 속도를 높인다. 바람이 통과하는 지역을 지날 때 갑자기 온몸이 시원해진다. 그러다 곧 미지근한 공기를 다시 만난 다. 서해는 유독 그런 구간이 많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교통량이 크게 줄어든다. 이럴 때 고속으로 모터사이클의 한계를 시험해보기에 좋다. 도착지까지 5km를 앞두고 기분 좋은 산 길을 만난다. 길이 리듬감 있게 굽이친다. 멀티스트라다와 함께 한 코너, 한 코너를 집중해서 돌파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코너 끝에서 넓은 해수욕장이 튀어나온다.

벌천포해수욕장은 서산의 유일한 해수 욕장이다. 해변이 모레가 아니라 몽돌로 돼 있어서 더 이국적인 풍경이다. 물이 맑기로 유명한 곳이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장소라 상대적으로 인적이 드물다. 큰길을 따라 바다 맨 끝자락에 다다르면 서해 바다쪽으로 깊숙이 뻗은 땅이 있다. 그곳에 벌천포 캠핑장이 자리 잡았다. 바다 깊숙이 맞닿은 가장 좋은 자리에 서둘러 텐트를 친다. 텐트 앞으로 기암괴석이 어지럽게 깔려 있다. 초여름이지만 오후 8시가 돼서야 빨간 노을이 진다. 아름다운 경치다. 텐트를 치다 말고 하늘을 한없이 바라본다.

듀카티, 멀티스트라다 1200 - 에스콰이어

듀카티, 멀티스트라다 1200 - 에스콰이어

듀카티, 멀티스트라다 1200 - 에스콰이어

듀카티, 멀티스트라다 1200 - 에스콰이어

꼬르륵. 분위기는 무척 낭만적이지만 배 속에선 식사 시간이 지났음을 강하게 알린다. 가까운 매점에서 냉동 돼지고기와 철판, 컵라면을 사온다. 야채나 양념장 따위는 없다. 그저 옆 텐트에서 빌린 소금 조금만 있을 뿐. 그래도 정성껏 구운 고기는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다. 해보지 않고, 먹어보지 않으면 그 맛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먹는 고기 한 점, 라면 한 젓가락 만큼 맛있는 음식은 세상에 없다. 진심이다.

모닥불이 빠르게 타들어간다. 식사를 마치고 나른한 상태로 불멍(불을 보며 멍때리는 행동)을 즐긴다. 장작 터지는 소리가 듣기 좋다. 서서히 긴장이 풀린다. 이런 게 힐링이다. 일상에서 200여 km를 떠나와 바다 앞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다시 마음이 따듯해진다. 하루 종일 고생하면서 달려온 보람이 있다. 그러다 문득 다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이게 삶이다. 답답함 끝엔 언제나 잠깐의 꿀 같은 휴식과 행복도 있다. 머리로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몸으로 느끼는 수밖에. 그러니 언젠간 이곳에 다시 올 날도 있을지 모른다. 이런 저런 생각과 함께 그 밤의 끝은 조용히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