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의 5일밤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우리는 파리에서 일상의 장면과 콜라텍의 추억, 패션의 첨단, 위태로운 거장, 영리한 신인, 탁월한 상업성, 순백의 예술성을 모두 만났다. 파리는 패션 위크 때마다 새롭게 태어난다. | ESQUIRE,에스콰이어

DAY 121 - WED JUNE—발렌시아가오후 12시백진희(이하 백) 저는 파리가 이렇게 무더운 도시인줄 정말 몰랐네요. 기록적인 이상 고온이었다면서요. 처음엔 파리가 아니라 방콕에 온 줄.권지원(이하 권) 말도 말아요. 이번 2018S/S 파리 패션 위크의 첫 쇼는 발렌시아가였잖아요.신기주(이하 신) 나도 뎀나 바잘리아 넘나 가고 싶었는데.권 그런데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가 하필 그렇게 무더운 여름날 우거진 볼로뉴 숲에서 쇼를 했다는 사실. 숲속으로 5분 이상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걸어 들어가야 했어요.신 런웨이는요?권 숲속 오솔길 양편에 일렬로 의자를 늘어놓고 쇼를 했어요.신 볼로뉴 숲은 우리 숙소가 있었던 파리 샹젤리제에서 택시 타고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던데, 서울숲이나 여의도공원 같은 곳이더라.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루이비통 미술관도 볼로뉴 숲에 있고.백 거기 참 좋죠.신 도대체 왜 뎀나 바잘리아는 볼로뉴 숲에서 쇼를 했을까?권 요즘 뎀나 바잘리아는 일상의 소소한 기쁨과 재미에서 디자인 영감을 얻고 있어요. 원래 베를린과 파리에서 살았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스위스 취리히로 이사를 했어요. 발렌시아가와 자신의 개인 브랜드 베트멍의 디자인을 모두 스위스에서 하고 있어요. 취리히는 아무래도 파리나 베를린보단 유행에 덜 민감한 도시죠.신 “취리히는 백지 상태 같아서 좋다”고 했다던데.권 이번 파리 패션 위크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서 다 함께 발렌시아가의 2017F/W 컬렉션을 보러 갔잖아요. 그때 다들 느꼈다시피, 2017F/W가 주중의 일터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인들이라면, 2018S/S는 주말의 쉼터에서 영감을 얻는 디자인들이었어요. 발렌시아가의 2017F/W가 아버지의 작업복이었다면 2018S/S는 아버지의 주말이 주제였죠. 주중엔 일하는 아빠들은 주말이 되면 숲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나오잖아요. 실제로 이번 발렌시아가 쇼엔 아빠와 아이들이 함께 런웨이에 섰어요. 주말에 가족들이 자주 찾는 볼로뉴 숲이야말로 이번 발렌시아가 쇼에 제격인 무대였고.백 뎀나 바잘리아는 뮤즈도 독특해요. 런던에서 평생을 산 조지프 말코비치라는 할아버지한테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쇼에선 디자인만큼이나 스타일링이 중요해지고 있잖아요. 2017F/W 파리 패션 위크에서 화제를 모았던 루이비통×슈프림도 사실상 스타일링의 승리였죠. 뎀나 바잘리아는 디자인에서뿐만 아니라 스타일링도 일상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거죠.신 영감한테서 영감을 받았구나.백 집중 좀 하세요. 제가 말코비치 할아버지 사진을 본 적이 있거든요. 할아버지이긴 한데 옷 입을 때 색 배합을 정말 잘하세요. 또 옷을 좀 특이하게 입는 편이고요. 벨트만 해도 바지를 입기 위해 벨트를 하는 게 아니에요. 허리 아랫단에다 벨트를 자기 멋대로 묶어버려요.신 솔직히 나한테 이번 파리 패션 위크는 발렌시아가로 시작해서 발렌시아가로 끝난 셈이거든. 첫날 쇼는 비즈니스 일정상 못 갔지만 파리 패션 위크의 마지막 날 발렌시아가 리시(Re-see)에 갔으니까. 쇼에서 선보인 옷을 기자들에게 다시 보여주는 행사. 덕분에 이번 파리 패션 위크는 일상에서 시작해서 일상으로 끝난 느낌이랄까. 파리 패션 위크 하면 어쨌든 화려하고 멋진 패션의 별세계가 펼쳐질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뎀나 바잘리아는 패션이 패션이라는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서 사람들의 삶 속으로 한발 더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나 같은 아빠들의 전성시대가 열리는 기분? 이번 시즌 발렌시아가 로고 플레이 못 봤나요? Dreamscometrue. 발렌시아가를 입고 패셔니스타가 되겠다는 나 같은 아재들의 꿈도 이루어진다고.권 뎀나 바잘리아의 로고 플레이는 정말 재미있었어요. 여기저기에 로고를 반복적으로 활용했어요. 그것 역시 1990년대의 일상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던데요.백 이번 파리 패션 위크에서 뎀나 바잘리아는, 발렌시아가는 볼로뉴 숲에서 쇼를 했지만 정작 자기 브랜드인 베트멍은 프레젠테이션만 했잖아요. 말이 프레젠테이션이지 일상적인 사진들을 전시해놓아서 ‘이게 뭐냐’는 얘기까지 나왔고신 패션이 쇼라는 틀을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뎀나 바잘리아가 친구들과 처음 베트멍을 만들었던 것도 몸담고 있던 빅 브랜드가 너무 틀에 박혀 있어 지루해서였다고 하잖아요. 이제 뎀나 바잘리아 자신도 발렌시아가와 베트멍을 이끌고 있는 반열에 올랐지만, 정작 자신이 그런 지루한 사람이 되는 게 싫은 거겠죠. 그래서 스위스로 탈출하고, 쇼 형식을 바꾸고, 아예 쇼를 거부하고, 무대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들어가고.백 하지만 저는 뎀나 바잘리아에 대한 비판에 동의하는 편이에요. 쇼를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브랜드의 감성과 감각이 있거든요. 사진으로만은 결코 느낄 수 없는 기운. 모델이 입고 걸을 때의 옷과 그냥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은 너무 다르니까. 쇼에선 옷을 느낄 수가 있어요. 보는 것만이 아니라.신 알다시피 이번에 편집장으로서 처음 패션쇼에 갔던 거잖아요. 그래서 요즘 가장 활기차다는 파리 패션 위크에 집중했던 거고. 첫 번째 패션쇼가 발렌시아가였다는 게 아이러니하네. 화려한 패션쇼를 보러 갔더니 평범한 일상이 있고, 모델이 캣워크하는 런웨이를 보러 갔더니 덩그러니 사진만 걸려 있고.권 그래도 편집장으로서 처음 찾은 이번 파리 패션 위크가 뎀나 바잘리아의 발렌시아가로 문을 열었다는 건 의미 있는 것 같아요. 시대마다 시기마다 패션을 이끄는 천재들이 등장하거든요. 한때는 디올 옴므의 에디 슬리먼이었고 지금은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고.백 구찌의 톰 포드도 있었지.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도 있었고.신 파리, 밀라노, 런던, 뉴욕은 저마다 그런 천재를 배출하려고 애쓰는 거겠고. 그런 천재가 등장할 때마다 패션의 중심이 그 도시로 이동하니까백 알렉산더 맥퀸도 그립네요.르메르오후 2시 30분신 그러고 보니 백진희 에디터는 그 무더운 파리에서 르메르의 긴 드레스를 입고 돌아다녔지?권 패션 위크 첫날 기온이 37°C였는데백 르메르 쇼를 위해 긴 드레스를 입은 저 자신을 하루 종일 벌하고 싶었어요권 죽을 뻔백 볼로뉴 숲은 그나마 야외라 바람이라도 불죠. 르메르 쇼장은 심지어 밀폐된 실내 공간이었다고요. 너무너무 더운데 에어콘 같은 건 없었어요.신 백진희 에디터는 에르메스 디자이너이던 시절부터 크리스토퍼 르메르의 오랜 팬이잖아요. 정확하게는 오랜 고객. 고객님이 오셨는데 그 따위로 대접했단 말이야?백 선풍기도 두 대 정도였나? 그나마도 넘쳐나는 사람들로 가려져서 바람은 쐬지도 못했고. 정말 폐공장 같은 곳에서 쇼를 했거든요.신 도대체 왜 음침한 폐공장 같은 곳에서 쇼를 했을까? 언제나 산뜻하고 정갈하고 화사한 르메르 브랜드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뜻밖인데?백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르메르가 이번 쇼의 영감을 받은 대상이 1970년대에 활동한 독일 밴드 라 뒤셀도르프와 크라프트베르크라고 해요. 쇼장에서도 베를린 출신 밴드가 공연을 했어요. 그 음악에 맞춰서 모델들이 워킹을 했죠.신 폐공장에서 독일 밴드라니, 드디어 정숙했던 르메르가 막 나가기로 마음먹은 건가?백 설마요. 편집장님 말씀처럼 저는 르메르의 오랜 팬이지만, 르메르가 변화를 즐기는 편은 아닌 것 같아요.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르메르 역시 르메르 때보다 오히려 에르메스 시절에 더 변화의 폭이 컸던 것 같고. 에르메스가 등을 떠밀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미니멀리즘의 끝판왕이며 언제나 세련된 색감을 보여주죠.권 크리스토퍼 르메르는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우아하고 세련된 디자인을 탁월하게 잘해요.백 이번 시즌에도 르메르의 세련된 특징들은 여전했어요.신 형, 색, 질, 스타일링, 협업. 이번 파리 패션 위크에서 만난 디자이너와 브랜드마다 각자 자기만의 주 무기가 따로 있는 것 같았어요. 그중에서도 르메르는 색의 고수인 것 같고.백 셔츠 스타일링은 크라프트베르크의 이라는 앨범 커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해요. 그래서 베를린 밴드를 쇼에 데려오기까지 한 게 아닐까 싶어요. 르메르는 한결같지만 디테일은 조금씩 달라져요.신 르메르는 언제나 르메르지만 똑같은 르메르는 아니다?백 맞아요. 그런 생각이 드는 쇼였죠. 또 너무너무 더워서, 한여름에도 더위 따윈 안 탈 것 같은 남자가 입어야 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신 나는 아니네.백 (도전) 편집장님은 더위도 타고 선도 가늘지가 않아서....신 (반격) 선을 넘지 마세요!발렌티노오후 5시 30분권 이번 2018S/S 파리 패션 위크에서 액세서리를 가장 잘 쓴 브랜드를 하나 꼽으라면 발렌티노였습니다.백 신발에 가방에. 저도 지원 선배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쇼를 보면서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도 생각나고 뎀나 바잘리아도 생각나고 루이비통×슈프림이며 팔라스가 다 생각났지만, 발렌티노가 제일 잘한 건 가방과 운동화와 목걸이와 벨트 같은 액세서리였어요. 모든 착장에 벨트를 했죠.권 신발과 가방을 참 잘했어. 이번에 발렌티노가.백 에스닉한 벨트와 액세서리에서 발렌티노의 DNA를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발렌티노를 젊은 분위기로 확실히 전환시킨 쇼였달까. 스포티즘이 강화됐고.신 에스닉하다는 건 주렁주렁 집시풍이라는 뜻일 테고, 스포티즘이 강화됐다는 건 스트리트 느낌으로 브랜드가 활동적이고 발랄해졌다는 얘기일테고.권 그것도 완전하게, 뚜렷하게.백 발렌티노의 락스터드 스니커즈가 빵 터진 적이 있었잖아요. 카무플라주 스니커즈도. 이번 시즌에도 그런 운동화나 액세서리가 굉장히 인기를 끌 것 같아요.신, 권 동의.백 그러면서도 에스닉한 벨트를 통해 발렌티노다운 느낌을 계속 지켜냈달까.권 아쉬움도 있었어요. 발렌티노의 브랜드 레터링은 ‘노잼’이었어요. 옷 이곳저곳에 ‘V.L.T.N’이라고 큼지막하게 새겨놓았더라 고요.신 V.L.T.N이면 발렌티노?백 싫어.권 그런데 그게 의도한 거예요신 뭐? 싫어하라고?권 그게 아니라, 발렌티노가 젊어지고 싶어 한다는 얘기죠.신 젊어지고 싶어 하는 건 이번 시즌 빅 브랜드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현상이었어요. 마케팅적인 필요도 있었겠죠. 주요 고객층 시장은 포화됐고 젊은 소비자층을 공략해야 하니까. 사실 브랜드는 끊임없이 젊게 다시 태어나야 하는 거고. 발렌티노의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도 그런 흐름 속에서 이번 시즌을 준비했던 것 같고.권 그런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게 이번 시즌에 처음 등장한 V.L.T.N이라는 브랜드 레터링이었어요. 가슴에도 있고, 등에도 있고.백 쇼장에서 제 자리가 마침 스피커 바로 옆이었거든요. 켄드릭 라마의 음악이 흘러나왔어요. 대부분이 힙합 음악. 사실 쇼장은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는 고풍스러운 공간이었는데 정작 음악은 켄드릭 라마.신 패션과 공간과 음악의 만남과 충돌이 딱 지금의 발렌티노 같네요.하이더 아커만오후8시신 “모델은 재미가 없어요. 남자가 흥미롭죠. 고독한 남자들. 관능적인.” 2017년 6월호 인터뷰에서 하이더 아커만이 했던 말. 고독하고 관능적인 남자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하이더 아커만의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솔직히 이번 파리 패션 위크에서 가장 기다렸던 쇼였어요. 디자이너 하이더 아커만의 개인 쇼와 하이더 아커만이 수장으로 있는 벨루티 쇼.백 또 편집장님을 위한 브랜드라고 말씀하시려고 그러죠?신 하이더 아커만이 관능과 고독을 얘기할 때, 정말 내 얘기하는 줄.백 저는 벨루티 쇼의 남자가 관능적이고 고독하다면 정작 하이더 아커만 쇼의 남자는 다르게 표현하고 싶어요. 나쁜 남자.신 그건 아니네.백 파리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채 하이더 아커만의 세로 스트라이프 스타일을 입고 등장한 남자라면, 나쁜 남자가 맞지 않을까? 게다가 봄여름 시즌이라 샌들이나 플립플롭을 많이 신고 나왔고. 자유롭죠. 실크 소재를 많이 써서 섹시한 느낌을 주고. 쇼의 동선도 직선이 아니라 원형으로 이러저리 정신없이 만들어놓고.신 밤거리를 헤매는 나쁜 남자란 거네. 나... 아니네.백 벨루티와 비교하면 좀 더 자유로운 남자겠네요. 하이더 아커만 쇼를 보고 나선 벨루티 쇼가 더 기대됐던 것 같아요. 어떻게 다를까 궁금해서.신 그 차이를 파악하는 것도 이번 파리 패션 위크의 재미였어요. 뎀나 바잘리아의 베트멍과 발렌시아가는 어떻게 다른가. 하이더 아커만의 하이더 아커만 쇼와 벨루티 쇼는 어떻게 다른가.백 디자이너가 온전히 드러내는 자기 색깔과 빅 브랜드를 통해 드러나는 색깔의 차이.신 하이더 아커만이 해석한 벨루티와 하이더 아커만 본연의 색깔은 어떻게 닮았고 다른가. 거칠 것 없이 자유로운 나쁜 남자와 내면의 고독을 숨긴 관능적인 남자.권, 백 어느 쪽도 편집장님은 아니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