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의구심밖에 없었다. 테슬라는 유니콘, 일론 머스크는 아이언맨 같았다. 전자는 환상의 동물, 후자는 슈퍼 히어로. 어쨌든 둘 다 현실감이 없었다는 뜻이다. 일론 머스크가 비즈니스업계의 슈퍼스타라는 건 알았지만 좀 허무맹랑해 보였다. ‘하이퍼 루프’니 ‘화성 이주 프로젝트’니 하는 말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 없이도 세상은 충분히 복잡하고, 혁신은 이미 필요를 넘어섰고, 세상의 혁신을 따라잡는 데 투자해야 하는 개인의 비용이 더 커진 세상에서 다들 살아남고자 숨가쁘게 뛰고 있으니까.
서울 인터콘티넨탈 호텔 지하에 있는 테슬라 슈퍼차저 앞에서 실물을 마주하기 전까지. 거기서 한 시간여 만에 베터리를 100% 충전하고 부산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고 나선 좀 다른 세계가 열린 것 같았다. 경험이 사고를 확장 혹은 전환시켰다는 뜻이다. 테슬라는 경험이었다. 모든 게 선명해졌다.
금 한국에서 파는 테슬라는 모델 S90D다. 75D와 100D도 올해 안에 출시할 예정이다. S는 테슬라가 만드는 세단을 의미한다. X는 크로스오버, 모델 3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보급형 테슬라다. 숫자는 배터리 용량이다. 75D는 75kWh, 90D는 90kWh, 100D는 100kWh 용량의 배터리를 쓴다. 배터리가 커지면 주행거리도 늘어나고 힘도 세진다. 1회 충전 시 주행거리는 75D가 359.5km, 90D가 378km, 100D가 451.2km다. D는 듀얼 모터를 의미하는 약자다. 앞바퀴 축과 뒷바퀴 축에 각각 하나의 모터가 있는 항시 사륜구동(AWD) 모델이라는 의미다. 시승 차는 모델 S90D였다. 90kWh 용량의 배터리를 쓰고 모터가 둘 있는 테슬라 세단이라는 뜻이다.
빨간색 테슬라 모델 S90D가 서울 인터콘티넨탈 호텔 지하 주차장, 테슬라 슈퍼차저 충전소에 서 있었다. 빨간색 기둥에 테슬라 로고가 박혀 있었다. 지하 4층 주차장 48구역에 5기의 급속 충전기가 설치돼 있고, 테슬라 모델을 충전하는 동안 주차료는 무료다. 여기서 파크 하얏트 부산까지의 예상 주행거리는 약 400km. 완충 상태에서 출발해 조심조심, 에어컨도 켜지 않고 음악도 안 들으면 가까스로 갈 수 있을까?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고작 4.2초인, 완연한 스포츠카 성능인데? 성질대로 달리기로 했다. 혹시 배터리가 모자랄 것 같으면 천안이나 대구에 있는 급속 충전소에 들르면 그만이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가는 마음으로.
모델 S는 전기차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단숨에 부순 차였다. 일론 머스크는 처음부터 대중에 봉사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 흔하고 케케묵은 전기차의 개념, 환경을 보호하면서 작고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순하고 매력 없는 자동차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대신 누구나 꿈꿔 마땅한 자동차를 만들고 싶었다. 테슬라가 처음 전기차 모델을 만들 때 로터스와 손잡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영국 자동차 회사 로터스야말로 작고 날렵하며, 달리기 자체에 집중하는 자동차를 제대로 만들 줄 아는 회사니까. 거기서 어떤 DNA를 끌어올 수 있다면 테슬라 역시 매력적인 자동차가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래서 만든 자동차가 로드스터였고, 이후 다임러와 손잡고 만든 차가 모델 S였다.
모델 S90D를 타고 달린 고속도로 위에선 로터스와 다임러의 흔적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었다. 2톤이 넘는 무게로 그렇게까지 민첩하게 움직이는 핸들링에서 로터스 엔지니어링의 감성을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 쫀쫀함에는 테슬라 본연의 구조적 장점 또한 있었다. 테슬라의 배터리는 차체 바닥에 넓게 깔려 있다. 전기차 무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배터리가 차체 가장 낮은 곳에 있으니 무게중심도 같161이 낮아진 것이다.
그야말로 내연기관 자동차의 운전 재미를 초월해버릴 수도 있는 설계다. 게다가 그토록 품위 있는 주행 감성에서 다임러의 전통과 격을 느낄 수 있었다면? 다임러에서는 버튼처럼 세세한 부품만 따온 게 아니었다. 모델 S90D의 주행 감성은 제대로 농익어 있었다. 전기차라서 느껴지는 위화감이나 어색함도 거의 없었다. 가속페달을 밟는 순간 모든 토크가 쏟아져 나오는 전기차 특유의 특성도 원하는 만큼 발산하고 바라는 정도로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능수능란했다는 뜻이다. 이런 건 재능일까, 의지일까?
말도 많고 탈고 많았던 오토 파일럿 기능은 테슬라의 현재와 미래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었다. 스티어링 휠 왼쪽 아래에 있는 레버를 두 번 짧게 당기면 오토 파일럿 기능이 활성화된다. 차가 달리고 있는 도로의 제한속도를 알아서 인식하고, 미리 설정해둔 앞차와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도로 상황에 맞춰 달린다. 흔히 사용하는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기능이 운전자의 발을 피로로부터 해방시켰다면, 테슬라의 오토 파일럿 기능은 운전자의 손과 발에 같은 정도의 자유를 선물했다. 가속페달과 브레이크 페달에서는 발을 떼고, 스티어링 휠에서는 손을 뗀 채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게 가능하다.
지만 오토 파일럿 기능을 자율 주행 기능과 혼동해선 안 된다. 설사 완벽한 수준의 자율 주행 시스템이 완비돼 있다고 해도 오토 파일럿에 주행을 전부 맡겨서도 안 된다. 테슬라는 차체 곳곳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 도로 상황과 차선을 인식하는데, 그게 모든 순간 완벽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미처 인식 못 하는 도로 구조물이 나오거나, 앞에 가는 트럭에 잔뜩 실린 유리에 반사된 햇빛을 엉뚱하게 인식하거나, 갑자기 공사 구간이 나오는 경우. 또는 가속과 감속의 타이밍이 나와 달라서 마음 졸이는 순간이 꽤 자주 생긴다는 뜻이다.
앞에서 갑자기 끼어드는 차를 내 눈만큼 인식할 수 없다는 것도 무섭다. 부산으로 가는 고속도로 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3차선에서 2차선으로 끼어들려고 하는 트럭이 방향 지시등을 켜고 S90D 앞으로 진입했다. 그러다 트럭 앞에 있는 차가 제동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트럭의 엉덩이에도 브레이크 등이 들어왔다. 그 상황을 유심히 보면서, 트럭과 나 사이의 거리를 급박하게 재면서, 오토 파일럿이 트럭의 브레이크에 언제쯤 반응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2~3초 정도였을까? 달리던 속도, 트럭과 나 사이의 거리를 감안하면 더 이상 오토 파일럿의 제동을 기대할 수 없는 거리였다. 인간이 개입해야 했다. 스티어링 휠에 두 손을 얹고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다.
몇 가지 상황을 가정할 수 있다. 오토 파일럿의 자율 주행 기능에 심취한 나머지 운전 말고 다른 일에 몰두한 운전자에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혹은 오토 파일럿 기능을 지혜롭게 활용하면서 주행 자체를 즐기던 운전자에게 갑자기 급한 문자 메시지가 와서 두세 줄의 답장을 입력하는 중이었다면? 톨게이트를 빠져나가 나선형으로 회전하는 길에서도 비슷했다. 오토 파일럿과 운전자 사이에는 감각적 합의가 필요했다. 나라면 꺾었을 타이밍에 스티어링 휠을 꺾지 않고, 심지어 속도를 줄이지도 않을 때의 순간적인 불안. 스티어링 휠이 꺾이는 순간에도 이 속도를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또 한 번의 불안이 있었다. 하지만 이 불안이야말로 인간의 것, 안전의 조건일 것이다. 오토 파일럿은 놀랍게 진보해 있지만 엄연한 기계이고, 알파고가 커제를 울려버린 시대에도 사고의 가능성은 있는 거니까. 게다가 사고의 결과는 온전히 인간이 감당할 몫이라서.
오토 파일럿의 기능에 흠을 잡으려는 게 아니다. 다만 어떤 상황에도 100% 의지해선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몇 번을 강조해도 과하지 않다. 하지만 거의 모든 주행 구간에서 오토 파일럿의 덕을 톡톡히 봤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약 400km에 달하는 거리를 달리는 동안 절반 이상을 오토 파일럿 기능으로 달렸다. 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 더러는 평소보다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앨범을 고르기도 했다. 덕분에 피로도는 평소의 절반 수준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해 천안에 있는 급속 충전소에서 배터리를 충전하고 다시 파크 하얏트 부산까지 가는 7시간을 꽉 채워 운전했을 때의 노곤함도 별로 없었다. 모델 S90D 시트의 완성도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엉덩이와 허리, 머리를 정확한 정도로 지지해 운전자와 동승자의 피로를 최소화했다. 오토 파일럿 기능이 일정 시간 이상 지속되면 테슬라도 운전자에게 알림을 보낸다. 두 손을 스티어링 휠에 얹으라는 사인을 계기판에 띄운다. 이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무시하면 주행하는 동안 오토 파일럿 기능을 다신 활성화할 수 없다. 테슬라도 같은 마음인 것이다.
오토 파일럿의 신묘한 기능 앞에서 운전자로서의 정도를 지켜달라는, 불완전한 기계로서의 당부인 것이다.
이대로 기술이 진보를 거듭하면 자동차의 개념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미래는 이미 여기에 와 있다. 단지 골고루 퍼지지 않았을 뿐이다”라는 윌리엄 깁슨의 말이 지금의 테슬라만큼 정확하게 들어맞는 경우가 또 있을까? 오토 파일럿은 이대로 진화해 완벽한 자율 주행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땐 자동차를 소유한다는 개념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볼까? 일정 금액을 내고 테슬라 모델 S90D의 자유 이용권을 구매하는 식이면 어떨까? 지금 애플 뮤직을 결제하는 방식처럼 말이다. 그 상태에서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곳으로 완전 자율 주행이 가능한 테슬라를 부를 수 있다면? 지금의 우버처럼 말이다. 이미 거의 모든 자동차 회사가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소유에서 공유로, 인간을 조금 더 자유롭게 하는 방향으로.
테슬라 모델 S90D를 갖는다는 건, 이 차의 창조자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에 기꺼이 동참하는 길일 것이다. 그건 그대로 모두의 의식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 혹은 결과일지도. 테슬라는 분명한 동시대다. 현재이자 미래이며, 그 사이에 놓인 날렵한 다리이기도 하다. 혹시 그 다리가 화성까지 이어져 있을까? 일론 머스크는 지금 화성 어딘가에서 웃고 있을까? 모델 S90D의 가격은 1억1570만원부터다. 미국에서 약 4000만원대로 알려진 모델 3은 내년 중 출시할 예정이다. 윌리엄 깁슨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피로가 가벼웠으니, 부산에선 조금 더 깊이 잠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