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방의 시대정신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중심과 변방이 뒤섞였다. 위계가 역전됐다. 날것의 재미가 찾아왔다. | 예능,세모방,지상파

한국 방송에서 타 방송사의 존재를 언급하는 건 금기에 가까웠다. 물론 옆 방송사가 사고를 쳐서 사회적 물의를 빚을 때면 뉴스를 통해 신나게 이름을 언급해주곤 했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경쟁사 이름도 모르는 것처럼 굴곤 했다. 이런 오랜 관행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한 건 탈권위와 B급 정서를 주된 무기로 삼는 여운혁 사단의 2006년작 MBC 부터였다. 출연자들이 서로를 ‘요원’으로 호칭하던 초창기 은 MBC는 ‘M본부’로, KBS는 ‘K본부’, SBS는 ‘S본부’로 부르며 조심스레 타 방송사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상대 방송사의 존재를 언급한다고 해서 갑자기 상대 방송사의 시청률이 올라가거나 평판이 좋아지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과거와 달리 이미 케이블 채널의 등장으로 다채널 시대가 완전히 자리 잡힌 마당에 불필요하게 자존심을 세우며 옆 방송사 이야기를 꺼릴 이유가 없었던 셈이다. 덕분에 방송사들은 경쟁사가 화제작을 선보일 때 은근슬쩍 묻어가며 패러디나 토크쇼를 편성해 함께 광을 팔 수 있었다.최근 들어 포맷이 살짝 바뀌긴 했지만, MBC가 새로 선보인 예능 (이하 )은 타 방송사의 존재를 언급하고 넘어가거나 패러디를 하는 수준이 아니다. 아예 과감하게 타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모셔온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방송 프로그램에 이 섭외한 스타들을 투입시키고, 프로그램의 기획부터 촬영까지 제작진이 개입하는 일 없이 모두 초대된 프로그램의 제작진에게 일임한다. 제 작진은 오로지 그 과정을 충실하게 기록할 뿐이다.3개월이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11개 방 송사의 12개 프로그램이 을 거쳐갔다. 카메라 하나 달랑 들고 출연자들을 다짜고짜 먼 바다로 끌고 가 막무가내로 방송을 시키는 리빙TV 부터, 하루 동안 콩트 두 편과 정보 프로그램 한 편을 제작해야 하는 덴탈TV의 살인적인 제작 환경을 거쳐, 사람을 웃겨야겠다는 강박 따위는 번뇌와 함께 버린지 오래된 스님들과 함께 불교TV의 를 찍고, 근본 없는 무리수가 난무하는 모바일 예능 세계에 뛰어들었다. “저기, 이거 방송 되겠어?” 출연진의 간절한 눈빛에도 제작진은 묵묵부답이다. 현장을 통제하는 건 초대된 프로그램의 제작진 몫이니까.초대된 프로그램을 대하는 의 기본자세는 ‘모든 걸 숙이고 들어간다’에 가깝다. 몽골 C1TV의 촬영 현장에서 박수홍과 남희석, 김수용은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좀체 카메라에 잡히거나 분량을 확보하지 못하지만, 은 그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거나 ‘이렇게 하는 건 컬래버레이션 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항의하지 않는다. 캄보디아 CTN 의 소페아 PD는 아예 대놓고 “이건 내 쇼이고 여기서는 내가 왕” 이라고 말했고, 그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열악한 제작 환경인 의 박기철 PD는 “이 방송에서만큼은 내 말이 법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외친다. 언뜻 출연자 보호를 위해서라도 저건 측 제작진이 개입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위화감 없이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한몸처럼 움직이는 측 출연진과 초대 프로그램 제작진을 보 며 낄낄거리게 된다. 평생 정극 연기만 해온 김재원이 덴탈TV 측의 어이없는 콩트 연기 요구에 정색하며 불편한 티를 내다가, 어느 순간 모든 걸 다 내려놓고 환자의 입 냄새에 실신하는 치과 의사 역을 혼신의 힘을 다해 소화하는 광경을 보는 재미는 이만저만이 아니다.지상파 텔레비전에서 모든 주도권을 내려놓고 현장을 온전히 타 방송사에 일임하는 프로그램은 전례가 없었다. 여전히 적잖은 지상파 프로그램은 독립 PD들이 발로 뛰어 만든 영상물을 자사의 프로그램에 인용하겠다고 접촉하면서 제대로 된 개런티를 지급하기는커녕 출처조차 제대로 표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신들이 필요한 만큼만 인용하면서 ‘지상파에서 언급해주는 게 인지도에 도움이 되니 오히려 이득 아니냐’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상파 채널과 외주 제작사 사이의 갑질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그런 탓에 군소 케이블 방송사나 지역 민방과 협업한다는 의 제작 의도는 일견 ‘그들의 콘텐츠를 우리 입맛에 맞게 활용하겠다’는 식으로 보이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한국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같이 일할 때 동등한 파트너십을 맺는 대신 갑과 을, 원청과 하청으로 그 호칭과 역할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모습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다.하지만 은 철저하게 손님으로 남음으로써 우려를 잠재웠다. 의 카메라는 마치 초대된 프로그램의 메이킹 필름을 찍는 듯 제 역할을 한정하는데, 덕분에 원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그들의 소신대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 은 그 좌 충우돌하는 제작 현장의 열기를 고스란히 챙길 수 있게 됐다. 원 프로그램 제작진이 당장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집중하는 동안 제작진은 다년간의 관찰 예능으로 쌓아온 노하우와 지상파 채널의 제작 역량을 투입해 그 과정을 다각도로 담아낸다. 편집실에서는 새롭게 맥락을 만들어낸다. 지상파 채널 특유의 채널색이나 사정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으니 MBC는 더 다양한 색깔의 콘텐츠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초대된 프로그램은 방해받지 않고 스타 연기자들을 출연시키며 스스로 더 넓은 플랫폼에서 알릴 기회를 얻는다. 힘과 덩치가 더 큰 쪽이 얼핏 한없이 불리해 보이는 듯한 계약 조건 속으로 들어가자, 비로소 양자가 동등한 파트너십을 통해서 최대의 효용을 얻는 게 가능해졌다. 주도권을 양보한 대신 다양성을 얻어 상생을 이룬 셈이다.이는 2000년대 들어 지상파 방송사들의 역할이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메타적으로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자사에서 제작의 모든 공정을 거쳐 만든 프로그램만을 방영하는 게 당연하던 시절은 이미 1990년대에 끝났다. 2000년대 들어서 지상파 방송사들은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 외주 제작사에 프로그램 제작을 맡기게 됐다. 우리가 보는 드라마와 예능의 상당수는 방송사에 소속된 PD들이 연출을 맡지만, 제작 과정 전반은 이미 외주 제작사에 일임한지 오래됐다.콧대 높은 지상파 방송이 제 담을 허물어 옆집 사람들을 마당으로 초대해 상석에 앉힘으로써 중심과 변경 사이의 위계를 의도적으로 지워내는 예능을 선보였다.콘텐츠 제작과 유통, 홍보를 모두 단일 창구를 통해 해결하는 것은 과거의 이야기다. 이제 각 파트가 세분화됐다. 대형 플랫폼을 갖춘 지상파 방송국은 점점 유통 창구로서의 역할이 더 강조되는데, 은 그 조류를 가장 투명하게 반영한 작품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콘텐츠를 자사의 주말 황금 시간대 예능에 초대함으로써 은 일종의 편집매장 성격을 띠게 됐다. 에 앞서 그 시간대를 풍미하고 시즌을 마무리한 이 다양한 콘텐츠를 자기식으로 재해석해 보여주는 형태였다면 은 큐레이팅과 유통에만 집중하는 식이다.이 더 흥미로운 것은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정면으로 부딪히는 순간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지상파 채널이나 잘나가는 유력 케이블 채널 위주로만 시청해오던 이들에게, 참선과 108배가 콘텐츠인 불교TV의 나 아이들과 대단치 않은 재능을 가지고 진지하게 대결을 펼쳐야 하는 대교어린이 TV의 같은 프로그램의 존재는 충격일 수밖에 없다. 방송에서는 표준어를 써야 한다는 서울 사람들의 상식을 가볍게 부숴버리는 제주 KCTV의 나, 어지간한 래퍼보다 빠르고 정확한 따발총 멘트로 보는 이들의 혼을 쏙 빼버리는 인도네시아 레젤홈쇼핑의 쇼호스트는 그 자체로도 현란한 볼거리다. 은 섣불리 이들이 특이하다거나 이들이 변방이어서 중앙의 문법을 못 따라온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대신 서로 다른 환경에서 방송을 하면서 생긴 차이점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가 시종일관 선보이는 노골적인 PPL은 분명 안에서 일종의 놀림거리 취급을 받긴 했지만, 은 동시에 측이 척박한 예산으로 촬영을 진행하며 다양한 즐길거리를 소개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긍정한다.이러한 태도는 언제나 주류가 중심이고 정상이며 표준이라는 주류 중심의 세계관을 살짝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웹 예능 의 출연자들은 자신의 예능 경력을 이야기하며 자신들이 선배라고 이야기하는 이경규와 박명수를 향해 ‘하지만 웹 예능은 우 리가 선배’라고 단언하고 자신들의 제작 원칙 을 설명한다. 5분 내외로 볼 수 있고, 5만원 안 쪽으로 만들 수 있는 단순하고 빠른 예능. 기존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경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당연히 월등히 선배인 이경규와 박명수는 팀의 인도를 따라 고분고분 맨손으로 볶음밥을 만든다. 네 명의 스님 중 누가 메인 MC인지 자신들도 정한 적 없어 즉답을 못 하는 불교TV 도 마찬가지다. 예능만 36년째 해온 이경규가 그 경력을 들이밀며 프로그램이 더 잘되려면 이런 부분을 고쳐야 한다고 구구절절 늘어놓지만, 스님들은 웃으면서 그래 봤자 우리는 다음 주에도 또 똑같이 할 것이라고 말을 받는다. 모든 것이 주류의 문법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고, 주류는 당대의 주류일 뿐 그것이 정답인 것도, 중심인 것도, 표준인 것도 아니라서.냉정하게 시청률만 놓고 생각한다면 지금 이 순간 보다 더 흥미로운 방송은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콧대 높은 지상파 방송 이제 담을 허물어 옆집 사람들을 마당으로 초대해 상석에 앉힘으로써 중심과 변경 사이의 위계를 의도적으로 지워내는 예능을 선보였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위계 없는 공존이라는 화두에, 예상치도 못하게 MBC가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