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배는 지금 노화도에 있다-1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네 장의 음반을 냈다. 모두 한국 대중음악상 후보였다. 각기 다른 사람이 만든 것 같은 음반이었다. 마지막 앨범의 음원은 2016년 11월 1일에 공개한 'RITUAL'이었다. 2017년 8월에는 두 장의 LP로 발매했다. 체코에서 막 도착한 앨범 다섯 장을 들고,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김성배를 만나러 전남 완도군 노화도에 다녀왔다. | 김성배,노화도

#1. 이 사람, 지금 섬에 있어요.을지로 만선호프에서였다. 재즈평론가 황덕호 옆에 호랑이 같은 남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몸도 눈도 큰 남자였다. 안구 자체가 큰 사람 같았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런 상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망막 같지 않았다. 거기엔 좀 다른 상이 맺혀 있을 것 같았다. 언뜻 보면 부리부리한데 묘하게 조심스러운 눈빛이기도 했다. 원래 숲속에 있어야 하는 사람인데 갑자기 도시에 노출된 것 같았다.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그래서 몸집은 큰데 기운이 섬세한가 생각할 때 황덕호가 말했다. “이 사람 요즘 섬에 있어요. 어디랬지? 노화도랬나?”“노화도? 거기가 어디예요? 멀리 가셨네요? 왜요? 언제요?”여름의 복판이었다. 서울이 기록적으로 뜨거웠던 날 오후 6시. 아직 해가 중천이었다. 살짝 얼어 있던 맥주잔에선 금세 물이 뚝뚝 떨어졌다. 김성배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전복 유명한 데 있어요. 거긴 전복이 흔해서 사발면에 넣어 먹고 막 그래요. 제가 좀 아팠어요. 그래서 요양 간 거죠. 지금은 괜찮아요.”그러면서 한번 크게 웃는 소리가 넉넉하게 울렸다. 온몸을 소리통으로 쓰는 사람이었다.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을지로에서 만나 한남동으로 넘어가서 주종을 바꿔가며 마셨다. 지금도 모든 장면 을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이튿날 아침엔 군데군데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었다. 김성배가 들려준 거의 모든 이야기가 그랬다.콘트라베이스 주자로 오랫동안 활동했는데 전공은 클래식 기타였고, 침례신학대학교 출신인데 가장 최근 음반은 이었다는 것. 음반에 수록된 음악은 재즈와 국악, 일렉트로니카와 한국 전통 무속음악 이 종횡으로 섞여 있고, 그대로 설치 예술이었던 무대에서 딱 한 번 즉흥으로 연주한 음원 그대로라는 사실. 인천문화재단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하다가 한국 무속 신앙에 관심이 생겼고, 그 연구가 점점 깊어지는 중에 갑자기 몸이 아팠다는 말도.“너무 몰입해서 살짝 씌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랬는지도 모르죠.”일본에서는 하루에 10km 이상 몸이 지칠 때까지 뛰어야 잠들 수 있었다. 제주도에선 요가를 했다. 노화도에서는 몇 개월째 요양 중인데, 돌이켜보면 그 시작이 김금화 만신의 세월호 추모 굿이었던 것 같다는 말 도했다. 농담과 농담, 호기심과 호기심 사이에서 한판 놀듯이 웃던 술자리였다. 그러다 그가 세월호에 대해 말하는 순간부턴 마냥 그럴 수 없었다. 이때 김성배가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지금 체코에서 제작 중이라는 LP였다. 이옥자 만신이 굿할 때 쓰는 부채가 형광 노랑, 핫 핑크, 형광 녹색으로 디자인된 재킷이었다.“너무 예쁜데요, 이 LP. 발매는 언제예요?”“모르겠어요. 곧 온다고는 하는데.”“LP 나오면 이야기 더 들려주세요. 어떻게 녹음한 음반인지, 왜 아프셨는지, 어떻게 앓으셨는지도 궁금하니까요. 뭣보다 이 앨범, 사진 찍으면 정말 예쁠 것 같거든요.”음악은 들어보기도 전이었다. 그가 유튜브에서 찾아준 영상을 봤지만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몰입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짐작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다. 그때 김성배가 했던 모든 말의 태도, 뿔뿔이 흩어져 있던 것 같은 단어의 흐름, 어떤 음악이 나왔을 때 지르던 함성 같은 것.그때부터 김성배의 앨범이 언제 배송되는지를 기민하게 확인했다. 노화도에 있던 김성배와 서울에 있는 비트볼 뮤직 사이에서 마음이 급했다. 드디어 사무실에 음반이 도착했다. 첫 물량의 제작이 끝났고, DHL로 배송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지 3일 만인 금요일이었다.주말이 지나면 다시 김성배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그는 다시 섬에 들어가 있었다. 서울에서 해남 땅끝마을까지 버스로 5시간, 거기서 항구까지 택시로 40분,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30분 정도 가야 하는 섬이었다. RITUAL의 연주 현장. 2015년 12월 12일, 인천 아트플랫폼 C동 공연장에서였다. 국악기와 양악기, 어쿠스틱과 전자음악과 무용이 거의 70% 이상 즉흥이었다.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순간의 소리가 음반에 그대로 담겼다.#2. 이 밤을 이렇게 보내는 게 옳을까?김성배의 앨범 을 턴테이블에 올렸을 때는 막 월요일로 넘어간 새벽 1시 즈음이었다.이 앨범은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파트 1은 ‘Greeting(영신)’, 파트 2는 ‘Possession(접신)’, 파트 3은 ‘Sending Message(공수)’, 마지막 파트 4는 ‘Finale(송신)’이다. 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받아들이고, 신의 목소리를 대신 전하고, 다시 보내드리는 순서였다. 굿판 형식이었다. 다양한 소리가 자유로웠다. 이 소리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명확한 음이지만 갑자기 낯설어지고, 규칙이 있는 듯 흩어지고, 정확한 것 같던 구획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졌다. 북, 징 같은 전통 타악기와 색소폰, 피아노, 콘트라베이스에 전자 음향이 섞여 있었다. 꽃분홍색 LP 를 한 번 뒤집고 파트 1과 파트 2를 듣는 동안 근육이 좀 묘하게 경직됐다. 우리 집이었는데, 누구랑 같이 경계로 내몰린 것 같았다.이 음반을 이대로 계속 들어도 괜찮을까? 옆에 있던 잡지를 보기도 하고 다른 책을 뒤적이기도 하면서 딴청을 부렸지만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식이었다. 몸보다 정신이 먼저 혹하는 시간이었다. 이대로 몽롱해지면 다른 세계를 살짝 엿볼 수 있을까? 그럼 김성배는 어디까지 다녀 왔을까? 볼륨이라도 좀 줄일 걸 그랬나?그때 재즈 평론가 황덕호의 말이 생각났다. “우성 씨,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찾아 읽어본 기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재즈 베이시스트 김성배는 2015년 12월부터 2016년 6월까지 이상한 체험 을 했다. 신병이 아니었을까.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 내림굿이라도 받았을 것이다.” 그 기사에서 김성배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돼 있었다. “6개월간 이어졌어요. 머리에서 뭐가 돌고, 허깨비가 보이고, 가위에 눌리고, 헛것이 들리고. 영화 을 봤더니 그 안에 제가 있더군요.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제가 자살 사이트에 접속하고 있었어요.”형광 녹색 LP가 파트 3과 파트 4를 재생하는 시간은 또 달랐다. 낮고 묘하고 음산한 소리, 몸보다 심장박동을 먼저 고조시키는 북소리, 갑자기 들리는 사람 목소리가 김수영의 시 ‘꽃잎’을 낭독하기도 했다. “누구 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파트 3 ‘Sending Message’의 러닝타임은 8분 33초였다. 두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끼익끼익’하고, ‘오웨에에’하는 소리가 났다. 사람 소리인지 사람과 말하고 싶은 어떤 존재의 소리인지 몰랐다. 숨소리인지 바람소리인지 말소리인지 몰랐다. 파트 4로 넘어간 건가? 현악기 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남자 목소리인지 여자 목소리인지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한국어 스캣과 프랑스어 스캣이 깃발처럼 나부꼈다. 그건 정말 한국어였고 프랑스어였을까? 듣기에 그랬는데, 그게 뭐가 중요할까? 사람 목소리를 색소폰이 곧바로 따르고 그 뒤에서 누가 뭘 때리고, 피아노 소리가 저 위에서 들릴 때 무대에선 무용수가 춤을 추고 있었을까? 어떤 소리가 사람 소리고 어떤 소리가 악기 소리일까? 이 음반의 기운은 대체 몇 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걸까? 그러다 갑자기, 그 무대에 있던 사람의 흥과 의도와 기운과 기세가 딱 정확하게 맞아서 박수처럼 깨지고 팍하고 터지는 순간을 본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눈꺼풀은 무거워졌는데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누가 불을켰나?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새벽 2시가 넘어가는 즈음이었다. 턴테이블에서 LP를 내려놓았다.그때부터는 유튜브에서 시간을 보냈다. 김금화 만신의 인터뷰와 세월호 추모 굿의 영상을 봤다. 김금화 만신과 YTN과의 인터뷰 제목은 “신과 인간의 매개자, ‘나라만신’ 김금화”였다. 인터뷰 말미에 아나운서가 올 한해 국운에 대해 물었더니 김금화 만신이 말했다.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재난이 있다가 차츰차츰 좋아질 거예요.” 23분 52초짜리 인터뷰를 차분하게 보고 나서 동영상 게시일을 보니 2014년 2월 22일이었다.김성배가 말한 김금화 만신의 세월호 추모 굿은 2014년 5월 31일, 인천 연안부두에서 열렸다. 그때 굿판에서 김금화 만신이 말했다. “이놈들아, 너희도 부모가 있었고 자식이 있지 않았겠느냐. 능지처참을 하고도 죄가 남을 이놈들 괘씸한 놈들아. 이 천하의 몹쓸 놈들아.”이젠 새벽 3시를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센트럴 시티 터미널에서 해남 땅끝마을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지금쯤 잠을 좀 자두는 게 좋았다. 하지만 이 기운 그대로는 그럴 수 없어서, 그날 밤을 조금 더 늘려보기로 했다. 이 밤을 이렇게 보낸 건 옳은 일이었을까? 질문은 가시지 않았지만.#3. 저는 딸기 요거트 스무디 주세요.노화도 항구에 내렸더니 김성배가 마중 나와 있었다.“안녕하세요! 여기 체코에서 음반이 도착했어요!”“진짜 먼 길 오셨네요. 어서 오세요. 우와, 음반. 드디어.”그때 을지로에서 호랑이처럼 앉아 있던 김성배는 몸에 편한 옷 그대로, 온몸을 소리통으로 써서 웃으면서 성큼성큼 걸어왔다. 음반을 손에 건네 받았을 때 짓던 표정은 좀 복잡했다. 반가움도 기쁨도 아니고, 회상 도 전망도 아니었다. 그 표정만으로 이 음반 전후에 그가 겪은 일의 무게를 아직은 알 수 없었지만. 김성배가 말했다.“일단 시원하게 뭐 한잔하시죠? 가까운 데 카페가 있어요.”그가 사장님한테 미리 잘 말해둔 여관의 숙박비는 하루 2만원이었다. 창밖으로 바다와 비금도가 보이는 3층 방이었다. 김성배는 “내 친구는 다 2만원이에요” 그러면서 또 껄껄껄 웃었다. 방에 짐을 부려 놓고 카페로 갔다.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고, 못 보던 사람이 걸어가면 무조건 외지인인 걸 알아보는 섬마을 카페였다.“제가 살게요. 뭐 드실래요?”“아, 전 아이스 아메리카노 좀 진하게 주세요. 고맙습니다.”“저는 딸기 요거트 스무디 하나요. 앉아 계세요.”뜨거워도 너무 뜨거운 오후였다. 김성배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그대로 맺혀 있었다. 우리는 에어컨 바람을 바로 쐴 수 있는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 눈은 여전히 부리부리했는데 확실히 평온해 보였다. 역시 그 날 거기가 서울이라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취기 때문에? 김성배가 오른 손에 들었던 딸기 요거트 스무디를 입으로 가져갈 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 힘들었을 때 얘기 다시 꺼내는 거 괴롭지 않으세요? 제가 자료를 찾다가 기사를 하나 읽었는데....” 김성배가 말했다.“그때요? 소리 때문에 그랬죠. 그때는 되게 미쳐 있었어요, 작업에. 굉장히 예민했죠. 그래서 그랬던 것뿐이지, 지금 생각해도 거의 음악에 미쳐 있었던 것 같아요. 같이 작업했던 선배도 그랬어요. 병 안 걸리면 그게 이상한 거였다고. 그 인터뷰에는 기자가 살짝 픽션을 가미한게 있어요. 힘들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어디까지가 사실이었을까? 어디부터가 과장이었을까? 사실과 과장 중에 더 아팠던 건 혹시 사실 쪽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우리는 시간을 돌려야 했다. 2001년부터 직업 연주자로 살아온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이자 네 장의 걸출한 재즈 크로스오버 음반을 만든 연출가가 왜 지금 노화도에 살고 있는지. 그 최초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옳았다. 카페 밖 항구에 거대한 배가 정박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이 작업을 하고 제가 세게 흔들렸던 건 맞아요. 하지만 이 작업 때문에 그랬다고 할 수는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어요. 다만 연관성은 있어요. 제가 국악기랑 매일 같이 있었거든요. 장구 치는 소리, 그런 소리를 오래 들으면 사람이 좀 이렇게 뭐랄까....”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장구, 꽹과리 같은 타악기 소리는 사람을 대놓고 미치게 하는 구석이 있다. 힘껏 치는 꽹과리 소리를 아주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들었던, 초등학교 수학여행에서의 사물놀이 체험에서였다. 꽹과리 팀에서 중모리, 자진모리 같은 장단을 여럿이 맞춰 칠 때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와 세상을 살짝 유리시키는 느낌. 여기가 음악의 세계라면 저기는 그대로 세속인 것 같은 감각. 규칙적인 비트의 일렉트로니카를 오랫동안 들을 때의 무아지경 혹은 유사 최면 상태라고 하면 옳을까? 어쨌든 정신이 살짝 고양된 것 같은 순간이 꽤 오래 지속됐는데 손을 멈추기는 싫었다. 감히 프로 연주자의 세계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시간을 좀 더 되감을 필요가 있었다. 일단 3년전으로.“어젯밤에 음반을 듣고 이런저런 영상을 찾아 봤어요. 김금화 만신 인터뷰도 봤는데,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재난이 있겠지만’ 했던 그 날짜가 2014년 2월이었어요. 김금화 만신 세월호 추모 굿을 봤던 건 5월 즈음 이라고 하셨죠? 혹시 그거 느끼셨어요? 대통령 바뀌고 곳곳에서 작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저도 정치에는 정말 관심이 없었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 돌아가시고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런 의문을 가지긴 했죠. 저만 그런게 아니었을 거예요. 우리가 다 그랬죠. 예술가들은 누가 왜 힘들게 사는지 표정으로도 대충 유추가 되고 그런 게 있거든요. 그러다 박근혜가 탄핵되기 전부터 그런 느낌을 받기 시작했어요. 이제 뭔가 쏟아져 나오겠구나.”본격적인 의문은 박근혜 정권부터였다. 김성배와 주변 예술가들의 여리고 예민한 촉부터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김성배가 말을 이었다.“정치와 예술을 뗄 수가 없더라고요. 박근혜라는 존재. 그리고 세월호. 그날 저는 겁이 나서 TV를 켜지도 못했어요. JTBC에서 그... 아이들을 볼 수가 없었어요. 그때 페이스북이고 뭐고 다 차단하고 스스로를 고 립시켜 버렸어요. 그때 우리는 집단 우울증 상태였던 것 같아요. 저만 그랬던게 아니라 나라 전체가. 우리집에 날벼락이 쏟아진 것 같았어요.”그때 온전히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을까? 거의 모든 개인이 무력했다. 김성배의 콘트라베이스도 무력했다.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것 같았다. 극복할 도리가 없는 좌절이었다. 그러다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 콘서트 무대에 색소포니스트 김오키와 함께 올랐다. 음악은 나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자각하는 와중이었다. 그가 말했다.“그때부터 지식, 경험을 표현해서 타인의 아픔을 같이 나눌 수 있는 게 진짜 음악이고 삶이라는 걸 조금씩 인식했어요. 무대에 올라갔을 때는 힘들었어요. 사기 치는 것 같았거든요. 분노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아이들을 어떻게 해줄 수는 없었으니까요.”분노와 무력감이 우리를 지배하던 시기였다. 화가 있는데 풀 길이 없었다. 마음이 있는데 표현할 길도 막혀 있었다. 친구들한테는 자주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있잖아,기체로 된 거대한 거인이 이렇게 한 명 한 명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아. 죽지만 않을 정도로, 숨만 겨우 쉬고 살 수 있을 정도로만 이렇게, 꾸우욱.” 달 수 있는 곳마다 노란 리본을 다는 것으로 마음이 풀릴 수 있었다면 그래도 나았겠으나. 몇 년이 지났고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상처는 그대로 상처인 거니까.2017년, 땅끝에서 또 배를 타고 들어와야 하는 그 섬에서 다시 돌이켜봐도 그때 그랬던 마음은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언제까지나 아물지 않을 상처라는 걸 이제는 안다. 소설가 김영하는 이렇게 썼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2015년 제9회 김유정문학상을 받고 쓴 수상 소감의 일부였다. 김성배가 말을 이었다.“그러다 인천에서 김금화 만신 추모 굿을 봤어요. 굿을 왜하는가.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거잖아요? 그 형식을 떠나서 그 음악과 퍼포먼스로 상대의 아픔을 치유해주고.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김성배가 마시던 딸기 요거트 스무디도. 카페 테이블 위에 물이 흥건했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애는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헤어졌다가 각자의 일몰을 보고 같이 저녁을 먹었다. 둘째 날 나눠야하는 이야기가 더 많았다. 어쩌면 더 아픈 이야기가 될 터였다. 그걸 다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