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주의자의 캐리어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리모와는 점진적 개선의 총합이다. | 캐리어,리모와

공항에서는 예외가 없다. 체크인하고 짐을 부치고 보안 검색과 출국 심사를 거쳐 비행기에 탄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입국 심사를 거치고 짐을 찾고 게이트를 나선다. 여행 전의 설렘이나 여행 후의 고단함 같은 감정보다 앞서는 건 각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기다릴 때의 지루함이다. 그 지루함은 공항에 내려 짐을 찾기 위해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섰을 때 최고조에 달한다.기다림과 지루함은 어떤 것도 보장하지 않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비행기에 짐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면 내 물건은 오지 않는다. 나의 지루함과 내 짐의 안전에는 어떤 상관관계도 없다. 내가 내 짐의 운명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은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선 사람들 모두에게 똑같다. 반바지에 플립플롭을 신은 여행객이든, 셔츠에 단정한 신사화를 신은 비즈니스맨이든 모두 그 상황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그 순간 리모와의 은빛 캐리어는 홀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컨베이어 벨트 위 견고한 형태의 리모와 캐리어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리모와 로고를 확인할 필요도 없다. “리모와의 디자인은 포르쉐 911처럼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죠.” 리모와 공동 CEO 디터 모르스첵은 자신감을 섞어 말한다. 그는 3대째 리모와라는 가업을 잇고 있다.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건 고유하다는 뜻이다. 로고나 패턴 없이 고유한 이미지를 가진다는 건 브랜드의 엄청난 자산이다. 리모와의 디자인은 공항의 보잘것없는 컨베이어 벨트마저 브랜드 전시장으로 만들 정도로 강력하다. 조명의 힘을 빌려가며 캐리어와 포즈를 취하는 모델보다 공항에서 리모와를 끌고 가는 여행자가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바쁘게 이동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공항에서 이처럼 뚜렷한 브랜드가 또 있을까?여행자는 직업이나 속성이 아니다. 일시적인 상태일 뿐이다. 리모와의 독보적인 이미지는 여행자라는 잠깐의 상태에도 신분이라는 것을 선사한다. 현대사회에서의 신분은 사실 이미지다. 리모와가 여행자에게 주는 신분의 이미지는 화려함이나 으스댐과는 거리가 멀다. 침착하고 세련되며 이성적인 느낌. 최근 럭셔리의 대안으로 떠오르며 여러 브랜드가 목표로 하는 프리미엄 이미지다. 바로 그 프리미엄이라는 신분을 리모와가 선사하는 것이다.“비즈니스 출장에선 아침에 비행기를 타고 출발해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미팅에 참석하는 일이 잦습니다. 그때 갖춰 입은 슈트에 리모와 캐리어와 함께라면 아무래도 첫인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요. 비즈니스 여행객도 프리미엄 고객이지만 레저 여행객에 비해 뚜렷한 색이나 스타일을 내기 어렵습니다. 이들에게 보기 좋고 괜찮게 디자인한 물건을 연결하려 했다는 건 고무적인 성과입니다. 루이비통은 여행과 럭셔리를 한데 엮어서 상류층 레저 여행객에게 어필했습니다. 리모와는 그보다는 덜 과시적이지만 비즈니스 여행객에게 스마트한 이미지를 투영했습니다.” 호텔 예약 전용 트래블 클럽 ‘에바종’의 CEO 에드몽 드 퐁트네의 말이 리모와의 이미지를 설명한다.어떻게 보면 리모와의 포지션은 다소 모호하다. 아주 실용적이지도, 아주 과시적이지도 않다. 양극단의 장점만을 취한 모양새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투미나 쌤소나이트보다는 과시적이다. 루이비통이나 고야드보다는 스마트하다. 리모와가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브랜드의 모토 역시 ‘수작업과 하이테크의 만남’이다. 과거와 미래의 만남이기도 하다. 과거와 미래 사이의 줄타기에 성공한 비결은 브랜드 탄생지인 독일 특유의 예리한 균형 감각이다. 방만하게 과거에 기대지 않는다. 말뿐인 혁신에 휘말려 섣불리 앞서가지도 않는다.리모와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리모와는 그 유산을 철저히 기능적으로 해석한다. 리모와의 전신인 ‘코퍼파브릭 파울 모르스첵’은 1898년 여행 트렁크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쌤소나이트보다 더 빨랐다. 1937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알루미늄 트렁크를 만들었다. 그 전통에 따라 아직까지도 알루미늄으로 만든 ‘토파즈’가 리모와의 대표 모델이다. 비행기 여행이 대중화된 1950년대를 맞아 무게 감량에 주력했다. 그 고민은 2000년의 ‘살사’ 라인에 그대로 녹아 있다. 어떤 브랜드는 브랜드의 유산을 감성적으로만 소비하며 무의미하게 라인업을 넓힌다. 리모와의 라인업은 그에 비하면 지나칠 만큼 단순하다. 그만큼 자기 검열에 엄격하다.써본 사람은 가치를 아는 리모와 멀티휠 시스템. 부드러운 감촉과 튼튼한 내구성. 이 바퀴를 굴려보기만 해도 리모와의 비싼 값을 이해할 수 있다. 써본 사람은 가치를 아는 리모와 멀티휠 시스템. 부드러운 감촉과 튼튼한 내구성. 이 바퀴를 굴려보기만 해도 리모와의 비싼 값을 이해할 수 있다.평소에는 납작하게 눕도록 설계된 손잡이, 로고 부분을 당기면 별도로 짐을 체결할 수 있는 손잡이. 사용자와 환경을 고려한 디테일. 평소에는 납작하게 눕도록 설계된 손잡이, 로고 부분을 당기면 별도로 짐을 체결할 수 있는 손잡이. 사용자와 환경을 고려한 디테일.리모와의 진가는 돌출 표면이 아니라 내부의 인터페이스에 있다. 눌러 담아야 할 짐, 따로 담아야 할 짐, 나눠 담아야 하는 짐, 리모와의 수납 방식은 실로 사려 깊다. 리모와의 진가는 돌출 표면이 아니라 내부의 인터페이스에 있다. 눌러 담아야 할 짐, 따로 담아야 할 짐, 나눠 담아야 하는 짐, 리모와의 수납 방식은 실로 사려 깊다.4TSA 록이라는 규정을 받아들인 동시에 코퍼파브릭 파울 모르스첵 시절의 전통적 디테일을 살린 모습. 리모와가 구현한 과거와 미래 사이의 무게중심. 4TSA 록이라는 규정을 받아들인 동시에 코퍼파브릭 파울 모르스첵 시절의 전통적 디테일을 살린 모습. 리모와가 구현한 과거와 미래 사이의 무게중심.리모와에게는 소재가 중요하다. 소재야말로 리모와의 과거이자 미래다. 홈페이지에서도 특정 제품의 모델명보다 소재를 기준 삼은 구분법을 먼저 내세운다. 그 구분법에 따르면 리모와 제품은 소재에 따라 크게 두 종류다. 알루미늄 라인과 폴리카보네이트(열가소성 플라스틱의 일종) 라인이다. 일루미늄 라인을 개발하고 새로운 모델이 나오기까지는 50년이 걸렸다. 50년 후의 신모델인 ‘살사’ 역시 소재를 기반으로 만들었다.현 리모와 CEO 디터 모르스첵은 알루미늄 트렁크를 개발한 아버지에 이어 폴리카보네이트 캐리어를 만들었다. 그는 ‘살사’ 라인의 탄생을 이렇게 기억한다. “벨기에의 합성수지 장인이던 친구 만프레트가 망치를 주면서 가로등 덮개를 내리쳐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쳐도 깨지기는커녕 찌그러졌다가 원상태로 돌아오더군요. 이것이야말로 미래의 소재라고 확신했습니다.”미래의 소재, 미래의 물건은 무엇일까? 물건을 어떻게 만들면 사람들에게 미래를 제안하고 미래를 보여줄 수 있을까? 개선. 리모와의 답이다. 리모와는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았던 소재로 여행 가방을 만들었다. 이미 있는 것을 더 낫게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하다. CEO 디터 모르스첵이 언론과의 인터뷰 때마다 말하는 제조 철학이 있다. “모든 제품에 개선할 수 있는 여지는 항상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처럼 겉으로는 별 변화가 없어 보이는 리모와의 캐리어도 점진적인 개선의 총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리모와식 개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기능적 개선을 위한 디자인. 예를 들면 폴리카보네이트 소재 라인에서 확장되는 모델은 기본 모델의 변형이거나 두 가지 모델의 재조합이다. 림보는 폴리카보네이트 본체에 토파즈의 합금 프레임을 적용해 접합 부분을 강화했다. 살사 디럭스 하이브리드는 같은 본체에 패브릭 소재의 전면 포켓을 갖췄다. 지금은 눈에 띄는 디자인이 범람하는 시대다. 리모와는 그 안에서 눈에 띄는 디자인을 하는 게 아니라 기능에 충실한 방향으로 디자인을 조금씩 개선한다.둘째는 아주 공들인 개선이다. 업계 표준으로 자리매김할 정도로 정밀한 개선. 대표적인 예가 리모와 멀티휠 시스템이다. 기존의 여행 가방은 두 바퀴 굴림 방식을 고수했다. 리모와는 네 바퀴 굴림 방식을 도입해 각각의 바퀴를 원하는 방향으로 쉽게 돌릴 수 있도록 했다. 리모와가 업계 표준이 되겠다는 강한 의지 때문에 한 일이 아니다. 시대가 지날수록 공항의 규모가 커진다. 여행객들의 환승도 늘어난다. 이동할 때 힘이 덜 드는 여행 가방은 시대의 수요다. 리모와는 시대적 요구를 빠르게 읽어냈을 뿐이다.리모와에는 과잉 스펙이 없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정도로만 개선한다. 디터 모르스첵은 늘 스스로에게 묻는다. “캐리어를 제작할 때 대부분 과잉 설계합니다. 결국 몹시 무거워지죠. 캐리어 바퀴에 복잡한 제동 시스템을 고안했다고 칩시다. 제품이 1kg 더 무거워졌어요. 그때 제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사용자가 원하는 높이로 조절할 수 있는 손잡이나 내부 공간을 유연하게 구성하도록 돕는 플렉서블 디바이더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꼭 필요한 기능을 넣는다. 사용자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하게 개선한다. 이 정도라면 리모와의 개선은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고 봐도 되겠다.우연히도 리모와의 사용자 역시 리모와를 개선한다. 리모와라는 브랜드의 개선이 기능적 개선이라면 사용자의 개선은 심미적 개선이다. 사람들은 리모와의 외관에 곧잘 스티커를 붙인다. 리모와의 디자인이라고는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진 자그마한 홈뿐이니, 사용자가 스티커를 붙이는 건 일종의 자발적 개선으로 볼 수 있다. 모든 여행 가방에 스티커를 붙일 수 있지만 유독 리모와 사용자에게서 스티커 문화가 두드러진다.여행 가방에 스티커를 붙이는 문화는 아주 간단하게 물건의 가치를 극대화시킨다. 캐리어에 붙어 있는 스티커는, 스티커를 뗀 흔적과 매직으로 대충 써 내려간 글귀까지, 아무런 질서가 없으니 그 가방의 주인만이 해독할 수 있는 개인의 기록이다. 때론 치기 어리기도, 때론 엉성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빈틈없이 단단한 리모와의 만듦새와 대비되며 묘한 조화를 이룬다.리모와에 스티커를 붙이는 문화는 물건에 개인의 역사를 새기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그 마음은 세대와 시간을 초월한다. 여행을 웹에 기록하고 공유하는 인스타그램 세대도, 오랫동안 리모와의 진가를 체험하고자 하는 이들도, 개인의 역사를 잇고자 하는 마음은 같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풍미가 더해지는 와인을 모두 좋아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