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맛 떨어진 세상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한국인의 주식은 더 이상 밥이 아니다. 입맛이 변해서가 아니다. | 쌀,밥

“쌀 1kg에 12만원, 최고가에도 완판.” 이는 얼마 전 한 공중파 뉴스에 등장했던 헤드라인이다. 뉴스는 도쿄 긴자에 위치한 쌀을 주제로 한 다이닝 라이프스타일 숍 ‘아코메야’에서 시작한다. 일본 전역에서 수확한 다품종 쌀을 판매하는 아코메야는 쌀을 초콜릿, 커피, 와인 다루듯이 한다. 쇼케이스에 진열하고 450g씩 소량 포장하여 판매하며, 기호에 맞는 쌀을 고르도록 쌀 소믈리에가 매장에 상시 대기하고 시식도 가능하다. 한편 1kg에 12만원을 호가한다는 쌀을 들여다보니 다음과 같다. 최고 등급의 쌀을 원두에서 결점두를 걸러내듯 손으로 일일이 솎아낸 후 현미의 영양과 백미의 밥맛을 동시에 구현한다는 특수 도정기로 찧는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쌀’로 에 등재된 이 쌀은 지난해 출시한 530세트가 모두 판매됐다고 한다. 여기까지 들으면 일본 쌀 시장은 전망이 꽤나 밝은 듯하지만 실제는 일본도 쌀 시장이 급격히 위축 감소하는 추세다. 일본 농림수산성은 올해 쌀 생산량 목표를 전년 대비 8만 톤 적은 735만 톤으로 결정했다. 이는 매년 8만 톤씩 감소하는 수요 추세를 고려한 결과라고 한다. 식재료가 다양해지면서 주식이던 쌀의 수요가 줄어드는 현실을 일본도 피하지 못하는 것. 일본은 이러한 농업의 위기를 고급화 전략으로 타개하고자 고군분투 중이다.일본과 같은 쌀 소비국인 우리나라는 어떨까. 몇 해 전부터 쌀밥이 더 이상 주식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얘기가 들려온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양곡 소비량 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국민의 하루 평균 쌀 소비량은 172.4g으로 전년보다 3.3% 줄었다. 보통 한 공기에 들어가는 쌀이 100g 내외인 점을 고려하면 하루에 쌀밥으로 두 공기도 먹지 않는 셈. 30년 전과 비교하면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이 반 토막 났다. 실제로 대형 마트에서 빵 매출액이 쌀을 앞지르기도 했다. 2015년 말 이마트가 발표한 매출 분석 결과에 따르면 일반 쌀이 15위를 기록한 반면 빵류는 10위를 차지하며 순위가 역전됐다. 특히 쌀 매출 순위가 2013년 7위에서 2014년 9위에 이어 6계단이나 하락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면 수요에 따른 생산도 줄어들었을까? 올해 쌀 생산량은 400만 톤 미만으로 1980년 이후 최소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는 지속적인 재배 면적 감소와 정부의 적정 생산 유도 정책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결과다. 하지만 그럼에도 쌀 재고량은 증가하는 추세다. 2015년 기준 정부 양곡 재고는 190만 톤이 넘었다. 이는 유엔식량농업기구가 고지한 적정 수준인 80만 톤의 2배가 넘는 양이다. 쌀이 남는 것도 문제지만 재고 쌀을 보관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쌀 10만 톤을 보관하는 데 연간 약 316억원이 든다니, 계산해보면 한숨만 나온다.이야기를 이렇게 전개하면 누구나 양보다 질로 승부하는 고급화 전략을 떠올릴 터. 실제로 국내 농업 기술과 품종 개발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여기에 뛰어난 전기 압력 밥솥 개발 기술도 든든하게 힘을 실어준다. 1980년대만 해도 일본에서 조달하던 밥솥을 현재 우리나라가 역수출하고 있지 않은가. 하드웨어가 모두 갖춰졌으니 우리도 맛있는 밥을 먹어 마땅하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어쩌면 밥맛을 아예 포기하고 사는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사회가 꿈꾸는 미래가 ‘밥맛 나는 세상’이겠는가. 필자만 해도 결혼 초기 밥을 지어 먹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즉석밥으로 갈아탔다. 편리성은 물론, 즉석밥의 맛이 직접 지은 밥보다도 괜찮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집에서 밥을 먹는 경우보다 밖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나는 대부분의 식사를 해결하는 식당들이 우리로 하여금 밥맛을 포기하게 하는 데 한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식사를 주문하면 스테인리스 공기에 꽉꽉 눌러 담은 후 그대로 보온밥통에 넣어둔 밥을 내준다. 언제 지은 건지 군내가 나고, 언제부터 갇혀 있었는지 비릿한 금속 내가 나는 밥. 그런 밥을 매일 먹게 되는 이상 밥을 간간한 반찬을 먹기 위한 보조적 음식이거나 포만감을 더해주는 음식으로 여기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그렇다고 밥의 격을 떨어뜨린 원인을 식당 사람들에게 따질 수는 없다. 물론 그들이 밥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쌀부터 틀렸기 때문이다. 물론 쌀이 틀렸다고 해서 화살을 농부들에게 돌리는 것도 번지수가 틀린 격이다. 농부는 죄가 없다. 궁극적인 책임은 유통에 있다. 대부분 농가는 미곡 종합 처리장과 계약재배를 한다. 그리고 재배한 쌀의 반입, 선별, 계량, 품질 검사, 건조, 도정은 물론 제품 출하, 판매에 이르는 전 과정을 미곡 종합 처리장이 담당한다. 미곡 종합 처리장은 농가의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고 관리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등장했다. 농촌진흥청은 고품질 쌀을 생산하는 결정적 요인을 건조와 저장에 둔다. 고품질 쌀 생산 핵심 요인 기여도는 건조 및 저장이 24%, 완전미 비율과 품종 혼입이 각각 20%, 질소비료 사용과 품질관리 제도가 각각 18%를 차지한다. 고로 벼 수확 후 관리에 해당하는 미곡 종합 처리장이 쌀 품질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셈이다. 그런데 현재 국내 미곡 종합 처리장 중 제대로 된 인식과 시설을 갖춘 곳이 드물며, 그마저도 쌀 시장 붕괴로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장기적 안목을 가질 수 없는 노릇. 미곡 종합 처리장은 계약 농가에서 거둬들인 다양한 품종의 쌀을 분리 보관, 유통하기보다 한데 섞어 보관, 판매한다. 그 속에는 품종과 질이 제각각인 쌀이 섞여 있거니와 묵은 쌀과 수입 쌀이 없으리라고 안심할 수도 없다.밥의 격을 떨어뜨린 원인을 식당 사람들에게 따질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 쌀부터 틀렸기 때문이다. 화살을 농부들에게 돌리는 것도 번지수가 틀린 격이다. 궁극적인 책임은 유통에 있다.올 초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이 실시한 양곡 표시 이행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단일 품종으로 표시된 쌀이 26%에 불과했다. 이는 집에 있는 쌀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즉 우리가 가족의 건강을 생각하며 고른 쌀이 혼합미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쌀을 고를 때 무엇을 고려하는가. 우선 햅쌀인지 보고 ‘임금님표 이천쌀’, ‘대왕님표 여주쌀’, ‘오리쌀’, ‘우렁이쌀’ 등 익숙한 이름을 확인한 후 가격이 적당한 제품으로 최종 결정한다. 물론 용량은 10kg 단위. 대부분의 사람이 이러한 의식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터. 식구가 단출하지만 쌀을 대량 구입하여 상온에 두고 몇 달씩 먹는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이 있는데, 쌀은 신선 식품이다. 수분 함량이 적어 쉬이 상하지는 않지만 지방 산화로 묵은내가 나고 맛이 저하된다. 그런데 쌀을 구성원 수가 배로 많고 끼니를 해결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던 부모 세대의 관습대로 소비했으니 밥맛이 떨어질 수밖에. 특히 여러 품종이 섞인 혼합미는 낱알의 질과 상태가 들쭉날쭉할 뿐 아니라 물의 양 등을 쉽게 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품종마다 크기, 굵기, 찰기, 수분량이 달라 밥 짓는 법을 달리해야 하는데, 여러 품종이 섞여 있으니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즉석밥은 저온 창고에 보관한 쌀을 도정하자마자 취반하여 밀봉하니 맛있을 수밖에. 그런데 나는 4년 동안 애용해온 즉석밥을 최근 끊었다. 그 이유는 즉석밥을 제조할 때 취반한 후 식혀 용기에 담지 않고, 용기째 가열하여 취반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안전성이 확보된 소재라고 하더라도 영 찜찜했다. 그리하여 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밥을 미식의 영역에서 배제한 배경이 몹시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 해답을 지난 10월 토종 쌀을 주제로 한 프로젝트 ‘먹는 게 예술이다. 쌀’을 총괄 기획한 보안여관 최성우 대표에서 찾을 수 있었다.“조선 시대 1500여 종에 이르던 토종 벼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부분 자취를 감췄어요. 토종 벼의 끈질긴 생명력에 농민들의 노력이 더해진 결과 150여 종이 겨우 살아남았는데, 박정희 정권을 거치며 그것마저도 거의 다 멸종됐어요.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 소원이 ‘잘 먹고 잘사는 나라’였는데 그 첫 단추로 쌀의 자급자족을 이루는 데 혈안이 됐죠. 그래서 필리핀 쌀과 교배해 토종 벼보다 생산량이 5~6배 많은 품종을 개발했는데, 그게 바로 통일벼였어요. 당시 ‘통일벼로 통일하고 유신벼로 유신하자’는 구호와 함께 정부의 감시 속에서 농민들은 통일벼를 심을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문제는 통일벼가 생산성은 뛰어나나 밥맛이 너무 떨어진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때부터 사람들은 정떨어지는 상대에게 ‘밥맛 없는 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죠.” 실제로 통일벼는 우수한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밥맛이 나쁘고 저온에 약하다는 이유로 1992년 정부가 쌀 수매 대상에서 제외시켰다.“농부들과 얘기하다 보면 유신 정권 이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쌀과 밥을 대하는 태도가 지금 같지 않았음을 알 수 있어요. 장흥에 사는 한 농부는 농사 지어 맛 없는 밥을 먹으려니 부모와 단절되는 기분이 들어 산속 다랑이 논에 몰래 토종 벼를 심었다고 해요. 어디 이게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겠어요?” 얼마 전 SNS상에 공개된 조선 시대 밥상 사진이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커도 너무 큰 밥그릇과 국그릇 때문이었다. 조선 시대 성인 남성의 한 끼 분량은 1.2L였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양이다. 가히 ‘밥심’이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싶었다. 이는 밥을 제외하고 영양분을 보충할 식재료가 부족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바이기도 하겠지만, 그 시대에는 그만큼 밥맛이 좋았다고도 한다. 중국 청나라에서 조선의 밥 짓기를 ‘밥알에 윤기가 있고 부드러우며 향긋한 데다 솥 안의 밥이 고루 익어 기름지다’고 칭찬하기도 했다.우리에게 과거 밥이 품었던 격을 되찾을 마지막 기회가 남았는지도 모른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10월 고품질 쌀 등급 표시제를 위한 양곡관리법 시행규칙 일부 개정령을 공포했다. 쌀 등급 중 전체 물량의 70%를 차지하는 ‘미검사’를 삭제하고 등급 표시와 함께 완전미 비율을 높여보자는 취지다. 이에 따라 더 이상 쌀 등급란에 ‘미검사’를 표시할 수 없으며, 쌀의 질을 따져 특, 상, 보통, 등외로 의무 표기한다. 판별 기준은 완전립으로, 쌀알이 깨지지 않고 투명할수록 높은 등급에 속한다. 최근 한식 레스토랑의 수장이 됐으며 개인적으로 쌀 작목반을 운영하기도 하는 강레오 셰프는 쌀 등급 표기 의무화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등급 표기 의무화를 시작으로 소비자들의 인식이 점차 바뀔 거라고 예상합니다. 지금까지 지역을 보고 쌀을 골랐다면 앞으로는 품종과 등급을 보고 쌀을 고르는 문화가 정착하지 않을까요? 한때 쌀이 건강의 적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는데, 이는 위험한 발상일 수 있습니다. 밥을 멀리하고 그만큼의 포만감을 채우기 위해 육류나 가공식품을 섭취한다면 더 큰 질병을 야기할 수 있지요.” 강레오 셰프는 등급과 품종을 우선 확인하라고 귀띔한다. 일반적으로 완전미가 90% 이상을 이루는 특등급 쌀을 고른 후 기호와 용도에 따라 품종을 택한다. 현재 농촌진흥청이 선별한 최고 품질 쌀은 삼광, 운광, 고품, 호품, 칠보, 하이아미, 진수미, 영호진미, 미품, 수광, 대보, 현품, 해품, 해담쌀, 청품 등 총 15종이다. 그 외 일본 도입 종인 추청과 고시히카리도 있다. 겨우내 이 쌀을 모두 맛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에 훈기가 돌고 입에 침이 고인다. 물론 도정 일을 꼼꼼히 따지고 소량 구매하여 쌀을 묵히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