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TV 속 신입 없는 세상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요즘 TV에서 신인 MC를 볼 수 없는 누추한 이유가 있다.

“요즘은 TV에서 30대 초반인 메인 진행자를 보기 어렵잖아요? 생각해보면 유재석이나 강호동, 신동엽 모두 30대 초반에 톱 자리에 올랐는데.” 잘 익은 목살을 입안에 넣으려던 나는 잠시 젓가락질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연말 송년회 자리였고, 말을 꺼낸 지상파 라디오 PD는 나와 엇비슷한 연배였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PD도, 프로그램을 비평하는 글쟁이도 30대인데 왜 메인 MC 중엔 30대 초반인 사람이 별로 없을까? 그의 말이 맞다. 오랜 무명 시절을 거쳤다고는 하나 유재석이 메인 MC로 명실공히 A급 자리를 굳힌 건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던 2000년, MBC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을 통해서였다. 씨름과 콩트 코미디에서 이미 한 번씩 최정상을 찍었던 강호동이 A급 MC가 된 건 서른셋, MBC <강호동의 천생연분>을 찍기 시작한 2002년이었다. 번뜩이는 천재성으로 무명일 틈도 없이 1990년대 예능판을 뒤흔들었던 신동엽까지 가면 입이 아프다. SBS <기쁜 우리 토요일>로 메인 MC가 된 게 그의 나이 스물넷인 1994년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오늘날 방송가를 주름잡고 있는 1970년대생들에게 뭔가 특별한 게 있어서 이들이 유달리 일찌감치 재능을 드러낸 걸까?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도 아니다. 임백천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활발하게 MC 경험을 쌓으며 오늘날의 자리에 올랐고, 임성훈이 KBS <가요톱10> MC를 맡은 것도 서른한 살이었다. 스물여덟에 MBC 라디오 PD로 입사해 그 이후 근 40년에 걸쳐 한국을 대표하는 DJ로 활약했던 고 이종환 같은 예를 제하더라도 20대에 데뷔해 커리어를 쌓다가 30대 초반쯤 메인 MC로 데뷔전을 치르는 것이 오늘날 A급 MC의 보편적인 커리어다. 그러면 지금의 20~30대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미간에 자잘하게 주름을 잡으며 생각해봤지만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에 A급 MC가 된 사람들이 2017년에도 여전히 A급 MC 자리에 있다. 누가 있지? 누가 있더라? “승한 씨, 고기 타요.” 너무 익다 못해 크기가 절반 넘게 줄어든 목살이 불판 위에서 애처롭게 타고 있었다.

물론 30대에 A급 MC 자리에 근접하게 간 사람이 영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박지윤과 전현무는 30대 중반 무렵에 A급 MC의 자리에 올랐고, 노홍철과 유세윤 또한 각자 사건·사고 이후 부진하지만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A급 MC의 자리에 근접했다. 솔로 데뷔 전에 이미 신동엽과 함께 KBS <해피투게더>를 진행했던 이효리 같은 사례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벌써 5~10년 전 이야기다. 전현무는 40대가 되었고, 40대를 바라보고 있는 박지윤은 TV조선 <내 몸 플러스> 하나 말고는 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없다. 노홍철과 유세윤이 예전과 같은 자리에 올라갈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리고 이효리는 빌딩 숲을 떠나 제주에서 요가를 수련하는 중이다. 그러면 지금의 30대들은 대체 어디 있는 걸까? 소속사 SM C&C의 지원을 받으며 꾸준히 기회를 얻고 있지만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는 이특과 김희철이 서른다섯, MBC <무한도전>의 말석에 진입한 지 2년 남짓 되어가는 양세형이 서른셋이다. 예전처럼 이른 나이에 기회를 얻어서 30대 초반에 안정적으로 메인 MC 자리에 오르고, 30대 중반쯤 자신의 이름을 건 프로그램을 맡아 A급 MC 자리를 굳히는 연예인은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된 걸까? 헤아려보면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연예 산업이 고도화되기 전에는 KBS <대학개그제>나 <캠퍼스 영상가요> <비바 청춘>처럼 방송인을 꿈꾸는 이들이 대학생이나 고등학생 신분으로 TV에 출연해 끼를 뽐낼 수 있는 창구가 적지 않았고, 경쟁이 지금보다는 덜 치열했다. 유재석이나 정선희, 김경호 같은 이들이 정식 데뷔 이전에 이미 KBS <비바 청춘>을 통해 방송 맛을 봤으니까. 게다가 신동엽이 앞장서 예능인들의 처우 개선을 꾀하며 개런티를 비약적으로 높이기 전까지만 해도 예능 프로그램 MC들의 개런티는 그리 높지 않았고, 위험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 시절이었기에 방송사들도 모험을 걸기 수월했다.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MC로 육성되던 연예인 중 대부분은 특정 방송사 전속으로 소속되어 있었고, 지상파 방송사들은 자신들이 뽑은 인재를 쓸 만한 방송인으로 키우기 위해 모험을 망설이지 않았다. 방송사라고 해봐야 AFKN까지 5개밖에 없던 시절이었으니, 아무리 채널 경쟁을 해도 지금보다는 더 여력이 있었던 것이다.

미디어가 모험을 망설일 이유는 많다. 하지만 언제까지 검증된 사람만 쓰면서 새 사람을 키우는 일을 망설일 것인가. 새로운 피가 돌지 않는 업계는 그게 어디든 천천히 늙어가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

지상파 채널들이 뽑아놓은 공채 코미디언들을 어찌 운용하면 좋을지 몰라 헤매고, 그 사이 CJ E&M과 ON 미디어가 덩치를 불리며 지상파를 위협하는 존재로 급부상한 2000년대 중반부터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라 전체가 IMF 관리 체제를 극복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체감 경기는 좀처럼 1997년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다시 10여 년이 지난 2008년 불어닥친 국제 금융 위기의 여파는 모두에게 허리띠를 조일 것을 강요했다. 섣불리 모험을 하는 이들은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고, 모두가 안정을 찾아 몸을 사렸다. 방송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시청률은 급성장한 케이블 채널들과 나눠 먹어야 하고, 광고 수익은 인터넷, 모바일과 나눠 먹어야 했던 지상파 방송사는 ‘돈 안 되는 프로그램’을 거침없이 줄이기 시작했다. 프로그램 자체가 시청률 때문에 휙휙 날아가는 마당인데, 아직 진행에 능숙하지 않은 연예인을 데려다가 MC로 키우기 위해 기회를 준다는 발상이 통할 리가 없었다. 이미 일정 정도 팬을 확보해 화제와 시청률을 노려볼 법한 아이돌 가수나 배우의 MC 도전이 화제가 될 수는 있어도, 새로 발굴한 뉴 페이스가 턱 하고 MC 자리에 앉는 일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검증된 MC, 이미 A급 MC가 된 이들이 계속해서 기회를 얻고 또 얻었다.

그나마 돈이 도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조차 이런 마당에, 사회 전반이야 말할 것도 없다. 신입 사원을 뽑으면서도 해당 분야 경력이 있는 사람을 우대한다는 웃지 못할 채용 공고가 난무하는 시대, 20대는 경력이 없어서 경력을 쌓지 못하는 말장난 같은 상황에 갇혔다. 아직 30대 중반인 나로서야 자리를 좀처럼 내주지 않고 젊은이들의 언어를 가로채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려 드는 ‘영포티’를 흉보면 만사가 편하겠지만,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IMF 관리 체제와 국제 금융 위기를 경험하며 젊은이들이 일찌감치 취업에 성공해 수입을 올리고 가정을 꾸려서 2세를 보는 일이 어려워지기 시작하자, 한국 사회는 급격하게 노화 과정을 걷기 시작했다. 1980년 21세였던 중위 연령(총인구를 나이순으로 세웠을 때 정 가운데에 있는 사람의 연령)이 2017년엔 41.8세로 급상승했다. 1980년 중위 연령을 차지했던 베이비 붐 세대는 여전히 한국 경제의 실권을 쥐고 사회 각계의 채용과 투자를 담당하고 있고, 몇 차례 위기를 경험한 이들은 이제 20~30대를 중책에 기용해 월급을 주며 경험을 쌓게 하는 식의 모험을 최대한 피하려 든다. 40대들은 말 그대로 40줄에 들어서도 여전히 계속 허리 역할을 담당해야 하고, 불과 십수 년 전이었다면 사회 각 분야의 실무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30대 중 상당수는 오늘날 고용 불안정에 시달리고 있다. 누군가를 탓하고 싶은데, 막상 둘러보면 사연 없는 무덤이 한 기도 없다.

정작 현장에서 뛰고 있는 40대 중 많은 수는 자신의 뒤를 이을 이들이 빨리 올라와줘야 한다는 걸 안다. “내가 있는 게 지금은 너희들한테 든든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있는 것이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더 펼치지 못하게 막는 거야. 내가 있어서 너희들은,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 중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능력을 쓰지 않고 있는 것뿐이야.” 유재석이 <무한도전> 300회 특집에서 하하와 노홍철을 앉혀놓고 자신 없이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시절을 준비하라고 조언했던 게 2012년,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마흔하나였던 유재석은 어느덧 마흔여섯이 되었는데, 여전히 유재석의 자리를 위협할 만큼 치고 올라오는 이가 없다. 유재석은 무명 시절 크고 작은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며 시행착오를 쌓은 끝에 A급 MC가 되었지만, 이제 시행착오를 쌓을 수 있을 만큼 실패한 이후에도 기회를 거푸 받는 이들이 없는 것이다. 유재석처럼 범인이 차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는 게 좀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2017년은 내가 칼럼니스트로 데뷔한 지 10주년 되는 해지만, 2017년에도 나는 여전히 업계 막내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미숙한 글을 쓰면서도 지면 위에서 성장할 기회를 누렸지만, 10년 전의 나보다 배로 글을 잘 쓰는 오늘날의 20대들은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수년째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는 ‘언시생’ 처지에 머물러 있다. 내 뒤로는 새로운 막내의 등장 자체가 끊기다시피 한 세상, 나는 TV 비평이라는 업계가 10년 뒤에도 존속은 할지를 근심한다.

모험을 망설일 이유야 많을 것이다. 경기는 좀처럼 풀릴 줄 모르고, 사회 각 분야에서의 경쟁은 어찌나 치열한지 이제 경쟁이란 단어 앞에 ‘생존’이라는 말이 붙지 않으면 그리 치열해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그런 마당에 일이 서툰 이들을 고용해서는,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해도 좋으니 차근차근 내실을 쌓으며 성장하라고 독려하는 건 좀처럼 쉽게 결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검증된 사람만 쓰면서 새 사람을 키우는 일을 망설일 것인가. ‘경력이 풍부한 신입 사원’과 같은 상상 속의 존재를 찾느라 모험을 망설이는 동안 사회 전반에 걸쳐 신입이란 존재가 사라져간다. 새로운 피가 돌지 않는 업계는 그게 어디든 천천히 늙어가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 2018년이라고 그간 안 풀리던 경기가 갑자기 나아지는 기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지금, 서툰 표정으로 헤매는 이들을 거두어 기회를 주는 미친 모험을 저지를 때다.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요즘 TV에서 신인 MC를 볼 수 없는 누추한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