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mm
Jaeger Lecoultre
예거 르쿨트르는 ‘마스터 울트라 씬’이라는 라인업 아래 꽤 많은 시계를 두고 있다. 시간만 보이는 것에서부터 퍼페추얼 캘린더까지 있다. 그중에서는 이 시계처럼 ‘울트라 씬’이라 부를 정도로 얇지는 않은 것도 있다. 상관없다. 울트라 씬의 확실한 기준은 없다.
이 시계가 얇아 보이는 것만은 확실하다. 디자인 덕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케이스의 주된 테두리를 얇게 만들고 그 위아래로 조금씩 무브먼트를 감싼 테두리가 튀어나오도록 한 덕분이다. 예거 르쿨트르는 기능과 두께의 절묘한 선을 찾아냈다. 이 시계는 5년째 예거 르쿨트르의 스테디셀러다.
9.15mm
Blancpain
화이트 골드를 부드럽게 가공한 케이스, 파란색 래커를 덧칠하고 촘촘하게 선을 파서 장식한 다이얼, 나뭇잎 모양으로 다듬고 살짝 굴곡까지 준 시침과 초침, 두께가 2.62mm에 불과한데 메인스프링이 2개라 동력 잔량이 100시간이나 되는 자사 무브먼트. 그러고도 더 낮은 스펙의 다른 브랜드보다 저렴한 가격.
블랑팡의 시계를 보다 보면 “왜 이 좋은 걸 다 숨기고 있는 거예요?”라고 물어보고 싶어진다. 세공과 전통, 소재와 기술 모두 최상급이지만 블랑팡은 눈 쌓인 겨울 산처럼 조용하다. 산속의 먼지 하나 없는 공장 안에서 아무 말 없이 시계를 만들 뿐이다.
7.13mm
Chopard
오늘의 시계는 모두 정장에 차는 ‘드레스 워치’다. 엄격하게 굴면 셔츠 소매 안에 들어갈 정도로 얇은, 골드 케이스에 가죽 줄을 달고 핀 버클로 마무리한 게 정통파 드레스 워치다. 지금은 어디에 아무 시계나 차도 상관없는 21세기지만 이런 규칙이 있긴 있다.
쇼파드 같은 고급 브랜드는 얇은 드레스 워치의 전통을 놓지 않는다. L.U.C XPS는 쇼파드가 자랑해 마땅한 전통이다. 케이스 두께가 7.13mm밖에 안 되는데도 태엽을 감을 필요가 없도록 로터(무게추)를 달았다. 특히 간결하고 단아한 다이얼 구성. 그야말로 명가의 자신감이다.
6.6mm
Cartier
시계 라인업을 하나 새로 만드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말이 라인업이지 디자인부터 마케팅까지 생각하면 거의 새로운 브랜드를 추가하는 거라고 봐도 된다. 까르띠에는 그 일을 척척 하고 있다. 2016년에는 새로운 남성용 드레스 워치 라인업인 드라이브 드 까르띠에를 출시했다.
지금 보시는 시계는 2017년에 발표한 드라이브 드 까르띠에의 얇은 버전인 엑스트라-플랫이다. 본격적인 드레스 워치라면 얇은 버전을 갖춰야 한다는 점에서 정도를 걷는다고 볼 수 있다. 괜히 예물의 3대 명가 ‘오롤까’가 아니다. ‘오롤까’ 중 얇은 걸 찾는다면 이 시계를 차면 된다.
6.36mm
piaget
얇은 무브먼트 부문에서는 피아제가 최고다. 지금 시계에 들어간 1203P는 두께가 3mm인데 오토매틱 로터에 날짜 표시 기능까지 있다. 쇼파드 L.U.C 96.01-L은 날짜 표시 기능이 없지만 1203P보다 0.3mm 두껍다. 고급 시계는 0.3mm 단위를 경쟁하는 세계다.
피아제는 1957년부터 알티플라노를 선보였다. 그때부터 얇은 시계 부문 최고였다. 이 시계는 2017년에 나온 알티플라노 60주년 기념판이다. 진한 초록 다이얼, 초록색 악어가죽 줄, 샛노란 옐로 골드, ‘이게 유럽 미감이었지’ 싶은 화려함이다. 강렬한 인상과는 달리 이 정도로 얇으면 실제로 찼을 때는 별 느낌이 없다.
4.13mm
vacheron constantin
얇은 시계를 만들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기술? 세공? 아니, 덜어내기다. 기계식 시계의 모든 기능은 별도의 부품이 필요하다. 하다못해 크라운을 당겼을 때 시계가 멈추게 하는 것도 기능이다. 시계를 얇게 만들려면 그 모든 기능을 다 빼야 한다.
번뇌와도 같은 시계의 기능을 제거하면 이렇게까지 시계를 만들 수 있다. 바쉐론 콘스탄틴 히스토리크-울트라 파인 1955의 무브먼트 1003의 두께는 1.64mm다. 기능은 시와 분 표시뿐. 거의 석가모니의 단식 수준이다. 다만 열반에 가까운 절제를 표현한 시계는 금으로 만들었고 값이 꽤 비싸다. 속세에서는 열반이야말로 사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