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마녀의 법정>(2017)에서 여성아동범죄 전담부 마이듬 검사 역할을 맡았던 정려원은, 2017년 KBS 연기대상 최우수상을 받은 자리에서 감사할 이들의 이름을 부르기에 앞서 드라마의 메시지부터 되짚었다. “저희 드라마가 성범죄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었는데요. 사실 감기처럼 이 사회에 만연하게 퍼져 있지만 그 가해자들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저희는 이 드라마를 통해 성범죄, 성폭력에 대한 법이 더 강화돼서 가해자들이 처벌을 제대로 받고,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더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범죄 피해자분들 중에서 성폭력 피해자분들이 밖으로 나서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기 때문인데요.”
여느 수상 소감에서 보기 어려운 용기 있는 발언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동안, 한쪽 구석에서 뜬금없는 감상 평이 튀어나왔다. “2년 전 유아인의 느끼하면서도 소름 돋는 수상 소감은 없었네. 정려원한테 기대를 걸었는데 생각보다 아니었다. 왜 수많은 훌륭한 연기자가 연말 시상식 무대에만 올라서면 연기를 못하는 걸까?” 2018년 1월 1일 SBS 김성준 앵커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올린 글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는 네티즌들의 질문에 김 앵커는 “내용에 대해서는 100% 공감”하지만 “자연스러운 연기로 유명한 정려원 씨가 하는 말치고는 좀 어색했다는 취지”라고 답했다. 수상 소감의 내용은 문제가 없지만 딜리버리가 썩 깔끔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쯤 되겠다.
내용에 대해 100% 공감한다는 그의 말을 선해한다 쳐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메시지 전달 방식의 유려함만을 평가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면 정작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지워지는 게 당연한 일이니 말이다. 물론 메시지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하느냐도 평가 대상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메시지 자체가 시급하고 중요한 마당에 그 전달 방식에 대한 평가를 앞세우는 사람은 없다. 나치 독일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는 조지 6세의 비장한 연설을 두고 “그 내용에는 100% 공감하지만 군주가 하는 말치고는 말을 더듬어서 듣기가 영 별로였다”라고 말하는 저널리스트가 있었을까? 1월 2일 페이스북에 올린 사과문에서 김성준 앵커는 그 점을 사과했다. “잘한 걸 칭찬하는 데는 인색한 반면 개인적인 아쉬움을 자제하지 못하고 공개적으로, 불명확하게 언급한 점은 제 잘못입니다.” 그나마 본인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알고 있다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한편 유튜브를 무대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 유명 정치 비평 유튜버는 정려원의 수상 소감에 대고 이상한 훈수를 뒀다. “더 큰 문제는 연예계라든지 (중략) 몸 로비 하는 애들 있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냉정하게 얘기해서 여성운동이 뭘 근절해야 하느냐면, 꽃뱀 먼저 근절을 하라고. 그런 행동을 하는 여성에 대해서도 엄정하게 얘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중략) 정려원 씨의 말 자체나 이런 것도, 연예계라든지 어떤 이런 데에 있어서 성폭력이 만연한 걸 해결하는 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이게 권력 투쟁의 수단으로 오용이 되는 거죠. 우리나라에서 구조와 현상을 이야기하는 게, 쉽지가 않아.”
참 이상한 일이다. 수상 소감에서 성범죄 피해자들이 왜 목소리를 낼 수 없는지 구조적인 문제를 짚어 이야기한 건 정려원이었고, 그걸 굳이 연예계 섹스 스캔들 문제로 포커스를 좁혀서 이야기한 건 본인이다. 게다가 꽃뱀이라니. <타임>지가 선정한 2017년 올해의 인물은 ‘침묵을 깬 사람들’이었다. 일자리를 얻길 원한다면 자신의 성적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힘 있는 남성들을 고발하려 들었다가 온갖 불이익을 당하고 ‘꽃뱀’이나 거짓말쟁이로 몰려 업계에서 쫓겨났던 여성들 말이다. SNS에서 해시태그 ‘#MeToo’를 검색하면 그들이 지금껏 얼마나 오랫동안 구조적으로 침묵을 강요당했는지,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겪은 모멸감이 얼마나 컸는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접할 수 있다. 진짜 구조적인 걸 못 보고 있는 건 누구인가?
낯선 일도 아니다. 미디어업계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지우거나 맥락을 뒤틀려는 시도가 벌어진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니까. 방송을 통해 여러 차례 명백하게 만화가 기안84가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밝혔던 배우 엄현경의 목소리는 ‘예능적 재미를 추구한 농담’이라는 마법 같은 구문 하나로 묵살되어왔다.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2017)와 <1987>(2017)은 여성들의 투쟁이 잘 보이지 않는 순간과 장면들을 취사선택해 선별적으로 서사에 수용하며 이것이 우리가 겪어온 역사라고 말했다. 김희철은 은혁과 신동, 솔라와 함께 발표한 싱글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2017)를 통해 자신의 언행을 여성 혐오적이라고 비판했던 이들을 “주옥같은 트집으로 지들만 불편한 벌레 여시들”이라 지칭함으로써 문제 제기 자체를 조롱했다. 싫은 걸 싫다고 말하면 예능의 문법을 모르는 예민한 사람이 되고, 민주화의 역사에서 여성의 존재가 부각이 안 되는 걸 지적하면 실제 역사가 그랬다는 말로 상대를 억지 부리는 사람으로 만들며, 여성 혐오적인 언행에 대해 비판하면 “불편한” 너희가 “벌레”라고 말하는 전략. 여성의 존재와 목소리를 지우려는 미디어의 오랜 관성이다.
늘어놓자면 한도 끝도 없이 말할 수 있다. 비슷한 수위의 언행이라도 남성들의 언행이 표현의 자유나 선해의(선의로 해석하는) 원칙으로 옹호되는 동안, 여성들의 언행은 추론과 억측으로 비난의 대상이 된다. 제 목소리를 내는 여성을 나쁜 사람이나 이상한 사람으로 몰고 감으로써, 다른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는 일 자체를 두려워하도록 만드는 전략이다. 영화 시사회에서 잠시 짝다리를 짚은 김유정은 “어린 나이에 성공해서 버릇이 없어졌다”는 트집 잡기에 사과문을 발표해야 했고, 이주영은 트위터에서 ‘여배우’라는 단어가 여성 혐오적이라고 이야기했다가 퍼붓는 비난에 트위터를 폐쇄해야 했다. “우리가 평소에 남자 배우에게는 ‘남배우’라고 부르지 않는데 여자 배우를 지칭할 땐 ‘여배우’라고 씁니다. 그것은 인간의 디폴트가 남자라는 시선에서 비롯된 단어이므로 여혐인 겁니다.” 이보다 더 명쾌하게 정리하기도 어려운 의견에, 수많은 사람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를 비난하고 교정하려 들었다. 그 몇 개월 전 박찬욱 감독이 비슷한 말을 했을 때에는 감히 교정하겠답시고 달려드는 사람 따윈 없었지만 말이다.
미디어는 왜 그렇게 여성의 목소리를 지우려고 하는 걸까? 어쩌면 여성의 목소리를 지우려는 게 아니라,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는 담론과 콘텐츠의 장에 여성의 목소리가 진입하는 것을 막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한 묘사일 것이다.
미디어는 왜 그렇게 한사코 여성의 목소리를 지우려고 하는 걸까? 어쩌면 질문의 순서가 틀렸는지도 모른다. 이미 존재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지우려는 게 아니라,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는 담론과 콘텐츠의 장에 여성의 목소리가 신규 진입하는 것을 막고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묘사이리라. 남성들은 아주 오랫동안 목소리를 독점해왔고, 세상에 관해서든 자기 자신에 관해서든 목소리를 낼 권리는 온전히 자신들만의 것이라 여겼다. 한 치의 의심 없이 제 것이라 여겼던 권리를 여성들이 주장하자, 당황한 남성들이 어떻게든 여성들의 목소리를 지우려 드는 게 아닐까?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에서 여성 주인공 퓨리오사(샬리즈 시어런)의 비중이 남성 주인공 맥스(톰 하디)의 비중과 엇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격분했던 이들, 여성판 리메이크 <고스트 버스터즈>(2016)가 원작 <고스트 버스터즈>(1984)에 비하면 얄팍하고 무게가 없다고 조롱했던 이들, 포스의 균형을 가져올 주인공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인 레이(데이지 리들리)라는 이유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2015)와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2017)를 보이콧하는 이들을 보라. 이래저래 가져다 대는 핑계는 많지만 결국 이 한마디를 외치고 싶은 것이다. “목소리를 낼 권리는 원래 다 우리 거였는데, 너희가 목소리를 내면서 다 망쳤어!”
여성의 목소리를 지우는 데 동원되는 방식이 폄하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극우 쇼비니스트 성향의 남성들이 주를 이루는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저장소’의 유저들은 EBS <까칠남녀>의 화면 캡처를 조작해 여성학자 이현재가 롤리타 콤플렉스(어린 소녀를 향한 성인 남성의 소아 성애)는 비판하면서 쇼타로 콤플렉스(어린 소년을 향한 성인 여성의 소아 성애)는 문화의 일부라고 옹호한 것처럼 왜곡했다.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섹스 칼럼니스트 은하선을 향해서는 그의 전 애인을 자처하며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악플러가 등장하는가 하면, 그가 과거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았을 것이라는 식의 위험한 추론을 ‘심리 분석’이라고 늘어놓는 사람도 나왔다. 고정 출연자 정영진이 다른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해 프로그램 흉을 보며 낄낄거리는 동안, 매주 시청자 게시판과 담당 PD의 휴대폰에는 ‘시청자 의견’이라는 명분을 뒤집어쓴 욕설이 쏟아졌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센 언니 전성시대’니 ‘여성 상위 시대’ 같은 이야기를 팔자 좋게 하고 있지만, 그사이에 KBS <언니들의 슬램덩크>와 온스타일&올리브 <뜨거운 사이다> <바디 액츄얼리>가 종영됐다. 그나마 버티고 있던 EBS <까칠남녀>도 곧 시즌을 마무리한다. 공식 입장은 시즌 1이 종영된다는 것이지만, 시즌 2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다는 기약은 아직 없다.
2017년은 여성이 “여성을 있는 그대로의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일이 그리 어려운가”에 대해 묻고, 몇몇 남성들이 그 목소리를 어떻게든 왜곡하고 지워보려 한 해였다. 물론 한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남성지 <에스콰이어>의 독자들이라면,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신사의 자격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고민해온 <에스콰이어>를 읽어온 만큼 후자의 못난 남성들이 저질러온 일들을 보며 한심해했으리라 믿는다. 진정한 신사는 여성이 자신과 동등한 발언권과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에 위기감을 느낄 만큼 자존감이 얄팍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단순히 못난 자들을 한심해하는 것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여성이 제 목소리를 왜곡이나 방해 없이 자유롭게 낼 수 있도록 지지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차분히 경청하고, 혹시 내가 잘못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는 것, 그게 2018년 우리에게 놓인 숙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