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다이닝의 신성-3 라피네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경기 불황으로 암흑 같은 시절을 관통하며 사그라진 국내 파인다이닝 시장을 황황히 빛내줄 레스토랑이 등장했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8개월로, 아직 문을 연 지 채 1년이 안 됐지만 지금 반드시 주목해야 할 신생 레스토랑 세 곳을 소개한다. | 파인다이닝,라피네

라피네주소 서울 강남구 언주로164길 35-3문의 02-540-1182라피네는 예상을 깨는 작은 요소들이 모여 독특한 분위기와 멋을 자아낸다. 방수미 대표는 와인을 굉장히 사랑하지만 전문 소믈리에가 아니며, 이대륙 셰프는 프랑스에서 자랐으나 이력은 르 코르동 블루가 전부이며, 방문현 매니저는 영국과 미국에서 수학했으나 레스토랑 경험이 전무하다. 냉정하게 따지면 전문가라고 부르기 어려운 세 사람이 모인 만큼 그 결과가 열하할 수 있으나, 그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특유의 성실함과 타고난 감각, 애착으로 채워나간다.가장 먼저 스테인리스스틸 외벽과 원목 프레임을 두른 문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원형의 테이블에는 비정형의 가죽 매트가 깔려 있고, 그 위에 파스텔 톤 접시와 은빛 커틀러리가 놓여 있으며, 테이블 너머로는 나뭇잎을 연상시키는 의자가 빼꼼히 고개를 들고 있다. 요소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고 했더니, 가죽 매트는 린드DNA, 커틀러리는 서울번드, 접시는 이악크래프트, 의자는 보컨셉의 오타와 체어다. 특히 은은한 빛을 띠는 커틀러리는 진짜 은기로, 손에 쥐었을 때 기분 좋은 묵직함이 느껴진다.“레스토랑을 열면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묻고자 관계자분들을 자주 모셨는데, 그분들이 요소 하나하나가 예쁘기는 하나 비생산적이라고 입을 모아 말씀하셨어요.”방 매니저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실제로 그는 은기 커틀러리의 얼룩을 닦는 데 하루에 2시간 이상을 할애한다. 방 매니저는 서비스를 전문으로 배운 적이 없다고 하지만, 코스 중간중간에 그릇을 치우며 매트는 물론 수저 받침까지 닦는 세심함을 보인다. 이는 정통의 파인다이닝 관계자들도 들으면 깜짝 놀랄 대목이다.와인 리스트도 놀랍다. 16석의 작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와인을 70여 종 구비하고 있는데 모두 내추럴 와인에 해당한다. 내추럴 와인이 유행하면서 이를 구비한 레스토랑이 많이 늘었지만 이렇듯 여러 종류를 갖추고 있으며, 내추럴 와인으로만 구성한 페어링을 진행하는 곳이 국내에 또 있을까 싶다.라피네의 요리는 이대륙 셰프가 거듭 강조하듯 어디서 한 번쯤 봤을 법한 조합이지만 프레젠테이션부터 맛, 향까지 새삼 감탄을 자아내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특히 메인에 해당하는 대구 요리는 첫술부터 막술까지 편안하면서도 긴 여운을 남긴다. 감자와 대구라는 매우 고전적인 조합에 이 셰프는 다양한 터치를 통해 여러 가지 장치를 숨겼다. 일단 감자 퓌레에는 고구마와 밤을 넣어 옅은 단맛을, 크림소스에는 유자를 넣어 우아하면서도 향긋한 풍미를 가미했다. 또한 크림과 버터의 무거움을 덜기 위해 셀과 청어알, 케이퍼, 딜 비니거를 조합했는데, 이는 브로콜리니와 함께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식감에 재미를 더하는 역할까지 한다. 특히 샬롯과 버섯을 잘게 다져 페이스트가 될 때까지 버터에 볶은 셀은 입자가 작은 만큼 입안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불쑥불쑥 등장하며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수비드해 구운, 부드러우면서도 탱글탱글한 대구 살이 입안에서 신선한 생선 기름과 함께 녹아내리는 순간에는 입술 사이로 작은 탄성이 흘러나온다. 아름답고 섬세한 것들이 모여 완성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이 아름다워지는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