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옷을 입은 여자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나는 오늘도 P의 옷장을 열었다. | ESQUIRE,에스콰이어

상황2017년 5월호 릴레이션십 페이지에 결혼한 남자에 대해 썼던 적이 있다. 사랑, 관용, 박력, 세심함에 온 세상 잡짐을 끌어안고 사는 포용까지 갖춘 P의 이야기였다. 그 남자가 이번 페이지에도 등장한다. 그때 P는 공개적으로 책잡혔지만 이번에는 아주 칭찬 일색으로 써보려고 한다. P는 대학생 때 쇼핑왕이었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캐나다, 미국에서 만든 고가의 패션 브랜드를 다 입었다. 브랜드를 나열하기가 낯부끄러울 정도다. 많기도 많거니와 너무나 밀레니엄 시대적 취향이라서. 그때의 P를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우리가 그때 만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 시절 세상에서 제일 과한 남자가 있었다면 그게 바로 P였을 수도 있다. 칭찬 일색으로 쓰려고 했건만…. 그러던 P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윗길로 간다. 화려하고 값비싼 옷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느꼈단다. 그 변화의 시점에 나와 연애를 시작했다. 무자비하고 서툴렀던 P의 쇼핑은 점점 정돈되고 있다. 깔끔하고 클래식하게, 알맞고 세련되게.희망멋지게 섹시한 여자가 좋다. 나는 내가 멋지게 섹시해 보였으면 좋겠다. 이건 참 쑥스러운 고백이다. 내게 멋지게 섹시한 여자는 남자 옷을 입는 여자다. 여자의 관습적인 아름다움보다 개인의 취향과 이미지에 맞는 스타일이 좋다. 여자의 몸은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곡선을 부각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래도 내게 가장 멋진 섹시함은 곡선이 드러나지 않는 투박한 형태. 남자 옷을 입으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남성복과 여성복을 구분하는 건 분명 필요하지만 선택은 자유로워야 한다. 스스로 만족하고 자신감이 생긴다면, 여자가 남자 옷 좀 입으면 어때. 사실 남자 옷이 잘 어울리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장식도 없고 실루엣도 간단한 옷은 입은 사람을 정직하게 보여주니까. 그래서 더 내가 멋있어졌으면 좋겠다. 남자 옷을 입고도 쭈뼛거리지 않고 싶으니까. 요즘 종종 남자 코트를 입는다. 그런 날엔 몇 번씩 더 거울을 보게 되는 것 같다. 내 모습이 나도 좋아서. 멋지고 섹시한 건 좋은 거다.현실옷이 없다. 아무도 믿지 않고 나조차 믿을 수 없다. 그런데 정말 입을 옷이 없다. ‘입을 옷이 없다’는 상황을 단 한 번이라도, 순간이라도 느껴본 사람이라면 이 명제가 단순히 물리적인 양으로만 접근할 게 아니라는 걸 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옷의 개수가 많다 = 입을 옷이 많다’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입을 옷이 없다’는 상황은 단순하다. 작년과 재작년 사정은 다 지나간 이야기, 올해는 올해를 위한 옷이 있다. 올해의 옷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입을 옷이 없다고 말한다. 나의 올겨울 쇼핑은 아직 부족하다.중간 정리상황과 희망과 현실을 정리해보자. ‘함께 사는 남자가 새로운 마음으로 쇼핑을 하고, 나는 남자 옷을 입는 걸 좋아하는데 마침 입을 옷이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P의 옷장 문을 열었다. P의 옷 중 가장 좋아하는 건 카키색 폴로 코트. 어깨가 크고 깃이 넓어 아주 남성적이다. 양어깨가 손바닥만큼 남아도는데도 자꾸 입고 싶다. P가 가장 좋아하는 옷이라서 세 번 중 한 번만 입지만. 어깨가 둥근 헤링본 코트, 회색 울 재킷도 요즘 자주 입는 남자 옷. 셔츠, 티셔츠, 스웨트셔츠, 트랙재킷 같은 건 당연하고, 한번은 P의 청바지도 넉넉하게 입고 나간 적이 있는데 나쁘지 않았다.고백있는 옷을 함께 입는 거야 자연스럽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저질러온 얕은 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사실 함께 쇼핑할 때마다 P에게 진실만 이야기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옷은 내가 너무 입고 싶어서 P에게 썩 어울리지 않아도 사라고 부추겼다. 최근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이번 겨울에 P는 캐멀 코트를 사고 싶어 했다. 여러 곳을 돌아다녔고 몇 벌은 여러 번 입어보기도 했다. P는 그중 단단하게 어깨가 잡히고 길이가 무릎을 넘는 아미의 더블브레스트 코트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 코트는 정확히는 황토색에 가까웠는데 P에게 100% 어울리진 않았다. 그런데 내게는 캐멀색 코트만 있다. 저 색상의 코트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사라고 했다. 바레나의 네이비 더블 코트도 내가 입었더니 길이며 어깨며 품이며 아주 만족스럽게 넉넉해서 P에게 몇 번이나 사라고 했지만 실패했다.사랑P의 옷을 사러 돌아다닐 때마다 모든 옷을 내가 입어보는 것부터 속내가 빤한 일일 수 있다. 말로는 내가 남자 옷을 많이 접하니까 나도 입어봐야 잘 골라줄 수 있다고 하지만 다 웃기는 소리다. P는 이미 내 얕은 수를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큰 사랑과 더 큰 관용으로 내 마음을 이해할 거다. 사랑하는 여자가 멋지게 섹시해지는 건 너무 좋은 거니까. 결국 이것도 다 사랑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