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그래미의 두 얼굴

브루노 마스는 되고, 켄드릭 라마는 안 되는 그래미의 이분법에 대하여.

BYESQUIRE2018.02.28

올해도 어김없이 그래미 시상식이 열렸다. 60번째 시상식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계적인 시청률 조사 기관 닐슨은 이번 그래미의 시청률이 크게 하락했다고 발표했다. 닐슨에 따르면 작년에는 2600만 명이 시청했지만 올해는 1764만 명이 시청했다. 21%나 하락한 수치이자 9년 만의 최저 시청률이다. 누군가는 이를 힐러리 클린턴의 등장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힐러리가 스크린에 등장해 도널드 트럼프의 백악관을 폭로한 책 <화염과 분노: 도널드 트럼프의 백악관 뒷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정치 논란을 야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힐러리의 행위가 시청률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사람들이 더 이상 그래미 시상식의 수상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래미의 수상 결과 기사를 찾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상식이 열리기 전에 이미 알고 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그들은 이미 알고 있으며, 그 예상은 최근 몇 년간 대부분 맞았다. 사랑이 (신승훈의 가사처럼) ‘전부를 주고도 항상 미안해하고 매일 아쉬워하며 마지막엔 결국 혼자 남는 일’이라면, 그래미는 ‘다양한 장르의 쟁쟁한 뮤지션들이 다투다 결국 테일러 스위프트나 아델 같은 특정한 성향의 백인 뮤지션이 주인공이 되는’ 시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중에 결과를 확인해볼 수는 있어도 굳이 ‘본방 사수’를 할 필요는 없다. 올해 시상식 역시 예상을 비켜가지 않았다. 차일디시 감비노의 , 제이지의 <4:44>, 켄드릭 라마의 , 로드의 등이 ‘올해의 앨범’을 노렸으나 영예는 브루노 마스의 <24K Magic>에 돌아갔다.

이와 관련해 잠시 논의를 세분화하자. 먼저 이것은 브루노 마스에 대한 디스리스펙트(disrespect)가 아니다. 테일러 스위프트와 아델에게도 마찬가지다. 좋은 작품을 만든 뮤지션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다음으로 브루노 마스의 <24K Magic>은 훌륭한 앨범이다. 광고나 예능 프로그램에 노래가 삽입되면서 널리 알려진 까닭일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유독 브루노 마스를 ‘유명하지만 깊이는 없는 가수’ 정도로 인식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1980~1990년대 흑인 음악, 혹은 그 전의 흑인 음악까지도 다시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놓은 <24K Magic>은 충분히 ‘올해의 팝 앨범’감이었다. 마지막으로, 브루노 마스는 테일러 스위프트나 아델과는 여러모로 다르지 않느냐는 반문이 나올 수 있다. 맞다. 피부색도 다르고 음악 성격도 다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똑같기도 하다. 힙합이 그래미 시상식에서 외면당해온 맥락의 대척점에 자리한 존재로서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번 그래미 논란의 핵심이다.

오해는 말자. 힙합이 당연히 그래미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힙합이 다른 장르보다 우월하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그래미 힙합 홀대론’은 당위와 바람, 취향과 안목을 구분 못 하는 이들의 투정이 아니다. 충분히 일리 있고 합리적이다. 일단 작년 여름의 한 뉴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힙합과 알앤비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록을 제치고 가장 인기 있는 음악 장르가 되었다. 닐슨은 2017년 전반기에 힙합과 알앤비가 시장의 25%를, 록이 23%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힙합이 역사에 등장한 지 40여 년 만에 이뤄낸 성과였다. 여기에 더해 2017년 한 해 동안 가장 히트한 노래 10곡 중 9곡이 힙합&알앤비라는 발표도 있었다.

총론뿐만 아니라 각론도 있다. 최근 몇 년간 그래미 후보에 오른 힙합 앨범들의 완성도에 대한 이야기다. 그중에서도 켄드릭 라마의 정규 앨범 3장은 특별하다. 이 3장은 <롤링 스톤> 매거진을 비롯해 각종 평단에서 장르를 초월하는 상찬과 지지를 받았다. 거의 모든 평단이 이 앨범들에 별 4개 반, 혹은 별 5개 만점을 부여했다. 연말 리스트에서 걸핏하면 1, 2위를 다퉜다. 장르가 아니라 그냥 음악으로 맨 위에 우뚝 선 것이다. 그러나 켄드릭 라마는 아직까지 그래미 종합 부문에서 한 번도 수상한 적이 없다.

그래서 더욱 이상하게 느껴진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래미가 ‘작품성과 상관없이 가장 흥행한 음악에 상을 주는’ 시상식이라면 그 목록에 힙합이 빠질 리 없다. 또 다른 누군가의 말처럼 그래미가 ‘오로지 예술성만 평가하는’ 시상식이라면 이 목록에도 당연히 켄드릭 라마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힙합은 그래미 종합 부문에서는 늘 최약체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제이지와 켄드릭 라마는 멋쩍은 미소와 함께 뒤통수를 긁적이며 집으로 돌아갔다. 반면 브루노 마스는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노래’, ‘올해의 앨범’ 부문을 모두 휩쓸었다. 테일러 스위프트와 아델이 그랬듯. 그러고 보니 카니예 웨스트와 드레이크 등은 이미 그래미를 보이콧하는 중이다. 그래미의 공정성과 대표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경찰의 흑인 과잉 진압과 흑인 인종차별 문제를 대놓고 랩으로 전하는 켄드릭 라마의 힙합은 외면받지만 ‘사람들이 힘든 세상을 잠시라도 잊고 즐기게 해주고 싶었다’는 브루노 마스의 풍요롭고 댄서블한 (팝에 가까운) 흑인 음악은 선택받는다.

이번 그래미 결과에 대해 이대화 음악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이번 시상식을 두고 그래미가 ‘흑인 음악에 인색하다’는 말은 잘못된 표현인 것 같습니다. 브루노 마스의 음악은 1980~1990년대 흑인 음악이잖아요. 개인적으로는 랩 중심이 아닌 노래 중심의 음악이기 때문에 보수적인 그래미 심사위원단의 표를 더 많이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맞다. 실은 그래미의 태도는 백인 음악/흑인 음악, 힙합/비힙합 같은 느슨한 이분법으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대신 그 경계를 가로지르고 틈을 비집어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야 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랩과 노래’다. 켄드릭 라마의 과 브루노 마스의 <24k Magic>은 둘 다 흑인 음악에 속한다. 하지만 전자는 랩으로 채워져 있고 후자는 노래로 채워져 있다. 이 관점으로 보면 브루노 마스는 켄드릭 라마의 편이 아니라 테일러 스위프트와 아델의 편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잊고 있던 사실이 있다. 역사를 통틀어 그래미 ‘올해의 앨범’을 수상한 단 두 장의 힙합 앨범 역시 노래의 비중이 크거나 다른 장르와의 크로스오버 성향이 짙었다는 사실 말이다. 로린 힐의 , 아웃캐스트의 말이다. 이런 관점으로 본 그래미는 다분히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문득 몇 년 전 읽은 기사가 떠오른다. 런던의 어느 연구 팀의 리포트를 인용한 영국 BBC 방송의 보도였다. “랩과 힙합의 등장으로 화음 없는 팝송이 가능해졌다는 점이 비틀스의 ‘영국 침공(British invasion)’보다 더 거대하고 진정한 혁명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팝 음악을 통틀어 최대의 혁명이다.” 하지만 그래미는 지금 어느 시절에 살고 있는 것인가. 하긴 그래미가 샘플링을 활용한 음악을 인정한 지도 몇 년 되지 않았다.

또 하나 새로운 관점은 바로 ‘그들이 허락한 흑인 음악’이다. 브루노 마스의 경우에서 보듯 그래미가 모든 흑인 음악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위협이나 불편을 느끼지 않는 흑인 음악만 받아들이고, 선택하고, 상을 준다. 경찰의 흑인 과잉 진압과 흑인 인종차별 문제를 대놓고 랩으로 전하는 켄드릭 라마의 힙합은 외면받지만 ‘사람들이 힘든 세상을 잠시라도 잊고 즐기게 해주고 싶었다’는 브루노 마스의 풍요롭고 댄서블한 (팝에 가까운) 흑인 음악은 선택받는다. 또 그래미에서 ‘Love On Top’을 부르는 비욘세와 ‘Formation’을 부르는 비욘세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래미는 ‘엉클 톰(Uncle Tom)’ 같은 흑인 음악만 허락한다. 물론 그래미가 ’백인 우월주의를 내면화한 소수 늙은이의 밀실 야합’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래미의 심사 시스템이 인종차별적 결과를 도출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지적도 있다. 후보의 면면을 보면 그래미가 ‘시대가 바뀐 것’까지 모르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여전히 해묵은 껍질을 깨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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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민 용준
  • 사진|ⓒGETTY IMA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