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과 원칙이 만났을 때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고집과 원칙을 내세우는 안철수와 유승민의 합당은 이렇게 이뤄졌다. | 안철수,유승민,고집,원칙

지난 1월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보통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는 긍정적 의미로 쓰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번에는 아니다. 대단히 훌륭한 일을 했다는 의미도,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의미도, 신선한 일을 했다는 의미도 역시 아니다. 다만 그 염치없고 얼굴 두껍다는 정치권에서도 ‘보는 눈’ 때문에 함부로 하지 않던 일, 기성 정치인들마저 예상치 못했던 일까지 해냈다는 의미다. 당 통합 절차인 전당대회 전격 취소, 그리고 전당대회를 대체하기 위한 당헌 개정. 바로 게임의 룰 변경이 그것이다.불과 몇 년 전 기존 정치를 강력히 비판하며 ‘새 정치’를 들고 나왔던 정치인 안철수가 결정했다고 보기에는 민망한 조치였다. 2018년 2월 13일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합당으로 바른미래당이 공식 출범했다. 대략 그간의 과정을 설명하면 이렇다. 안철수는 2017년 10월경부터 바른정당과의 합당을 추진한다. 박지원 의원 등 호남에 뿌리를 둔 의원들, 혹은 바른정당의 보수적 이념 내지 방향성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강력히 반대한다. 안철수는 그럼에도 합당을 원한다. 양측은 몇 달 동안 합당 찬반 여부를 두고 치열하게 싸운다. 수위를 넘는 ‘말폭탄’은 기본이다. 급기야 시간에 쫓기듯 안철수는 2월 4일 전당대회를 개최하겠다고 발표한다. 이에 바른정당과의 결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민주평화당(이하 민평당)을 창당하겠다며 맞불을 놓는다. 이런 와중에 전당대회를 4일 앞두고 안철수는 일정을 전격 취소한다. 그러곤 당헌(당헌은 당의 헌법과 같은 중요한 원칙이다)을 바꿔 ‘전(全) 당원 투표’를 통해 합당을 의결하겠다고 발표한다. 합당을 위한 ‘필수 코스’인 전당대회를 안 하겠다니. 대단한 발상이다.안철수 등 합당파의 전당대회 취소 명분은 ‘이중 당적’이었다. 민평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한 대표 당원들이 이중 당적이기 때문에 전당대회 개최가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몇천 명 수준의 대표 당원의 의사를 묻는 게 아니라 28만 명 당원의 의사를 묻는 전 당원 투표를 하겠다는 취지”(안철수)라는 친절한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당 내외에서는 ‘전당대회에 승산이 없자 규칙까지 바꿔가며 무리수를 둔다’는 지적이 터져 나왔다. 당사자인 반대파 의원들의 목소리는 더욱 날이 서 있었다. 당시 민평당 창당추진위원회 대변인인 장정숙 의원은 “안철수 독재정치는 지구상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정당과 당원의 운명을 전당대회가 아닌 전 당원 투표로 날치기하겠다는 것은 정당법, 당헌·당규를 위반한 원천 무효”라 주장했다. “아직 창당대회를 치르기 전인데 발기인이 어떻게 이중 당적일 수 있는지 정말 해괴하다”(조배숙 의원)는 반박의 목소리도 이어졌다.우여곡절 끝에 결론은 나왔다. 국민의당 당원들은 2월 8~9일 온라인 투표, 10일 ARS 방식으로 진행한 투표에서 73.56%(3만9708명)가 찬성표를 던졌다. 안철수의 ‘소원’이 이뤄진 것이다. 그렇게 원내 30석의 제3당 바른미래당이 공식 출범했다. 유승민은 예고대로 대표직을 맡겠다고 했고 안철수는 예고대로 대표직을 내려놨다. 대신 국민의당 소속이던 박주선 국회부의장이 초대 공동대표를 맡기로 했다. 한편 애초부터 합당에 반대한 의원들은 한발 앞서 따로 살림을 차렸다. 일주일 앞선 지난 2월 6일 민평당은 조배숙 의원을 대표로 선출하며 15석을 가진 신당 출범을 알렸다. 2015년 2월 창당한 국민의당은 꼭 2년 만에 이렇게 사라졌다.안철수는 왜? 도대체 왜?질문은 이어진다. 그는 말한다. “양극단의 기득권 정당이 적대적 공생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따라서 튼튼한 제3당을 통해 다당제를 이어가야 한다.”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결합해 인물과 세대를 교체해야 한다.” “영남, 호남으로 갈라진 정치 구도를 타파해야 한다.” 좋은 얘기다. 그럴듯한 얘기다. 명분은 늘 듣기 좋은 말들의 향연이다. 하지만 이게 다일까?안철수는 문재인 대통령을 싫어한다. 정말 싫어한다. 이해는 간다. 201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당시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가 난관에 봉착하자 11월 후보직을 전격 사퇴한다. 하지만 문재인 측은 ‘제대로 안 도와줬다’며 안철수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다. 악연의 시작이었다. 이후 새정치연합 창당을 추진하던 안철수는 당시 김한길 대표가 이끌던 민주당과 손잡고 새정치민주연합(2014)을 만든다. 하지만 주류였던 이른바 친노, 386 등과는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결국 2015년 12월 ‘친노 패권주의’를 비판해오던 호남계 의원들과 손잡고 당을 나와 이듬해 2월 국민의당을 창당한다. 그리고 2017년, 문재인과 안철수는 5월 대선에서 다시 맞붙는다. 결과는 두 번에 걸친 안철수의 쓰라린 패배. 그에겐 2012년 정치 입문 이후 모든 과정이 문재인과의 대결 그리고 좌절의 시간이었다. 정치인 이전에 인간적으로 양측은 가까워지기 매우 어려운 사이다. 누군가에 대한 반감이 쌓이면 합리와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가 있다.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정부에 대한 안철수의 비판에 이따금 고개가 갸웃해지는 이유다.대선 패배의 아픔을 안고 안철수는 바른정당과의 합당을 추진한다. 본격적으로는 지난해 10월 를 통해 국민의당-바른정당 통합을 가정한 여론조사를 흘리면서다. 민주당에서 떨어져 나와 호남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국민의당이 바른정당과 합당을 추진한다고?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었다. 일각에선 ‘이종교배’ 정치라고 했다.그런데도 정치 공학적 해석은 가능하다. 문재인-더불어민주당과의 관계는 회복 불가 수준이고, 자유한국당은 홍준표의 막말 퍼레이드 등으로 혼란의 연속이다. 게다가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의 인기는 여전히 고공 행진이다. 반면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자유한국당은 ‘다행히’ 지지부진하다. 홍준표가 오는 6월 지방선거에서 패배하고 낙마한다고 한들 이미 쓰러진 친박 세력이 다시 일어설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고 탈당했다 복당한 김무성 의원 세력이 당을 장악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 와중에 꼬마 보수당인 바른정당은 일부 의원들이 집단 탈당, 11석으로(지난해 11월 초) 쪼그라들어 교섭단체 지위까지 잃은 상황이다. 안철수 입장에선 충분히 틈이 보였을 것이다. 고맙다.지난해 대선에서 홍준표(24%)에 이어 21.4%라는 득표율을 기록한 그는 아마 생각했을 것이다. ‘민주당과 정의당이 이미 독식한 진보 쪽엔 틈이 없다. 나를 지지한 중도층에 더해 자유당에 실망한 보수층을 먹는다면 다음 대선엔 승산이 있다’ 정도의 결론을 ‘논리적’으로 내렸을 것이다. 그래서 시도한 첫걸음이 앞서 말한 문제의 여론조사였을 것이다.하지만 정치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아니다. 이론을 뛰어넘는 무엇이다. 논리가, 법이, 심지어 상식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어떤 의미에서든) 위력을 발휘하는 게 정치다. 이 얘기는 논리와 공학으로 정치를 바라볼 때 위험성은 더욱 높아진다는 의미다. ‘똑똑’하고 ‘논리적’이라는 유승민이 왜 저렇게 지지부진한지 설명해줄 사람?이번 통합 과정에서 최대 피해자는 안철수 자신이다. 반대로 최대 수혜자는 유승민이다. 33명이던 바른정당이 9석으로 쪼그라들면서 유승민은 리더십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교섭단체 지위도 상실하며 정의당 수준으로 의석수가 내려앉았다. 하지만 유승민은 자신만의 ‘원칙’은 지켜냈다.원칙과 고집이 만났을 때이번 통합 과정에서 최대 피해자는 안철수 자신이다. 반대로 최대 수혜자는 유승민이다. 33명이던 바른정당이 9석으로 쪼그라들면서 유승민은 리더십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교섭단체 지위도 상실하며 정의당 수준으로 의석수가 내려앉았다. 하지만 유승민은 자신만의 ‘원칙’은 지켜냈다. 집단 탈당의 여파 속에도 원칙 없이 움직이지도, 명분 없이 물러서지도 않는다는 이미지다.반면 국민의당은 39석(2017년 12월 5일 기준)으로 국회에서 캐스팅보트 역할까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안철수는 정치적 목적 달성(즉 대통령 되기)을 위해 이념도 색깔도 맞지 않는 바른정당과 통합을 위해 당을 깼고, 리더십은 상처를 입었고, 원칙은 무너졌다. 보수층에서 안철수를 ‘진짜 보수’로 인정해줄지도 현재까진 미지수다. 원칙을 지켜낸 유승민과 원칙을 저버린 안철수라는 대조적 이미지만 부각되면서 양측의 손익계산서는 이미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더 큰 문제는 지금부터다.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는 틀 안에서 안철수는 유승민과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고 강조해왔지만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정치, 경제, 안보-외교, 사회 분야에서 얼마나 공통점을 도출해낼지 미지수다. 대표적으로 유승민은 ‘미스터 사드’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맹신론자지만 안철수는 당초 국민투표로 사드 배치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다(대선 과정에서 입장을 바꿨다). 양당은 통합 논의 과정에서도 햇볕정책, 국가정보원 대공 수사권의 경찰 이관 등 주요 이슈에 대해 갈등을 겪었다. 당장 공식 통합을 하루 앞둔 2월 12일에도 정강 정책에 들어갈 내용을 두고 ‘합의 중단’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바른정당은 ‘합리적 중도’라는 표현을 요구했지만 국민의당은 ‘합리적 진보’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고 대립하면서 파열음을 냈던 것. 이건 시작일 뿐이다. 밀어붙이기에 능한 안철수의 고집과 깐깐한 유승민의 원칙이 충돌했을 때 어느 쪽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지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바른미래당에 미래는 있을까?6월 지방선거가 많은 것을 결정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17곳의 광역지자체장 가운데 최소 9석(2014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서울, 충남, 충북, 대전, 전남, 전북, 광주, 강원, 세종)을, 자유한국당은 최소 6석(부산, 울산, 경남, 대구, 경북, 인천 등)을 가져오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바른미래당 소속 광역단체장은 2월 13일 현재 원희룡 제주지사 한 명이지만 그마저도 탈당해 무소속 출마를 검토하고 있다. 따라서 수도권, 호남 등에서 단 1석이라도 건져야 체면을 유지할 수 있다. 최선의 시나리오는 안철수가 서울시장에 출마해 당선되는 것이지만 (심지어) 자유한국당의 도움 없이는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바른미래당 일각에서는 수도권에서의 득표율을 바로미터로 보고 있다. 특정 지역에서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수도권에서 자유한국당보다 득표율이 앞선다면 당분간 당의 미래가 있다는 것이다.유승민은 지방선거를 총지휘하고 선거 이후 대표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안철수는 서울시장 출마 등을 저울질하고 있다. 1차 관문, 4개월 남았다. 건투를 빈다. 근데 잘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