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일본의 밥 로스들

참 쉽죠?

BYESQUIRE2018.03.15

밥 로스(1942~1995)라는 사람이 있었다. 미국 화가다. 한국에서는 <그림을 그립시다>라고 번역된 TV 미술 프로그램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The Joy of Painting)>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쓱싹쓱싹 그림을 그려서 어느새 알래스카처럼 광활한 풍경을 만들고는 했다. 그리고 한마디. “참 쉽죠(That easy)?”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고 한다. 밥 로스가 쇼핑몰에서 강연을 할 때 한 남자가 말했다. “나는 색맹이라서 그림을 그릴 수 없어요.” 밥 로스는 방송에서 이 이야기를 소개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방송에서는 회색 톤으로만 그림을 그려서 누구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당신에게 기본적인 기술만 있다면 그 어떤 색깔이라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요.”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 시즌 2 에피소드 4에 나온 이야기다.

물론 실제로 밥 로스의 말처럼 그림을 그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어떤 블로거가 밥 로스를 그리워하며 회상한 말이 있다. “내 친구가 멋진 그림을 그리는 걸 볼 때 나는 내가 화가가 못 될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밥이 그림을 그리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밥 로스가 말하려던 것도 이거다. 그림을 그리는 건 즐거운 일이고,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고.

‘나도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독학을 위한 밥 로스의 조언 같은 책이 옛날 동아시아에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17~18세기 청대 전환기의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다. 우리 주변의 온갖 크고 작은 풍경과 사물과 인물 모델을 채색 판화 시리즈로 출판한 책이다. 이 책은 다양한 시리즈로 출판되어 청나라뿐 아니라 주변 국가에서도 그림 교재로 널리 읽혔다. 이 책은 특히 일본에는 다색 판화 기법이라는 충격을 주었다. <개자원화보>가 나온 이후 일본의 책과 그림에는 다색 판화 기법이 널리 쓰였다.

<개자원화보>가 일본에 끼친 영향은 채색 그 이상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책을 보고 혼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영향을 받았다. <개자원화보>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림이란 스승이 비밀스럽게 이어온 기법을 큰돈을 바치고 전수받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림은 신분이 낮거나 가난한 사람이 그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소형 에테혼의 초반부에 나오는 그림.

그러나 일본의 출판업자와 화가들은 잠재적인 시장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개자원화보>의 국제적 히트가 증거였다. 밥 로스도 방송 출연료는 기부하고 책과 비디오 판매로 수입을 올렸다. 그처럼 그림 그리는 방법이 실린 책을 팔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가능성이 확인된 셈이었다. 이러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시스템의 출판업계 역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17세기 중기부터 3000부가 팔리는 책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명한 화가들은 앞다투어 자기 이름을 걸고 그림 그리는 법을 책으로 만들어냈다. 이런 책을 에테혼(繪手本, 회수본)이라고 한다. 그림의 모델이 되는 책이라는 뜻이다.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일본에서는 에테혼이 많이 만들어졌다. 전문 화가들이 쓸 수 있는 큰 사이즈부터 장난감처럼 즐길 수 있는 손바닥 크기의 에테혼까지, 크기도 분량도 다양했다. 우키요에 화가로 유명한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도 에테혼을 만들었다. <호쿠사이 만화(北齋漫畵)>는 세로가 20cm 이상으로 비교적 대형 에테혼이다. 제목에 쓰인 것처럼 그야말로 ‘만화’ 같은 개성적인 캐리커처가 한가득 담겨 있어서 인기를 끌며 수십 년 동안 시리즈가 출판되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원본 이미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畵千本’이라고 쓰여 있는 책의 비단 표지.

畵千本에서 보이는 일본 사람들의 일상.

나는 두 권의 에테혼을 소장하고 있다. 세로가 각각 18cm, 11cm 정도인 작은 사이즈다. 특히 11cm짜리 에테혼은 비단 커버 안에 들어 있다. 이 책을 소장했던 옛 일본인이 이 책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이 간다. 흥미롭게도 이 비단 커버의 겉면에는 ‘에테혼’이 아니라 ‘에센본(畵千本, 화천본)’이라고 적혀 있다. ‘손 수(手)’와 ‘일천 천(千)’을 헷갈려서 잘못 쓴 걸까? 그런데 비단 커버를 벗기면 나오는 책 표지에도 ‘도미요 에센본(富世畵千本)’이라고 적혀 있다.

이 책의 주인은 이런 종류의 책 이름을 ‘에센본’으로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비단 커버의 ‘일천 천(千)’도 ‘손 수(手)’를 급하게 쓰다가 한 획을 빼먹은 게 아닌 것 같다. 그림 그릴 때 참고가 되는 작은 그림이 1000개나 실려 있다는 뜻인데, 1000개는 좀 심하니까 그림이 많은 것에 대한 과장된 표현일 것이다. 이 책 주인은 이렇게 기초적인 사실조차 잘 몰랐지만 그래도 이 책을 아껴서 비단 커버까지 입혔다. 그런 아이러니 때문에 이 책이 더 사랑스러워 보인다.

‘도미요 에센본’을 펼쳐 본다. 앞표지 뒷면에 꼬마가 절을 하며 뭔가 말하는 장면이 다색 판화로 찍혀 있다. 이 책의 출판인이 자기가 만든 다른 책을 홍보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샤세쓰(寫雪)라는 화가의 이름이 나온다. 이 도미요 에센본의 그림을 그린 화가라고 추정할 수 있다. 샤세쓰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출판인이 무명의 화가를 고용해 저렴한 에테혼을 만든 걸로 보인다. 이 정도 크기의 에테혼은 실제로 그림을 그릴 때 참고하기엔 너무 작다. 에테혼 형식의 간단한 그림을 손에 들고 그리라는 목적으로 만들어서 팔았던 책 같다. 책이 작아서인지 ‘도미요 에센본’의 뒤표지 뒷면엔 에테혼을 보고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가 그려져 있다. 작은 그림에 눈금을 그어 확대하면 큰 그림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남자아이가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뜀뛰기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가장 좋아한다. 요즘 딸아이가 딱 이런 놀이를 좋아해서 그런 것 같다.

의 일부. 수호전의 장면과 일본의 역사를 한 페이지에 배치했다.

이 책보다 7cm 정도 더 큰 에테혼은 <구니모리 화법 대의(國盛畵法大意)>다. 제목은 화가 우타가와 구니모리가 그림 그리는 방법의 핵심을 설명한다는 뜻이다. 그럴듯하다. 제목에 맞게 정식 서문도 실려 있다. 그림이 있어야 옛 모습을 후세에 전할 수 있고, 글만 있어서는 옛 모습을 알 수 없고, 그림이 있어야 시인이 먼 곳의 명승지를 눈앞에서 보며 시를 읊을 수 있으니, 결국 그림 그리는 기술이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서문에는 그림을 좋아하는 어린아이들이 이 책을 보면 그림 그리는 법의 핵심을 익힐 수 있다는 말도 적혀 있다. 이 책의 독자를 폭넓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근대 일본 출판계에서는 책을 만들 때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들라’는 말을 하곤 했다. 이 말은 현대 한국 출판계에서도 주문처럼 떠돈다. 근대 일본에서 말한 중학생의 지적 능력은 요즘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생 수준이지만, 아무튼 가능한 한 이 책을 많이 팔겠다는 출판인의 의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구니모리 화법 대의>는 사계절의 풍속 그림으로 시작한다. 가을 풍경에는 ‘멀리서 바라본 불꽃놀이 풍경’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에도 시대의 스미다강을 그린 걸로 보이는 그림이다. 그림 속에서는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로 나무 다리 위로 국수 장수와 초롱 장수가 지나가고, 강가에서는 외출복을 잘 차려입은 여성들이 부채질하며 보리차를 마시고 있다. 아직 늦더위가 가시지 않았겠지만 얼음이 일반화되지 않은 시절이었으니 미지근한 물이 아니라 뜨거운 물을 마셔야 배탈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시대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정신문화를 유추할 수 있는 그림도 있다. 춘하추동을 몇 장 넘기다 보면 <수호전(水滸傳)>의 주인공인 무송(武松)이 호랑이를 잡는 장면과 암초 위에 홀로 남은 일본인 무사가 떠나는 배에 화살을 쏘려는 장면이 함께 그려져 있다. <초한지(楚漢志)>의 주인공 한신이 부랑아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는 장면과,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 도착한 가토 기요마사가 동해 바다 저편으로 후지산을 바라보는 장면도 함께 그려져 있다. 전근대 일본인의 지적인 목표는 화혼한재(和魂漢才)였다. 일본(和)과 중국(漢)을 일대일로 세워서 문화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조선과는 조금 다르다.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의 지적 목표는 동국(東國), 즉 중국의 동쪽 나라로서의 주체성을 키우는 것이었다. 일본 정신을 지키며 중국 문화를 받아들인다는 ‘화혼한재’론은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 화혼양재(和魂洋才), 즉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되 일본 정신을 유지하자는 모토로 이어졌다.

에 나온 그림 그리는 법.

그림 그리는 방법이라는 본래의 목적에도 충실하다. 이 책 안에는 동물과 건물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흰색이나 빨간색을 칠하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책에 실린 그림을 따라 그린 뒤에 지정한 대로 색을 칠하면 멋진 그림이 완성된다는 뜻이다. 유명한 그림의 테마가 실린 전반부가 끝난 뒤에도 교육적인 그림이 나온다. 사람의 알몸은 검고 굵은 선으로, 그 위에 입은 옷은 가늘고 붉은 선으로 나타낸 그림이다. 요즘 미술 배우는 사람들이 참고하는 인체 드로잉 기법과도 비슷하다. 그 뒤로는 서 있는 사람의 앞모습과 뒷모습, 몸이 움직일 때 중심선이 어디 있는지 보여주는 그림, 그리고 얼굴, 눈, 코, 입과 각종 손동작, 다리 근육 등을 나타낸 그림이 이어진다.

옛 책의 주인은 작가와 출판인만이 아니다. 이 책 속의 그림 중에는 작가가 아닌 책 주인이 그린 걸로 보이는 그림이 있다. 빈 얼굴 두 개 중 하나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데 다른 얼굴에는 눈과 눈썹과 코가 먹으로 그려져 있다. 이 책을 소장했던 사람이 위 얼굴 빈칸에 책의 설명대로 눈과 눈썹과 코를 그려 넣은 것 같다. 이런 낙서를 보는 것도 옛 책을 읽을 때의 즐거움 중 하나다.

내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바람 자체는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다. 밥 로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설명하며 그림 그리는 모습을 TV로 보면서 소파에서 잠들던 20세기 미국 사람이든, 인체 드로잉 매뉴얼을 따라 그리는 21세기 한국 사람이든, 자기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은 바람은 똑같다. 귀족이나 재벌처럼 특혜를 받는 소수만이 그림을 즐기는 게 아니라, 뜻있는 누구나 그림을 즐길 수 있었던 배경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상업 출판이기도 하다. 19세기의 일본 책에도 그 마음과 시대의 변화가 들어 있다.

Keyword

Credit

  • 에디터|박 찬용
  • 사진|정 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