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고급시계박람회 기념 시계 토크 3편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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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고급시계박람회 기념 시계 토크 3편

18개의 명품 시계 브랜드, 17개의 독립 시계 브랜드, 4일간의 일정, 고급 시계에 대한 이야기.

ESQUIRE BY ESQUIRE 2018.03.17

셋째 날

지라드 페리고 클래식 브리지

Girard Perregaux

박_ 17일 아침에는 지라드 페리고를 봤습니다.

신_ 아침부터 졸린 눈을 비비면서 비 오는 스위스의 날씨를 뚫고 왔더니 지라드 페리고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박_ 어땠어요?

신_ 지금 기억이 잘 안 나요.

박_ 그런데 제가 느끼기로는 SIHH나 바젤월드에서의 신제품 대부분은 지라드 페리고 같았어요.

신_ 그래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게 익숙한 브랜드가 아니어서 저의 기존 지식과 잘 결합이 안 됐기 때문이겠죠.

박_ 말씀대로 스위스의 고가 시계들은 자기 브랜드에 대해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떤 바람이 불어서인지 예거 르쿨트르라거나 IWC는 시계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전달될 장치를 만들었어요. ‘아, 멋있구나’, ‘IWC가 150주년이 됐구나’ 이런 식으로요. 지라드 페리고는 스스로의 특징적인 디테일을 더 발전시킨 시계를 선보였어요. 좋은 시계예요. 그런데 이런 시계가 편집장처럼 시계를 오랫동안 좋아하지는 않은 사람에게는 잘 와닿지 않는 거죠.

신_ 좀 알려주세요. 우리 독자분들 혹은 저를 위해서.

박_ 이 정도입니다. 지라드 페리고만의 특징이 있었고, 그 특징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신제품이 나왔다.

신_ 그게 뭔데요? 어떤 시계였지?

박_ 클래식 브리지라는 시계였죠. 시계 다이얼에 가로로 놓인 다리 모양의 브리지가 지라드 페리고의 상징인데 그걸 발전시킨 시계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플래티넘 트리 액션 투르비용, 투르비용을 이루는 축이 3개라는 겁니다. 벌써 재미없어하시잖아요. 이런 시계들이 나왔습니다.

 

피아제 알티플라노 울티메이트 910P

piaget

신_ 저는 피아제가 굉장히 여성스러워졌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박_ 실제로 CEO도 여성으로 바뀌었죠?

신_ 그런데 예전 CEO가 왔던데 SIHH에.

박_ 예전 CEO가 자신의 유작을 설명하는 것처럼 시계를 들고 왔죠.

신_ 얇아도 얇아도 정말 너무 얇은.

박_ 네, 2mm 정도로 얇은 시계였습니다.

신_ 시계 두께가 2mm? 가능합니까?

박_ 가능하다는 걸 보셨잖아요.

신_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피아제는 굉장히 페미닌한 시계 브랜드로 인상이 확 바뀌었던데. 얇은 시계에서만큼은 피아제가 비움의 미학을 아는 브랜드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박_ 고급 시계 브랜드는 다 각자 자기가 하고자 하는 영역이 하나씩 있어요. 편집장께서 좋아하시는 마블 히어로즈처럼요. 각자의 캐릭터를 가지고 갑니다. 태그호이어나 로저 드뷔는 레이싱이고요, 에르메스는 재치, 예거 르쿨트르는 메이커라는 캐릭터를 내세웠죠.

신_ 피아제는?

박_ 트로피컬. 열대 이미지. 그리고 기계식 시계는 얇다는 걸 강조합니다.

신_ 이게 어마어마한 기술력이잖아요? 그 얇은 시계 안에 모든 성능과 기능이 들어가 있고, 거기다 시계에 불필요한 부분은 완벽하게 덜어냈다는 게.

박_ 두께와 함께 여러 가지 기능을 덜어낸 시계죠. 지난번에도 나온 개념이었지만, 이번에 피아제가 얇은 시계를 만든 비결은 발상의 전환입니다. 보통 시계 케이스 안에 무브먼트가 들어가요. 자동차 엔진 룸 안에 엔진이 들어가는 것처럼요. 그런데 이번에 피아제는 엔진 블록과 엔진 룸을 일체화시킨 것처럼 무브먼트의 판과 케이스를 일체화시켰어요. 그래서 굉장히 얇아진 겁니다.

신_ 놀랍네요. 근데 얇은 게 좋은 거예요?

박_ 목표를 설정해놓고 그것을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거죠. 독 짓는 늙은이랑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_ 장인 정신.

박_ 구기 종목을 보고 ‘그깟 공놀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저는 그런 거랑 비슷한 거라고 봅니다.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걸 하는 당사자나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큰 거죠.

신_ 그리고 이걸 제외하면 굉장히 트로피컬하고 페미닌했어요.

박_ 사실상 시계 브랜드의 쇼룸으로 보이지 않았죠.

신_ 열대 섬의 휴양지 같은 입구가 있고. 부스 안은 물속 같은 느낌.

박_ 랑에 운트 죄네와 반대인데요. 랑에 운트 죄네는 들어가자마자 엄청난 크기의 시계 조형물이 있었죠. 피아제에 들어가면 시계라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_ 시계가 없는 시계 부스, 뭘 뜻하는 걸까요?

박_ 완전히 이미지 마케팅으로 가겠다는 거죠. 패션 브랜드의 문법을 따르겠다는 선언 아닐까요?

신_ 피아제는 피아제다. 실제로 신제품을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했고, 그리고 피아제라는 브랜드의 밸류를 고려하면 그 전략도 굉장히 효과적일 거라고 봐요.

박_ 사실 피아제는 몇 년 전 폴로S라는 새로운 남성 시계를 출시했어요. 이걸 했으니 이번에는 이런 걸 좀 해보자 생각했을 수도 있죠.

 

로저 드뷔 엑스칼리버 스파이더피렐리-오토매틱 스켈레톤

roger dubuis

신_ 물속에서 물장구치고 수면 아래에서 열대 섬을 만끽하고 났더니….

박_ 확실히 그런 식의 이야기를 정말 좋아하시는군요.

신_ 네, 맞아요. 자, 타이어 랜드. 힘과 연비의 현장으로 갔습니다.

박_ 네, 로저 드뷔는 그런 콘셉트였습니다.

신_ 로저 드뷔는 특히 스트랩이 특별했죠. 러버 스트랩이었는데, F1 그랑프리에서 우승한 자동차의 타이어를 활용한 거였다면서요.

박_ 우승한 자동차의 피렐리 타이어 일부를 떼 왔죠. F1 자동차의 타이어 브랜드가 피렐리예요. F1 자동차의 타이어는 굉장히 첨단 타이어라서 성분은 비밀이래요. 끝나면 다 회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로저 드뷔가 피렐리랑 얘기를 잘해서 그 타이어의 일부로 스트랩을 만든 거라고 하더라고요.

신_ 로저 드뷔는 이 시계를 한정된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만들고, 이 시계를 구매한 사람들에게 F1 그랑프리를 특별한 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죠.

박_ 한정판 입장권이라고 볼 수 있죠.

신_ 그 러버 스트랩에는 타이어의 일련번호가 붙어 있고, 그래서 영원한 인증이 되기도 하고요.

박_ 로저 드뷔는 신기하게도 시계에 대한 이야기만큼이나 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죠. 줄과 시계를 통해서 할 수 있는 이벤트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요.

신_ 로저 드뷔에는 상징적인 디자인이 있어요. 그게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데 그 안에 스토리텔링을 붙이기 시작했죠. F1이라고 하는, 피아제와는 정반대로 굉장히 남성적인 이미지의 스토리텔링을 붙였습니다. F1에 대해 갖고 있는 로망을 브랜드에 결합시켰죠. 또 하나는 F1 그랑프리에서 타이어를 교체하는 시간이 1초도 안 걸렸어요. 그 장면을 보여주고 시계 스트랩을 교체할 때 걸리는 시간을 비교하는 게 인상 깊었어요.

박_ 그런 식으로 이미지를 계속 덧붙이는 거죠. 첨단의 이미지와 시곗줄을 바꾸는 정도의 이미지를.

신_ 제가 거기서 하나 궁금해졌는데, 간편하게 스트랩을 바꿀 수 있죠. 하지만 그 러버 스트랩은 한정판인데, 그걸 뭘로 바꾸나요?

박_ 그러니까 시계 회사에서 계속 공급하겠죠. 고가의 러버 스트랩을.

신_ 역시 스트랩의 시대.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CEO 장마르크 폰트로이가 이 어려운 협상을 해냈다는 걸 강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스토리텔링에 얼마나 애정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어요. SIHH에서 스포츠처럼 다른 비즈니스와 브랜드를 접목시켜 스토리텔링을 하는 브랜드가 꽤 있었는데, 로저 드뷔가 가장 강력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박_ 로저 드뷔 측에서 그 말을 들으면 기뻐하겠네요.

 

랑에 운트 죄네 1815 ‘오마주 투 발터 랑에’

A. Lange & SÖhne

박_ 그리고 랑에 운트 죄네로 갔어요. 아까 감동적인 시계로 꼽으셨던.

신_ 어땠어요?

박_ 제게 개인적으로 랑에 운트 죄네는 좀 화려한 느낌이 있어요.

신_ 사실 화려하다기보다는 정갈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박_ 정갈하죠. 정갈함을 화려하게 표현한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폰트 디자인을 봤을 때 끝부분마다 고전적인 터치가 들어 있죠. IWC와는 완전히 다른 디자인 언어죠. 시침과 분침의 디자인 요소도 정갈하지만 화려하게 깎아냈죠. 양 끝이 날카롭고 짧아지는 칼날형 디자인을 택했어요. 많은 시계가 원가를 절감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데 랑에 운트 죄네는 그런 유행을 따르고 있지 않아요.

신_ 그런 시침과 초침이 창, 칼 같은 느낌을 주고, 그 날카로움 덕에 ‘예리하게 세공한 시계’라는 이미지가 있죠.

박_ 세공 기술에 자신이 있는 브랜드만 할 수 있는 접근법입니다. 랑에 운트 죄네는 되게 어렵게 만든 시계예요. 그걸 알아보는 눈과 돈이 있는 사람들이 비싸지만 덜 유명한 이 시계를 사겠죠. 그리고 아까 감동하신_ 시계가 있었어요. 오마주 투 발터 랑에.

신_ 아름다운 시계라고 생각합니다. 정갈하고.

박_ 정갈한 동시에 보다 보면 디테일이 화려한 시계죠. 요즘 디자인 문법으로는 잘 안 만드는 시계이기도 해요. 그래서 멋있고요. 랑에 운트 죄네만의 디자인 언어라는 게 분명히 있습니다.

신_ 저는 매력적이라고 느꼈습니다.

박_ 아, 편집장께 잘 어울릴 거 같습니다. 한번 보면 정갈한데, 자세히 보면 화려한 시계거든요. 들여다볼수록 화려해서 구경할 요소가 아주 많은 시계입니다.

신_ 정갈해 보이는 것은 군더더기가 없기 때문이고, 요소요소에는 굉장한 세공, 미세 세공이 들어간 시계. 마음에 들어. 좋습니다.

 

오데마 피게 로얄 오크 더블 밸런스 휠 오픈워크

Audemars Piguet

박_ 다음은 오데마 피게 순서였죠.

신_ 오데마 피게는 박찬용 에디터가 좋아하는 시계 아닌가요?

박_ 저는 개인적으로 오데마 피게의 고집과 방향성에 애착이 있습니다. 캐릭터가 확실하니까요.

신_ 어떤 캐릭터인데요?

박_ 오데마 피게가 처음으로 철제 고급 손목시계를 만든 회사예요.

신_ 철제 고급 시계.

박_ 그 전까지만 해도 철은 고급 시계의 소재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오데마 피게가 생사 존립의 기로에 있을 때, 100% 스틸로 만든 다이버 시계를 파텍 필립보다 비싼 값에 내놨습니다.

신_ 그게 그렇게 팔려요? 철인데?

박_ 그게 아주 많이 팔려서 오데마 피게가 회생한 겁니다. 그 시계가 유명한 로얄 오크예요.

신_ 아, 그게 그 시계군요. 사실 오데마 피게는 마치 입을 앙다문 사나이 같은 그런 시계인데. 보석 세공을 한 오데마 피게 시계는, 이거야말로 화려함의 극치구나 싶더군요.

박_ 어느 나라든 화려한 면이 있고 절제된 면이 있는데, 저는 오데마 피게가 스위스의 화려한 면모를 잘 드러내는 시계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눈여겨보는 것이, 오데마 피게가 몇 년 전부터 흑인을 캠페인 모델로 많이 쓰고 있다는 거예요.

신_ 이번엔 르브론 제임스였죠.

박_ 맞습니다. 몇 년 전부터 오데마 피게가 르브론 제임스라든지 NBA 스타, 흑인 스타를 많이 쓰고 있어요.

신_ 아프리카계 시장에서 오데마 피게가 각광을 받고 있는 걸까요?

박_ 선후 관계는 모르겠지만, 이런 캐릭터를 가진 사람을 모델로 삼는 것일 수도 있고요. 우리는 이쪽으로 나간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과 합작을 해서 잘되는 걸 수도 있고.

신_ 결과적으로 그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시계의 화려한 면면도 예상 소비자층과 이어질 수 있겠군요.

박_ 실제로 오데마 피게는 그런 사람들하고 잘 어울려요. 젊고 성공했고 운동선수처럼 근육이 탄탄한 사람들 있잖아요. 예전에 어떤 국가대표 축구 선수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분도 오데마 피게를 차고 있더라고요. 굉장히 잘 어울렸어요.

 

파네라이 루미노르 듀에 3 데이즈 오토매틱 아치아이오 38mm

Panerai

신_ 그래서 그 막강한 오데마 피게를 넘어서고는 파네라이에 갔죠.

박_ 파네라이도 이번에 바쉐론 콘스탄틴과 함께 꽤 화제가 된 브랜드였습니다.

신_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빅 사이즈 시계를 만들던 파네라이가 38mm 시계를 내놨는데, 그게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박_ 마음에 드셨나요?

신_ 네, 전 마음에 들었어요. 파네라이 특유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미니미가 되어버린 느낌?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박_ 실질적으로 되게 좋은 선택일 거예요. 왜냐면 기존 파네라이는 무거웠으니까요. 너무 커서 어울리지 않았던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겠죠.

신_ 저는 38mm 파네라이는 <에스콰이어>의 우먼 이슈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이탈리아의 남성적 시계를 상징했던 파네라이가 여성도 좋아할 만한 제품을 낸 거죠. <에스콰이어> 2월호 우먼 이슈처럼.

박_ 사실 파네라이는 ‘파네라스티’라고 불리는 마니아 비즈니스를 하던 회사예요. 한 번 물건을 산 사람들이 재구매하는 비율이 되게 높은 브랜드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브랜드에서 작은 시계를 냈으니 흥미롭죠. ‘우리가 그런 시장만 보고 있진 않겠다’는 선언인지, 그 선언이 성공할지는 또 지켜봐야겠죠.

신_ 다시 봐도 매력적인 시계입니다.

박_ 파네라이에는 되게 높은 점수를 주시네요.

신_ 다른 브랜드에도 후한 점수 줬어요.

박_ 보메 메르시에에는 별로 후한 점수 안 주셨잖아요.

신_ 나빠, 진짜. 뭐, 네, 파네라이 사랑해요.

 

리차드 밀 RM 53-01 파블로 맥도너

Richard Mille

박_ 저는 리차드 밀도 굉장히 인상적으로 봤어요.

신_ 그때 잠깐 리차드 밀이야말로 진정 막강한 시계 브랜드라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박_ 지금 세계에서 가장 도도하게 브랜드를 운영하는 회사입니다.

신_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요?

박_ 저도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어요. 시계가 좋은 건 물론인데, 편집장께서는 잘 아시겠지만, 물건이 좋은 것과 인기가 많은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잖아요.

신_ 그렇죠.

박_ 리차드 밀 시계 좋아요. 그런데 리차드 밀처럼 시계에 새로운 개념이나 방향성을 부여하는 회사는 또 있어요. 그럼에도 리차드 밀 같은 지위를 가진 회사는 리차드 밀뿐이에요.

신_ 리차드 밀의 지위는 어떤 건가요?

박_ 왕자죠. 제일 싼 시계가 8000만원.

신_ 하지만 그래도 팔린다?

박_ 없어서 못 판대요.

신_ 저는 시계에 관해서는 걸음마 단계여서 대중적인 시계와 그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이해하는 걸 좋아하지만, 오랫동안 시계를 좋아했던 마니아들은 리차드 밀로 가는 걸까요?

박_ 리차드 밀은 새로운 귀금속의 지위로 가는 것 같기도 해요.

신_ 그게 뭔데요?

박_ 사실 브랜드가 진짜로 잘되려면 팬이 사는 게 아니라 팬이 아닌 사람들이 사줘야 해요. 그래야 뜨기 시작해요. 지금 리차드 밀을 찾는 사람들은 시계 마니아만은 아닌 것 같아요. 시계 마니아도 물론 있겠지만.

신_ 그러면요?

박_ 롤렉스를 차는 사람 중에서 롤렉스의 이런저런 면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은 롤렉스 애호가나 소지자 중 일부겠죠. 리차드 밀 역시 리차드 밀의 상징성, 리차드 밀의 기술, 리차드 밀의 세계관 같은 걸 이해하고 사는 게 아니라, ‘아, 저게 제일 비싸고 잘나가는 거네’라는 인식이 생긴 것 아닐까 싶어요. 돈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요. 자동차 마니아만 포르쉐를 타는 게 아닌 것처럼요. 시계는 인기가 생기면 물건을 넘어서 상징이 돼요. 저는 리차드 밀이 어느 정도 그 지위까지 갔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말씀하셨던, 원가보다 훨씬 비싼 가치를 만들어내는 연금술에 성공한 브랜드가 리차드 밀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_ 거기에 한 가지 덧붙이면, 어떤 산업군이든 독특한 물건을 알아보고 산 후에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소비자층이 있어요. 수는 적지만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하죠. 목소리가 커요. 그 시장을 잡게 되면 가격을 높게 붙여도 사람들이 사는 브랜드가 되곤 하죠. 전자 제품 시장에도, 자동차 시장에도 그런 기업이 있어요. 시계 시장에서는 리차드 밀이 그런 브랜드 아닐까 싶습니다.

박_ 신품 시계 시장에서는 그렇겠네요. 시계는 빈티지 시장도 굉장히 크니까요.

신_ 빈티지를 말씀하시니 덧붙이고 싶은데요, 제가 SIHH를 같이 다니며 이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계 시장은 새 제품이 등장하면 구제품이 사라지는 시장이 아니에요. 신제품이 등장하고 빈티지 제품의 가격이 높아지면 점점 시계 시장이 포화돼요. 하지만 기존 브랜드를 가진 사람이 그 브랜드의 신제품을 사야 하고, 그러다 보니 시장의 특성이 독특해지는 겁니다. 옛날 제품이 시장에서 사라지지 않는 거예요. 십수 년 전 제품이라도.

박_ 50~60년 전 제품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신_ 자동차 시장에도 클래식 카 시장이 있지만 그건 달라요. 오래된 자동차는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신제품에 비해 불안하거나 안전 문제가 생길 수 있죠.

박_ 가장 큰 부분은 정부 규제입니다. 자동차는 개인이 쓰는 기계 중 가장 규제가 많은 기계에 속해요. 안전이나 환경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시계는 몇십 년이 지나도 비용을 들이면 고칠 수 있어요. 하지만 오래된 자동차는 돈만으로는 즐길 수 없어요. 오래된 자동차를 운용하려면 이것 말고도 여러 조건이 필요해요. 부품이 계속 들어가야 하죠. 빈티지 카 타이어 전문 제조사도 있어야 해요.

신_ 반면에 시계는 이런 부분이 있지 않나요? 자동차는 기술의 혁신_ 속도가 굉장히 빠른 산업이에요. 시계도 혁신이 있지만 자동차의 혁신에 비하면 보폭이 좁은 거 아닐까요? 시간을 알려주는 방식이나 시계의 재질에서 혁신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자동차만큼 획기적이지는 않은 것 같아요.

박_ 제 생각은 정확히 반대입니다. 자동차는 지금 내연기관에서 전기 자동차로 옮겨가기 시작했죠. 시계를 자동차로 치면 전기 자동차화가 다 끝난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디지털 시계가 나왔고, 스마트워치까지 나왔어요. 심지어 디지털 시계는 기술이 보급돼 가격까지 낮아졌죠. 2만~3만원 정도 하는 카시오 전자 손목시계도 방수 성능이 아주 좋아요. 시간의 정확성과 기능만 놓고 보면 SIHH에 나와 있는 어떤 시계보다도 2만원짜리 카시오 시계가 좋아요. 기능만을 놓고 보면 손목시계는 진화가 끝난 분야예요. 고급 손목시계 분야는 옛날 기술을 기반으로 각자의 브랜드 색을 가지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의 싸움이에요.

신_ 혁신이 끝났으니 더 이상 기술혁신으로 경쟁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브랜드 스토리로 경쟁할 수도 있고요. 그러니 예전의 빈티지 시계가 더 고가에 팔리기도 하는 시장이 된 거죠.

박_ 빈티지 시계가 잘 거래되는 게 신품 시계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에요. 빈티지 시계의 거래가가 신품 시계의 중고 거래가에 영향을 미치고, 신품 시계의 중고 거래가는 신품 시계의 인기와 직결되니까요.

신_ 결국은 다 맞물려 돌아가는 시장이군요. 신제품은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출시해 수량을 조절하기도 하고요. 시계를 만든다는 건 무브먼트를 만들고 디자인을 하고 스트랩을 어떤 가죽으로 만드느냐의 문제겠지만, 결국 시계 시장 자체를 경제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겠어요.

박_ 비즈니스 모델을 짤 줄 알면 좋겠죠.

신_ 시계는 독특한 게, 보석과 비슷한 거예요. 금, 은, 다이아몬드 같은. 그런데 이건 다 한정되어 있죠. 그리고 채굴을 해야 해요. 만들 수 없는 보석이에요. 반면 시계는 업계의 메이커들이 마음껏 만들 수 있어요. 그러니까 수량을 조절하기도 하는 거죠. 많이 만들 수도 있고, 적게 만들 수도 있고.

박_ 보석이 될지 아닐지는 소비자가 정하는 거죠.

신_ 여기 SIHH에 나온 시계는 다 보석이죠.

박_ 여기서 소비자가 정한다는 건, 어떤 시계가 1억원의 가격을 달고 나왔을 때 소비자가 1억원을 내고 사야 보석이 된다는 거예요. 팔리지 않으면 1억원짜리 보석이 아니죠.

신_ 그러니까 여기는 그런 보석의 수량을 마음껏 조절해서 만들 수 있는 집단, 사람들이 모인 곳이군요. 마치 연방준비제도처럼, 이사회 같은 모임이 있어서 전 세계의 보석에 해당되는 고가 시계의 수량을 마음껏 조정하고 가격을 매기고요. 방금 우리는 어설프지만 시계 경제학이라는 이야기를 나눠본 것 같습니다.

마지막 날

율리스 나르당 프릭 비전 오토매틱

Ulysse Nardin

박_ 그리고 마지막 날, 율리스 나르당에 갔습니다. 율리스 나르당은 에로틱 피스에 나름의 역사가 있어요. 에로틱 피스를 만드는 시계 브랜드 중에서도 굉장히 창의적인 시퀀스의 에로틱 피스를 만들어요.

신_ 에로틱 피스가 뭔데요?

박_ 미니트 리피터라고 현재 시각을 종으로 알려주는 시계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타악으로 인한 음이 생기죠. 그 음에 맞춰서 성적인 동작을 하는 그런 시계들이 있습니다.

신_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섹스 칼럼니스트인 박찬용 에디터는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박_ 뭘 이렇게까지 하나 싶더라고요. 그리고 스위스 시계가 정말 범위가 넓구나 싶었어요. 이 왼쪽, 오른쪽 보시면 이게 어떻게 같은 브랜드의 시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_ 그러게 말이에요. 참 놀라워요.

박_ 율리스 나르당은 동시에 프릭이라는 자사의 대표적인 시계의 새로운 버전을 내놨습니다. 구조부터 굉장히 독특한 시계예요.

신_ 반면에 에로틱 피스의 경우에는….

박_ 정말 옛날에 만든 것처럼 고전적으로 생겼죠.

신_ 이거 사실상 분침, 시침이… 아, 여긴 있군요.

박_ 네, 있습니다.

신_ 하지만 미니트 리피터. 특정 시간이 되면….

박_ 소리가 나면서 시계 다이얼 안에 있는 모델들이 일련의 동작을 취합니다.

신_ 요런 걸 주제로 섹스 칼럼을 써볼 생각은 없어요? <에스콰이어>에. 시계 자체에 나오는 에로틱 피스에 대한 묘사와 설명을요. 오랜 역사가 있는 것인데.

 

파르미지아니 칼파 크로노

Parmigiani

박_ 저야 하라면 해야죠. 그래서 이제 SIHH의 마지막은 파르미지아니입니다. 파르미지아니는 어떻게 보셨어요?

신_ 파르미지아니는 무브먼트 플레이트까지 골드로 만들었죠. 이거야말로 정말 고급 시계의 교과서 같은 브랜드구나 싶었어요.

박_ 저도 파르미지아니나 지라고 페라니처럼 이미지 마케팅을 덜 하는 것에 더 정이 가기도 해요. 전통적인 시계 브랜드가 해오던 것에 충실한 것 같아서요. 사실 무브먼트 플레이트가 금이라는 건 아무도 모를 텐데. 차고 있는 나도 잘 몰라요.

신_ 안에 은이 섞여 있다고 해도 모를 거고.

박_ 하지만 정말 좋은 물건은 아무도 모르는 부분도 포기하지 않는 거거든요.

신_ 어우, 스티브 잡스?

박_ 그 사람도 비슷한 말을 했다고 했죠.

신_ 맞아요. 컴퓨터의 보이지 않는 전선까지도 신경 써야 한다.

박_ “누가 신경 씁니까?”라고 했을 때 “내가 신경 씁니다”라고 말했다고.

신_ 파르미지아니는 무브먼트 플레이트까지 골드, 굉장히 고급스러웠습니다.

 

총평

박_ 그래서 이번 SIHH는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18개의 브랜드가 보여주고자 한 방향성이 완전히 갈라졌어요. 한 축에는 기존 이미지를 많이 내려놓으면서까지 새로운 시장으로 나아가려는 브랜드가 있었죠. 밀레니얼이라든지 여자라든지. 아니면 조금 더 보수적인 시각으로 브랜드를 운용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런 신제품을 내놓은 브랜드의 판매 추이를 살핀다거나, 브랜드의 이미지 자체가 어떻게 바뀌는지 알아보는 것도 아주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신_ 나흘 동안 SIHH 여행을 독자분과 함께 떠나봤는데요, 총평을 해볼까요?

박_ 먼저 부탁드리겠습니다.

신_ 박찬용 에디터와 스위스에서 보내면서 참 화목했어요. 총평해주세요.

박_ 오랜만에 제네바에 가서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SIHH가 몇 년 전처럼 시계 기술에 치중한 브랜드만 나왔다면 솔직히 별로 재미가 없었을 것 같기도 해요. 시계 기술로 할 이야기는 많을 테지만, 그게 많은 사람에게 재미있을 거라고는 확신하지 못하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올해 SIHH는 전통적인 시계 애호가가 봤을 때 마음에 안 드는 시계가 많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세상에는 전통적인 부자 시계 애호가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모든 사람이 시계를 공부해서 시계의 모든 부분을 살피면서 3000만원짜리 시계를 살 수는 없어요. 스위스의 시계 브랜드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변한 세상에 맞춰서 뭔가를 준비하는 걸까 싶은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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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신 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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