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길을 잃었을 때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적잖은 방송사가 언론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시각을 찾으려 든다. | 저널리즘,언론,팟캐스트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앉은자리에서 1면부터 32면까지 정독해본 사람은 안다. 신문은 생물이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듯 신문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프레임이 다 다르기에, 같은 사안도 어떤 프레임을 통과하느냐에 따라 정반대로 해석되기도 한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 리셉션장에서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의 인사를 거절한 사안을 예로 들어보자. 보수 언론은 ‘북미 화해 무드 조성에 몸이 달은 문재인 정부가 너무 성급하게 밀어붙이다 결례를 범했다’고 했고, 진보 언론은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자신의 불쾌함을 최소한의 외교적 고려도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결례를 범했다’고 해석했다.신문을 꾸준히 읽어본 사람들은 같은 신문 안에서도 섹션에 따라 미묘하게 논조가 달라지는 걸 볼 수 있다. 정치·사회면에서는 ‘멸공의 횃불’을 제창하다가 문화면에 오면 죄르지 루카치와 체 게바라의 이름을 낭만적인 어조로 언급하는 나, 세상의 탐욕 앞에서 인간 됨됨이란 무엇인가 고민하는 듯하다가 경제면에서는 광교신도시 신축 상가 분양 소식을 소개하며 ‘임차 수요가 풍부한 안정성 높은 상가’라 수식해주는 를 보고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는 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마치 투표는 정의당에 하지만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이슈 앞에서는 어쩐지 한없이 보수적으로 구는 우리 이모처럼, 신문 또한 사안에 따라 취하는 입장이 다르다.이처럼 신문은 저마다의 편향과 자기모순을 안고 그 필터를 거친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이고, 그 필터조차 사안마다 조금씩 달라 불균질하다. 그렇기에 그 필터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이 기사는 전체 지면 중 몇 번째 면에 배치되었나? 그 옆에는 어떤 논조의 기사가 붙어 있나? 평소에 이 사안에 대해 뭐라고 바라보던 매체였는가? 과거 비슷한 일이 있었을 때 이 신문은 어떤 태도로 사안을 바라보았나? 이 모든 정보를 취합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기사가 의미하는 바를 읽어낼 수 있다. 신문을 읽는 이들이 신문을 꾸준히 읽으라거나, 논조가 각기 다른 신문을 최소한 두 개 이상 비교해가며 읽으라고 추천하는 건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TV 뉴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리포트 하나만 따로 떼어서 보고 그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 리포트는 전체 뉴스 중 어느 순서로 보도되었는지, 그 리포트를 보강해주는 부수적인 리포트가 따라붙었는지, 평소 그 채널의 보도 태도는 어땠는지를 이해한 상태로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건 전혀 다른 체험이다. 한 시간짜리 TV 뉴스가 담아낼 수 있는 정보의 양은 32면짜리 신문에 비해서는 적기에, 더욱더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당 채널의 다른 프로그램과 연계해서 읽어내는 시야가 필요하다. 같은 채널의 심층 취재 프로그램은 어떤 태도로 사안을 다뤘는지, 아침 뉴스의 논조와 저녁 타임 메인 뉴스의 논조는 어떻게 다른지.이 모든 뉴스 소비 방식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이 언론사 뉴스를 큐레이션하기 시작하며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뉴스나 신문을 앉은자리에서 진득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는 이들은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아침 신문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던 이들은 이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포털에 들어가 기사를 소비한다. 기사 단위로 쪼개져서 서비스되는 포털 뉴스의 특성상 각 매체가 지면 편집을 어떤 식으로 했는지 확인하는 길은 요원해졌고, 사람들은 이제 평상시 매체가 취하던 입장과는 무관하게 각 기사 단위로 어떻게 보도했느냐를 근거로 매체 전체를 판단하기 시작한다. 언론사들을 제 입맛대로 길들이려던 보수 정권 9년 동안 꾸준히 권력과 대립각을 세우며 보도 채널의 자존심을 지킨 CBS 는 북한 응원단이 평창에 들고 온 ‘미남 가면’을 ‘김일성 가면’으로 오인해 낸 오보 하나로 ‘기레기’로 몰렸다.이해는 한다. 여러 신문을 돈 주고 구독하며 비교해서 읽는 것보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통해 뉴스를 소비하는 게 훨씬 빠르고 저렴하다. 게다가 지난 20여 년 사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언론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생산되는 정보의 양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정보의 총량이 증가하면 그중 무엇을 읽고 무엇을 믿을 수 있을지 판단하는 데 드는 품도 늘어나는 법. 그런 환경에서 신문이든 뉴스든 비교해가면서 꾸준히 읽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매체를 통으로 꾸준히 읽어 매체의 성향을 이해하고 그 맥락 안에서 정보를 취하는 게 어려워진 마당에, 권력이 언론을 제 입맛대로 통제하려고 했던 몇 년을 보내며 기성 언론에 대한 대중의 신뢰도 또한 급격하게 하락했다. 언론사를 총체로 바라보는 시야는 잃어버리고, 언론 전반에 대한 불신은 점점 짙어져만 가니, 기사 하나만 잘못 나와도 화를 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본디 신흥 종교는 기성 종교가 힘을 잃고 세상이 번잡해 사람들이 윤리관의 혼돈을 겪을 때 세를 얻는 법이다. 평균적인 시민들의 뉴스 독해력이 하락하고 기성 언론의 신인도가 떨어진 틈을 타, 팟캐스트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정치·시사 팟캐스트들은 기성 언론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기반으로 성장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기성 언론의 논조를 분석해 그들의 진짜 속내를 읽어낼 수 있다고 속삭였다. ‘비대해져 부패하고 낡아버린 언론 권력과 그런 권력이 가린 진실을 정확하게 이해해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독립 저널리스트’라는 서사는 빤하지만 매력적이었다. 수많은 팟캐스트가 대안 언론을 자처하며 인기를 끌었고, 직접 신문과 TV 뉴스를 챙겨 볼 여력이 없어진 이들은 팟캐스트 마이크 앞에 앉은 ‘시사평론가’와 ‘선수’들에게 세상을 분석하는 일에 대해 아웃소싱을 주었다.물론 전통적인 저널리즘이 미처 수행하지 못하는 빈자리를 팟캐스트가 채우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다. 기성 언론에서 다루지 못하는 전문 분야의 이야기, 자본주의의 논리로 기성 방송사에서라면 편성받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팟캐스트를 창구로 세상에 나오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팟캐스트가 전통적인 저널리즘을 대체하려 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심각해진다. 전통적인 저널리즘 훈련을 받아본 적 없는 이들이 언론이 갖춰야 할 취재 윤리와 보도 윤리를 갖추지 못한 채 늘어놓기 시작하는 수많은 음모론이 진실인 양 생명을 얻는다. 세월호 잠수함 충돌설, 세월호 고의 침몰설, 18대 대선 개표 조작설 등 제대로 된 저널리스트라면 근거 부족으로 애초에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했거나 진작에 폐기했을 음모론이 마치 대단히 의미 있는 가설인 것처럼 오랜 세월 유통된 건, 팟캐스트를 저널리즘의 보완재가 아닌 대체제로 바라본 이들이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방송사들은 훈련해 키워낸 저널리스트들과 함께 자사의 저널리즘 원칙으로 이 난국을 헤쳐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이 부진하던 시절 치고 올라온 팟캐스트계의 스타들과 그들의 화법을 수혈해 눈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려는 게으른 근시안만이 남았다.저널리즘이 처한 이와 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기성 언론사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제정신이 박힌 저널리스트라면 각 언론사들이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취재 윤리와 보도 윤리를 더 중하게 여기고, 경마식 보도 경쟁을 지양하고, 타사의 보도를 무턱대고 따라가는 대신 자신들이 취재한 사실을 근거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점검하고, 더 이상 매체를 통으로 읽지 않는 독자들을 위해 매 기사 안에서 자신들의 관점을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팟캐스트가 기존의 저널리즘을 위협할 만큼 성장한 상황이라면, 전통적인 저널리스트들이 제 역량을 키워 신뢰를 되찾고 그 도전에 응수하는 게 상식적으로 옳은 일이다.불행히도 한국의 언론사들, 특히 방송사들은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간다. MBC 의 주진우 기자는 취재 윤리와 보도 윤리를 강도 높게 교육받은 현직 저널리스트이기라도 하지, 지난 13년 동안 반복적으로 음모론을 제기하고 그 음모론이 진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도 그에 대해 책임진 이력이 없는 김어준은 TBS 라디오 과 SBS 를 진행하는 중이다. 정봉주 전 의원은 SBS 라디오 와 TBS 를 진행한다. 보수 언론도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다. 극우 보수 정치평론가 신혜식과 변희재를 언론인 패널이랍시고 에 데려다 썼던 TV조선의 사례, 정미홍을 당시 에 섭외했던 채널A의 사례는 처참하기 짝이 없다. 방송사들은 이제 자사가 훈련해 키워낸 저널리스트들과 함께 자사의 저널리즘 원칙으로 이 난국을 헤쳐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이 부진하던 시절 치고 올라온 팟캐스트계의 스타들과 그들의 화법을 수혈해 눈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려는 게으른 근시안만이 남았다. 물론 외부의 신선한 시선을 수혈해 자사의 보도 논조에 혁신을 꾀하는 모든 시도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당장에 방송사들의 취재 윤리와 보도 윤리가 자력으로 회복이 어려워 보일 만큼 바닥까지 떨어진 것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제천 화재 참사를 다루며 애꿎은 소방관들을 비판하다가 욕먹은 MBC 뉴스, 문단 내 성폭력 사태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다짜고짜 여성 문인에게 전화해 취재 협조 의사를 구하지도 않고 질문을 퍼부어댄 SBS 기자 등의 사례를 보면, 팟캐스트에서 인기를 얻어 방송 뉴스 프로그램으로 올라온 이들의 언론 윤리 부재를 탓하기도 민망하다. 어차피 자기들도 언론 윤리는 바닥이니, 언론 윤리를 훈련받은 적이 없는 이들을 데려다 써도 그만이란 걸까.그렇다고 저널리즘 훈련이나 언론 윤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내가 언론들의 속내를 분석해 당신에게 진실을 알려주겠다’, ‘기성 언론이 말하지 않는 진실을 들려주겠다’ 같은 태도로 대체한 이들에게 마이크를 맡기기 시작하면 끝은 필연적으로 저널리즘의 몰락일 수밖에 없다. “기자가 아니라서 정치적 중립을 지킬 이유가 없다”는 말을 태연하게 하는 숀 해니티, 제 마음에 안 드는 발언을 하는 발언자를 향해 “닥치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던 빌 오라일리 같은 이들이 득시글거리는 미국 를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너무 먼 이야기 같은가? 기성 언론사들이 오보를 내면 SNS에 신상을 털어 올리는 이들이, 김어준이 “미투 운동 같은 게 한국에는 없었다”고 말하는 걸 두고는 “‘#OO_내_성폭력’ 운동을 널리 알리지 못한 이들의 무능함이 문제지 김어준 잘못이 아니다” 운운하며 피의 실드를 치는 걸 보면,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