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보드의 나비효과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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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보드의 나비효과

뮤지션들의 앨범이 길어지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ESQUIRE BY ESQUIRE 2018.03.28

2018년 3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그룹을 하나만 꼽는다면 누구일까? 나는 주저 없이 랩 트리오 미고스(Migos)를 꼽겠다. 힙합에 대한 편애가 아니다. 지금 그들은 팝 세계를 통틀어서도 가장 뜨거운 그룹이니까. 미고스는 얼마 전 세 번째 정규 앨범 를 발표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앨범 이름도 아니고 앨범 커버도 아닌, 트랙 수다. 애플뮤직에 따르면 이 앨범의 정보는 다음과 같다. 총 24곡, 러닝타임 1시간 45분. 이 숫자는 곧바로 이런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요즘 같은 싱글&스트리밍 시대에 24곡을 채워서 2시간 가까운 앨범을 냈다고? 이런 짓은 1990년대에도 안 했는데?’ 생각은 계속 이어진다.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한 거지?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그룹이 굳이 이럴 필요가 있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런 건가? 이미 돈은 벌 만큼 벌었으니 작품으로 승부하겠다는 건가? 쪼잔하게 꼼수 안 부리고 24곡을 꽉꽉 채워서 한 번에 내겠다는 건가? 뭔가 멋있는걸.’

사실 이런 느낌의 원조는 드레이크다. 그의 앨범 는 총 19곡, 러닝타임 1시간 19분이다. 는 한술 더 떠 총 22곡, 러닝타임 1시간 21분이다. 이 앨범을 들으며 나는 잠시 드레이크에게 경의를 표한 적이 있다. 노파심에 말하자면 ‘앨범 단위’의 앨범을 뮤지션을 평가하는 척도로 삼을 필요는 없다. 그건 절대 선이 아니다. 하지만 드레이크의 행보는 분명한 귀감이 된다고 생각했다. 세계에서 가장 ‘잘 파는’ 뮤지션이 보여주는 ‘예술적’ 행보로서 말이다. 그러나 나의 환희는 오래가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번에도 엄마 말이 맞았다. 엄마는 어린 내가 세상을 너무 순수하게 바라본다며 걱정하시곤 했는데, 여전히 나는 그대로다. 알고 보니 ‘긴 앨범’ 뒤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음악적 이유라기보다는 산업적 이유가.

이것을 힙합의 장르적 특성으로 조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힙합 앨범의 평균 러닝타임은 다른 장르의 앨범보다 긴 편이다. 오래전에 들었음에도 여전히 기억나는 말이 있다. 록과 팝에 대해 주로 글을 쓰는 음악평론가가 나에게 했던 말이다. “래퍼들은 왜 이렇게 트랙을 많이 집어넣는 거야? 솔직히 좀 넘친다는 느낌이 들어. 10곡에서 12곡 사이가 딱 좋은 것 같아.” 힙합 앨범이 긴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최대한 열심히, 많이, 자주 하는 것이 옳다는 흑인 청년들의 모토 ‘허슬(hustle)’이 힙합 문화의 미덕으로 자리 잡았다는 해석도 유효할 것이고 잡다한 인트로와 스킷(노래와 노래 사이를 연결하는 짧은 트랙)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미고스나 드레이크의 최근 앨범을 힙합의 전통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참고 사항은 될 수 있지만 논의의 핵심은 아니다. 또 래퍼들만 앨범을 길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라나 델 레이의 최근작 도 러닝타임이 1시간 12분이고 에드 시런의 <÷>(2017)도 59분이다. 위켄드의 는 1시간 8분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스타’ 뮤지션의 문제다. 빌보드 차트를 기민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의 공통적인 행보라는 이야기다.

모든 사단은 빌보드 차트의 집계 방식에서 출발한다. 2014년 빌보드는 종합 앨범 순위인 ‘빌보드 200’에 스트리밍 횟수를 반영하기로 발표했다. 기존의 앨범 판매량 집계 방식에 더해 시대의 추세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바뀐 방침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한 앨범에서 음원 10곡이 다운로드되면 앨범 1장이 판매된 것으로 집계한다. 그리고 역시 한 앨범에서 노래가 1500회 스트리밍되면 앨범 1장이 판매된 것으로 집계한다. 그러니까 10곡이 수록된 앨범 1장이 다운로드되면 앨범 1장이 판매된 것으로 집계한다. 그리고 한 앨범에 수록돼 있는 10곡을 150명이 스트리밍하면 앨범 1장이 판매된 것으로 집계한다. 그러나 한 앨범에 수록돼 있는 15곡을 100명이 스트리밍해도 앨범 1장이 판매된 것으로 집계한다. 그런데 20곡이 수록된 앨범 1장이 다운로드되면 앨범 2장이 판매된 것으로 집계한다.

사람들은 빌보드에서 바뀐 집계 방침이 음반 산업의 현실에서 어떤 구체적인 양상의 변화로 이어질지 처음에는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변화의 윤곽이 드러났고 뮤지션과 음악 관계자들은 전략적으로 이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대-스트리밍 시대’의 한복판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1990년대보다도 더 긴 앨범을 만드는 일이라는 아이러니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크리스 브라운의 은 최근 몇 년을 통틀어 가장 상징적인 사례다. 이 앨범에는 45곡이 수록돼 있고 러닝타임은 2시간 39분이다. 이 앨범을 한 번 다 들을 동안 나스의 을 정확히 네 번 들을 수 있다. 영화 <다크 나이트>를 다 봐도 7분이 남는 시간이다. 사실 어제 나는 이 앨범을 듣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잠에서 깬 후에도 이 앨범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크리스 브라운은 누구보다 성실한 뮤지션이다. 방탕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는 누구보다 끊임없이 결과물을 발표해왔다. 하지만 그의 최근작은 이러한 그의 기질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앨범을 여러 번 돌려 들으세요. 그리고 ‘반복’ 버튼을 누른 후 계속 놔두세요.” 이 발매됐을 때 크리스 브라운의 매니지먼트 팀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팬들에게 했던 당부다. 가히 시대를 통째로 상징하는 말이라고 할 만하다. 나는 이 멘트를 팝 역사의 결정적 순간 중 하나로 꼽고 싶다. 크리스 브라운은 이 앨범으로 며칠 만에 ‘골드’를 기록했다. ‘톱 40’ 차트에 진입한 싱글 하나 없이도. 아, 그래서 24곡을 수록한 미고스의 새 앨범은 어떻게 됐느냐고? 20일 만에 10억 스트리밍을 달성하는 동시에 수록곡 15곡을 ’핫(hot) 100’ 차트에 올리면서 비틀스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산업의 변화가 예술의 지형을 바꾸기도 하지만 번뜩이는 예술이 산업 전체를 뒤흔들어놓기도 한다. 또 예술가들은 종종 예술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변화된 산업에 영리하게 적응하기도 한다.

나는 지금 빌보드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아니고 뮤지션들을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빌보드의 방침을 조금 더 정교하게 보완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이것 역시 일반론일 뿐이다. 대체 빌보드의 스트리밍 반영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오히려 이는 음악의 영향력을 보다 정확하게 측정하려는 좋은 변화로 보인다. 음반을 사거나 음원을 다운로드하는 사람보다 스트리밍을 이용하는 사람이 증가했다는 사실 자체 때문만은 아니다. 대신 스트리밍을 반영하는 행위는 ‘사람들이 음악에 돈을 얼마나 썼는지’보다 ‘사람들이 음악과 얼마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를 더 주목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실제로 빌보드가 차트 집계에 반영하는 스트리밍업체에는 이용자가 돈을 내지 않아도 되는 유튜브나 스포티파이도 포함돼 있다.

“긴 앨범은 음악적 고민의 발로가 아니다. 사업적 결정일 뿐이다.” <워싱턴 포스트>가 최근 뮤지션들의 행보에 대해 한 말이다. 강조 어법이란 건 안다. 그러나 음악과 사업, 예술과 산업을 정확히 분리할 수 있을까? 산업의 변화가 예술의 지형을 바꾸기도 하지만 번뜩이는 예술이 산업 전체를 뒤흔들어놓기도 한다. 또 예술가들은 종종 예술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변화된 산업에 영리하게 적응하기도 한다. 문득 신승훈이나 휘성이 떠오른다. 이들은 스토리가 이어지는 미니 앨범 3부작 등을 기획하며 산업의 변화를 자신의 예술에 전향적으로 활용했다. 마침 2018년에 들어서 빌보드의 방침이 또 바뀌었다. 스트리밍 반영은 여전하지만 ‘유료’ 스트리밍에 더 무게를 두기로 한 것이다. 빌보드의 이 ‘날갯짓’은 또 어떠한 나비효과를 일으킬까. 그저 흥미롭게 지켜보고 성실하게 해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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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민 용준,사진|정 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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