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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가의 비밀식당 <보리보쌈 편>

연어 그라브락스, 지중해식 문어 샐러드가 맛있는 곳은 유러피안 레스토랑이 아닌 보쌈을 파는 한식집이었다. 더구나 이 비밀스러운 식당은 전통시장 안에 존재했다.

BYESQUIRE2018.04.20

그 곳을 처음 알게 된 건 연어 그라브락스를 맛있게 하는 집이 있다는 지인의 제보였다. 미국에서 온 친구는 한국에선 찾기 힘든 채소와 향신료가 들어가서 고향에서 먹던 맛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한 동안 스칸디나비아식 뷔페와 연어 전문점이 유행해, 시중에서 연어로 만든 음식을 찾는 건 쉬운 일이었지만 스칸디나비아식 연어회를 단품으로 파는 곳이 있다니 재미있었다. “근데 연천(군)에 있어. 그것도 심지어 전통시장 안에 보쌈을 파는 집에서.” 얘기를 들을수록 비밀을 간직한 미지의 식당을 찾는 기분이 들어 흥미진진했다.

진짜였다. 직접 발걸음을 해보니 경기 연천군 전곡읍 전곡시장 안에 비밀의 식당이 있었다. 식당 이름은 ‘보리보쌈’. 지인의 말이 맞았다. 얼핏 보기엔 한식당 같았지만 메뉴를 보니 연어 그라브락스, 지중해식 문어요리, 세비체 등이 있었다. 된장찌개를 곁들인 보쌈 정식과 홍어 삼합 역시 눈에 띄었다. 작은 시장 속 이곳은 대체 무슨 일이?

‘보리보쌈’의 윤영철 사장은 원래 세트 디자이너였다. 명문 디자인 학교로 정평이 나 있는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SVA) 출신으로서 졸업 후엔 사진작가 휴 해일스 툭(Hugh Hales-Tooke), 세트 디자이너 존 로빈슨(John Robinson)과 8년간 함께 작업했다. 기네스 펠트로 주연의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포스터 촬영은 물론, NBA 농구스타 패트릭 유잉이 속한 뉴욕 닉스와의 나이키 광고 촬영 때 만든 세트 역시 그의 손길이 닿은 작품들이었다. 그렇게 14년간 미국에서 살았고 이후 잠시 중국에 건너가 사업을 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20여년간 떨어져 살다 보니 많이 지쳐있었던 것 같아요. 미련 없이 한국에 돌아가자는 생각을 했었죠.”

급하게 귀국했던 윤영철 사장은 돌아와서도 슬럼프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강산이 두 번 바뀔 동안 외국에 살았으니 한국 사회에 들어가는 일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그런 그가 고향 연천에 가면 마음이 편안했고 무언가 새로 시작해 볼 의지가 샘솟았다. 처음 도전한 일은 보리밥과 보쌈을 파는 식당을 여는 것이었. 그는 중국에서도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운영했던 적이 있어 서양식 요리를 하고 싶었지만 인구 5만도 안 되는 연천군에서 경양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가족들의 반대에 한식 메뉴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바람만큼 장사가 되질 않아 1년간 적자를 기록했다. 답답한 마음에 매일 같이 가게를 닫고 술 마시러 나가곤 했는데 지방이다 보니 먹고 싶은 음식을 파는 식당은 거의 없었고 매일 똑같은 메뉴였다.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메뉴에 추가해서 팔고 못 팔면 내가 먹지, 그럼 돈이라도 아낄 수 있지 않을까’란 엉뚱한 상상을 했었어요. 어려운 상황에서 꺼낸 궁여지책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반전의 시작이었죠.” 그렇게 해서 추가한 메뉴가 바로 연어 그라브락스, 지중해식 문어 샐러드, 세비체 등이었다. 보리밥과 보쌈을 파는 집에서 근사한 서양 음식이 등장한 이유는 윤영철 사장이 직접 요리해서 먹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보리보쌈’의 연어는 90%가 노르웨이의 르로이(LEROY) 제품이다. 그 중에서도 연어 그라브락스는 더욱 깨끗한 곳에서 양식한 ‘오로라’란 품종을 쓰는데 일반 연어보다 조금 작은 5kg대지만 훨씬 더 식감이 부드러워서 숙성회를 선호하는 일본에선 최상급의 재료로 친다. 윤영철 사장은 연어를 직접 해체한 후 한쪽 면의 껍질은 벗기지 않은 채, 살코기 부분에 비트를 간 즙을 발라준다. 그 다음은 딜, 레몬 제스트, 소량의 설탕과 소금을 골고루 뿌려주고 나서 이틀간의 숙성 기간을 거친다. 숙성된 연어는 비트 물이 들어 보기 좋은 선홍 빛깔을 띠는데 로메인, 루꼴라, 적겨자채 등을 함께 곁들이면 이곳의 대표 메뉴 연어 그라브락스가 완성된다. 함께 나온 바게트에 크림치즈를 바른 뒤, 그 위에 연어, 그린 올리브, 양파를 차례로 올려서 먹는 것이 연어 그라브락스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다. 물론 맵고 알싸한 맛을 선호한다면 서양 겨자소스, 핫소스를 살짝 첨가하는 것도 괜찮다.

지중해식 문어 샐러드에도 연어 그라브락스와 마찬가지로 한국적인 식재료는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한국 음식을 함께 파는 식당이니 서양식 메뉴와 한국식 메뉴가 섞이지 않도록 하고 싶은 그의 의지였다. 잘 삶은 문어에 바질패스토와 파르메산 치즈,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을 황금 비율로 섞은 다음, 프레시, 딜, 고수, 루꼴라, 그린 올리브를 넣는다. 그 다음 마지막은 발사믹 식초를 적절하게 뿌려주면 완성이다. 일반 샐러드로 착각해서 모두 비벼 먹는다면 말 그대로 섞어찌개가 된다. 접시의 샐러드를 임의로 나눈다 생각하고 재료들을 덜어서 먹는다면 적당히 간이 배어 있으면서도 문어와 치즈의 고소한 맛과 발사믹 식초가 스며든 향긋한 채소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동, 서양 음식의 화합의 장으로 바뀌어버린 ‘보리보쌈’은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듣지도 보도 못한 서양 요리들이 있는 집을 찾아왔는데 사실 샐러드만 먹기는 양이 적으니 다른 걸 더 시켜볼까 고민하다 밥, 찌개, 고기가 한꺼번에 나오는 정식의 존재를 알고 나면 자연스럽게 눈이 가는 법. 반대의 손님도 존재하는데 연천군은 아무래도 군부대가 많은 곳이라 면회, 외박을 위해 나온 군인 가족이 많다 보니 한식을 주로 찾는다. 그러다 평소 못 보던 외국 음식이 있으니 온 김에 먹어볼까란 호기심에 시키는 사람이 많은 것. 윤영철 사장은 생경한 음식에 당황하는 가족들을 위해 서양 음식을 시킬 땐 직접 나와서 서빙을 하고 먹는 법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보리보쌈은 말 그대로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비밀식당으로 바뀌었다. 물론 원래 가게 이름이 들어간 보쌈, 백김치, 홍어의 홍어 삼합 역시 훌륭하다. 왜 훌륭하냐면 홍어 역시 윤영철 사장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 새로 추가한 메뉴이기 때문에 빈틈이 없다.

Add.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로 172번길 10

Tel. 0507-1437-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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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이 충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