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 물회집 협재칼국수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흔한 음식도 맛과 사연을 담으면 치명적이다. 고생 끝에 찾은 맛집보다 우연히 발길 닿아 찾은 맛집이 더 기억에 남는다. ‘협재칼국수’의 한치물회가 딱 이 경우였다. | ESQUIRE,에스콰이어

그곳을 찾은 건 순전히 분노 덕택이었다. '분노'와 '덕택'을 같이 호응 시킨다는 건 아이러니하지만 그날은 이 단어 조합 이외엔 딱히 생각나지 않는 그런 날이었다. 제주를 가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제주 서쪽 마을 한림읍 협재리에 간다. 협재, 한림해변에서 가까운 바다 건너의 또 다른 섬 비양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해 뜰 무렵과 석양 지는 저녁 때의 비양도는 같은 듯 다른 매력을 지닌다.문제의 그날은 역시 비양도 근처의 해변에서 벌어졌다.  협재리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옹포리가 있는데 그곳은 한림항과 가까워 좋은 횟감이 많기로 유명하다. 평소 여행을 가면 맛집 정보를 찾지 않고 숙소 근처를  걸어 다니며 찾는 편인데도 그날만큼은 제대로 된 물회를 먹겠다는 생각에 블로그와 각종 SNS를 뒤진 것이 화근이었다. 일은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지기 마련. 불행하게도 옹포리에 물회를 잘 하는 집을 찾아냈다. 뭐에 홀린 듯 차에 올라타 그 식당으로 향했다. 모듬물회 1인분에 1만5000원. 약간 비싼 감이 있었으나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란 생각에 빠져있을 때쯤, 물회가 나왔다. 꽤나 많은 양의 사각 얼음이 둥둥 떠 있고 주방에서 테이블까지 전달하는 사이 김가루를 뿌렸는지 참 먹기 안 좋게 한쪽으로 흩날려 있었다. ‘빚 좋은 개살구보다야 실속 있는 게 낫지’란 생각에 한 숟가락 크게 떠 먹고 숟가락을 다시 내려놓았다. 한번 더 떠서 먹고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메뉴판을 봤다. ‘내가 뭘 시켰더라?’ 미지근했다. 다량의 얼음은 시원해 보이게 하는 용도라기 보다는 국물을 시원하게 만드는 용도였다. 그리고 뭔가 들어갈 것이 안 들어간 듯한 싱거운 맛이었는데, 물회가 첫 술에 싱겁다면 얼음이 녹고 난 그 이후론 안 먹어도 뻔한 일. 같이 시킨 옥돔구이에 밥 몇 술 적당히 뜬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전날 마신 술기운이 남아 있어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다는 생각에 괜히 씁쓸했다. 숙소가 있는 협재리로 차를 돌렸다. 지척에 보이는 비양도를 친구 삼아 운을 하니 한결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숙소로 향하던 골목 어귀에서 칼국수집을 발견했다. 돌담으로 둘러싸여 제주 특유의 전통 가옥 느낌이 물씬 나는 ‘협재칼국수’. 평소에 칼국수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생선이 뛰놀던 얼음물을 마셔서 인지 괜히 속이 더 허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식당 안엔 사람들이 그득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칼국수 먹는 사람 반, 물회 먹는 사람 반이었다. 아니 어쩌면 칼국수 먹는 사람들이 물회를 따로 추가하는 모습을 봤으니 물회를 시킨 사람들이 더 많았을 지도 모르겠다.조용히 구석에 자리 잡고 자신 있게 한치물회부터 시켰다. 15분 안에 두 군데서 물회를 시키는 사람은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회가 등장했다. 칼국수의 면처럼 일정한 크기로 썬 한치가 정 중앙에 놓여있고 양배추, 오이, 상추 등 채소들 역시 적당하게 먹기 좋은 크기였다. 물회 요리의 마지막을 장식한 김가루 역시 한쪽에 뿌려져 있으니 더 정갈해 보였다. 한치 양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았는데 젓가락으로 집어 드니 정말 국수 한 젓가락 집어 든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좀전에 먹었던 물회처럼 사각 얼음이 둥둥 떠있지 않고 육수가 알알이 살얼음 져 있어 더욱 시원해 보였다. 새빨간 국물을 보고 혹자는 시선을 자극해 더 당긴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론 새빨갛게 국물을 내는 물회를 보고 시원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협재칼국수의 국물은 다홍빛을 띄고 있어 자극적이지 않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한치, 양배추, 오이, 상추, 김(가루)를 고루 섞은 뒤 크게 한 숟가락 떠서 먹고 한치를 한 젓가락 크게 집어서 먹었다. 한치의 짭조름한 맛과 시원한 국물의 매콤한 맛, 그리고 싱그러운 채소의 식감과 맛이 더해지니 어제의 숙취가 고스란히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처음 얘기했듯 물회의 첫술이 맛있으면 더 말할 이유가 없다. 육수에 얼음을 띄운 게 아니라 육수 자체를 살짝 얼렸으니 조금 녹는다 한들 크게 맛이 달라지지 않았다. 몇 숟가락 더 먹어 보니 살이 단 한치 덕분에 고소함뿐만 아니라 달달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그래도 칼국수집에 왔는데 칼국수를 안 먹고 가면 서운할 것 같아 얼큰이칼국수를 시켰다. 홍합을 잔뜩 넣고 달걀물을 푼 칼국수는 고추장 매운맛이 강한 칼국수가 아니라 된장과 고춧가루가 들어가 칼칼한 맛의 칼국수였다. 싱싱한 김치 겉절이를 집어들어 국수를 돌돌 말아 입에 털어 놓고, 국물 한 숟가락 떠서 쭉 마시고 나니 속이 다 든든했다.‘인생은 계획한 것과 달리 우연히 찾아온다.’ '남해의 치명적 맛집' 김치국밥을 찾았던 것처럼 제주에서도 치명적 한치물회를 찾았다. 분노의 물회집을 뒤로 하고 바로 협재리의 칼국수집에서 말이다.Add. 제주 제주시 한림읍 협재로 3Tel. 064-796-8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