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와 오렌지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일본이 네덜란드를 만나며 일어난 일, 그 시대의 책. | 일본,유자,오렌지,도큐먼트,네덜란드

오늘 살필 책은 이다. 오늘날 일본 도쿄에서 활동하던 출판인이 1842년과 1848년에 간행했다. 일본어에서는 네덜란드를 화란 또는 오란다(阿蘭陀)라고 불렀다. 네덜란드 왕국의 중심지인 홀란트(Holland)를 한자로 부른 것이다. ‘문전’은 문법책이라는 뜻이다.‘문전’이 들어간 제목은 다른 책에서도 찾을 수 있다. 1604~1608년 사이에 나가사키에서는 책이 나왔다. 서양의 대항해 시대에 명나라와 일본에 포교하러 온 포르투갈인 예수회 선교사 주앙 트수주 호드리게스(Joao ‘Tcuzu’ Rodrigues)가 정리한 일본어 문법책이다. 호드리게스는 일본에 크리스트교를 전도하러 온 서양인들이 전도에 필요한 일본어를 익히게 하려고 이 책을 만들었다. 16~17세기에 일본에 온 서양인들은 주로 이베리아반도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출신이었다. 대항해 시대 자체가 이 두 나라에서 시작됐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이베리아반도의 선교사들은 종교와 함께 서양 의학 기술도 들여왔다. 요즘에는 한국에서도 에도 시대 일본의 난학(蘭學, 네덜란드학)에 대한 정보가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일본에 처음 소개된 유럽에 관한 지식은 네덜란드가 아니라 이베리아반도의 것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야 이에야스는 크리스트교를 심하게 탄압했다. 그래서 이베리아반도 사람들은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으로 돌아갔다. 대신 크리스트교를 전도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네덜란드 상인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만약 역사가 다른 식으로 흘렀다면 일본에 전해진 포르투갈어와 에스파냐어 지식과 이베리아 의학이 일본에서 열심히 연구되고 계승되어 근대를 맞이했을 수도 있다. 물론 위와 같은 가정은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다. 이베리아 세력이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신흥 세력에 밀려 특히 아시아에서는 존재감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일본과 타이완에서 이베리아 세력을 축출하고 한때 북동 유라시아 지역에서 무역 이익을 독점하게 된다. 이처럼 아시아의 무역 세력이 이베리아에서 네덜란드로 교체된 게 일본으로서는 행운이었다. 이 행운에 대해 도널드 킨(Donald Keene), 일본명 기 도나루토(鬼怒鳴門)라는 연구자가 한 말이 있다.도널드 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내 일본인 포로의 일기장과 수첩을 조사하다가 일본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 후 미국에서 일본학을 가르치던 중 2011년 3월 11일에 일본 도호쿠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당시 일본에 살던 외국인들은 지진과 방사능 누출 피해를 우려해 대거 자국으로 귀국했다. 한국을 포함한 외국 언론 역시 일본에 희망이 없다는 식의 보도를 쏟아냈다. 외국인처럼 도망갈 곳이 없던 일본인들은 그 전까지 일본에 우호적인 척하던 외국인들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도널드 킨은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 기 도나루토가 된다. “나는 일본을 믿는다”라는 기자회견과 함께.그런 사람이 한 말이 이거다. “에도 시대 일본과 관계한 나라가 영국이나 러시아였다면 일본은 군사적으로 열세에 놓여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에스파냐나 포르투갈과 관계했다면 이미 쇠퇴해버린 이 두 국가를 통해 유럽에 대해 배울 게 거의 없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는 쇠퇴기에 접어든 상태였지만 유럽 의학의 중심지 레이던이 자리한 네덜란드였기 때문에 일본은 군사적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유럽의 의학, 천문학, 회화 등을 배울 수 있었다.” 그의 저서 에 쓴 말이다. 이 책은 에도 시대 일본의 난학을 서양에 소개한 고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에도 시대에 일본이 이베리아 세력 대신 네덜란드를 파트너로 삼은 건 참으로 절묘한 행운이었다는 것이다.개인적으로는 역사에서 우연이 차지하는 역할이 크고 법칙이나 경향성이 역사에 기여하는 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난학도, 메이지 유신도, 기본적으로 일본의 운이었다. 유럽 세력이 인도나 중국에 비해 일본에 관심을 덜 가졌기 때문에 일본이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과 제국 일본의 탄생이라는 행운 뒤에는 몇몇 일본인의 혜안과 노력이 있었다. 오늘의 주제인 이 그 혜안과 노력의 상징적인 존재다.은 전편과 후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전편이 중요하다. 전편의 원본은 이다. 이 책의 원본은 네덜란드 레이던에서 1822년에 출판했다. 1784년에 창립해 아직도 활동하는 네덜란드 공공복지지향상협회가 이 책을 썼다. 그 원본을 난학자 미쓰쿠리 겐포(箕作阮甫, 1799~1863)가 편집해 1842년에 출판했다. 후편은 이다. 1846년 레이던에서 출판한 것을 1848년 일본에서 다시 출판했다.원본과 번역본의 출판 시차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22년과 1846년에 네덜란드에서 출판한 책이1842년과 1848년에 일본어판으로 출판됐다. 그 시간 차는 각각 20년과 2년. 특히 후편의 시차인 2년이 19세기 중기 서양과 일본 문명의 시차였다. 이미 서양 식민지가 된 지역을 제외하면 이 정도의 짧은 시차로 서양 문명을 접한 지역은 아랍권과 페르시아, 청나라, 일본 정도였다. 이 중 아랍과 페르시아는 서양과 직접 군사적으로 경합하다 보니 서양 문명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청나라는 1840~1842년의 아편전쟁을 겪고도 서양 문명에서 배울 게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사실 서양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청나라가 더욱 유리했다. 청나라는 에도 시대 일본이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와 하던 것처럼 광저우에서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와 무역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북쪽에서는 캬흐타를 통해 러시아와도 교역했다. 절대 조건만 보면 네덜란드하고만 교역하는 에도 일본보다 대여섯 나라와 교역하는 청나라가 더 많은 서양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는 에도 시대 일본의 난학처럼 진지하게 서양을 연구하는 풍조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조선 시대 한반도는 논할 필요도 없다. 지리적, 정치적으로 외진 곳에 있다 보니 서양과 직접 교류할 필요도 없고 서양 식민지가 될 위험도 없었기 때문이다.일본은 그와 비교하면 운 좋게도 서양 문명을 비교적 여유 있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서양 문명을 접할 기회가 청나라보다는 적었지만 조선보다는 많았다. 아랍이나 페르시아처럼 서양의 군사적 위협을 받지도 않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서양 문명을 배워서 백성의 건강을 돌보고 안보를 지키려는 사람이 있었다. 에도 시대 오사카에는 데키주쿠(適塾)라는 의학 학원이 있었다. 오늘날 오사카 대학 의학부와 게이오 대학의 전신이다. 게이오 대학을 세운 후쿠자와 유키치(福諭吉)는, 데키주쿠 신입생들이 6개월 만에 학습을 끝내고 네덜란드어 의학 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19세기 중반 오사카에서 각계각층의 일본 젊은이 3000명이 네덜란드인이 만든 네덜란드어 어학 교재를 암송하다시피 익혔던 것이다.일본이 서양으로부터 배운 건 난학 의학뿐이 아니었다. 일본인은 난학을 통해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 소아병적인 일본 중심주의를 극복했다. 데키주쿠를 설립한 사람은 난학자이자 의사인 오가타 고안(方洪庵)이다. 그는 1810년부터 1863년까지 살았다. 그런데 오가타 전에 혼다 도시아키가 있었다. 오가타보다 몇십 년 앞선 1744년에 태어나 1821년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도널드 킨은 혼다 도시아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그는 일본이 넓은 세계 속의 작은 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을 즐기기까지 했다. 중국 문명을 불멸의 고전으로 간주하는 일본인들에게 그는, 이집트는 중국보다 몇천 년 더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그 문명은 훨씬 더 탁월하다고 선언했다. 그가 발견한 세계는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는 일본이 그 놀라운 것들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혼다는 서양인들이 보는 것처럼 일본을 보았다.”혼다 도시아키의 주장은 당시 기준에서 무척 남달랐다. 그는 중국이나 일본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고 했다. 일본은 서양 세력에 맞설 수 없으므로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배운 무력으로 주변 지역을 식민지화해서 일본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 혼다가 살던 1806~1807년에는 일본군이 오호츠크해 일대에서 러시아 해군과 싸워 패한 사건과,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영국 해군이 나가사키를 공격한 사건이 일어났다. 유럽이 더 이상 먼 곳의 위협으로만 머무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일본인에게 가르쳐준 셈이었다.무엇이 근대와 현대의 일본을 낳았을까? 서양 세력과 거리를 뒀다는 역사적, 지정학적 행운이 있었다. 서양 문명에 대해 네덜란드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책을 읽고 공부한 수천수만 명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명분만 내세우기보다는 국가 안보를 위해서라면 치욕도 무릅쓰고 어제의 적에게서 모든 것을 배울 각오가 있다는 지배 집단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모여 근대와 현대 일본을 만들었다.중국학 연구자인 로이드 이스트만은 중국 산업의 근대화 과정이 과소평가되었다고 주장한다. 중국은(그리고 한반도 역시) 대륙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빠르게 산업 근대화를 이뤘지만 하필이면 예외적 국가인 일본이 바로 옆에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과 청나라가 특이하게 못났던 게 아니라, 여러 관점에서 봤을 때 일본이 예외적이었다는 이야기다.이런 의미에서 나는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식의 통속적인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버릴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 필요한 건 일본 그 자체를 보려는 자세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