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유감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양승태 사법부에 대한민국은 없었다. | politics,양승태,법원,사법 행정권 남용

지방선거가 끝났다. 선거,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뉴스가 있다. ‘양승태 사법 농단’ 사건이다.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기대는 늘 우리를 배반한다. 박근혜의 국정 농단이 탄핵 사태를 가져왔듯 양승태 전 대법원장(2011년 9월~2017년 9월, 제15대 대법원장)의 사법 농단도 그에 못지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미 정상회담과 선거 소식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놓쳐서는 안 된다. 북한의 비핵화 과정만큼이나 꼼꼼히 들여다봐야 한다.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정확히 말하면 양승태 사법부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라는 3개의 거대한 기둥으로 지탱되는 대한민국이 얼마나 부실한 기둥으로 버텨왔는지 불편하지만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지난 5월 25일, ‘사법 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 조사단’(이하 특조단)은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3차 조사를 마무리하고 187쪽에 달하는 조사 결과를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보고했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다. 양승태 대법원이 상고법원 추진을 위해 박근혜 정부와 재판을 거래했던 정황이 속속들이 문건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또 청와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알아서 긴’ 흔적도 곳곳에서 확인됐다. 아울러 상고법원을 반대하는 판사를 사찰한 사실도 드러났다. 법원이 한 일이라고 믿기지 않는 일들이다. 박근혜의 머릿속이 온통 최순실과 그 주변의 이익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양승태의 머릿속은 사법부의 이익, 특히 상고법원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고법원을 위한 양승태의 직진. 과연 어땠는지 살펴보자.  재판, 거래의 대상이 되다특조단이 공개한 문건 가운데 눈에 띄는 건 2015년 7월 27일 작성된 ‘현안 관련 말씀 자료’다. 이 문건에는 “사법부는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왔음”, “왜곡된 과거사나 경시된 국가관과 관련된 사건의 방향을 바로 정립해왔음” 등 노골적 표현이 가감 없이 들어가 있다.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한 노력’과 같은 문구는 청와대에 구애하는 집권 여당에서나 나올 법한 표현이다. 법원의 독립, 법관의 양심을 목숨처럼 여긴다는 사법부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눈길조차 주지 말아야 하는 표현이다. 문건에는 ‘과거 왜곡의 광정(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고침)’ 사례로 ‘대통령 긴급조치*’ 관련 판결과 과거사 국가배상 소송 등도 담겨 있다. 즉 긴급조치 피해자들에 대해 국가가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대법원 판결 등을 나열하면서 양승태 사법부가 정부를 위해 얼마나 협력하고 있는지 과시한 것이다. 이 부분은 ‘과거’에 콤플렉스가 있는 박근혜라는 특정인의 심기 관리까지 겨냥한 사례로 보인다.(*긴급조치: 1972년 개헌된 대한민국의 유신헌법 53조에 명시돼 있던 것으로, 헌법상에 보장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자유롭게 정지할 수 있도록 한 권한을 말한다.)‘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 추진을 위한 BH(청와대)와의 효과적 협상 추진 전략’ 문건(2015년 7월 28일)에는 “국가적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건이나 민감한 정치적 사건 등에서 BH와 사전 교감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물밑에서 예측 불허의 돌출 판결이 선고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내용이 있다. 재판 거래 ‘의혹’이라는 꼬리표가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법원, 판사를 사찰하다 상고법원에 혈안이 돼 있던 양승태 사법부는 이를 정면으로 비판한 판사에 대해 사찰까지 시도했다.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피해자의 대표 선수 격인 차성안 판사가 그 주인공이다. 차 판사에 대한 양승태 사법부의 집요한 ‘관심’은 2015년 8월 6일 박근혜와 양승태의 오찬 회동 이후다. 이날 양승태는 상고법원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한 뒤 박근혜의 심정적 변화를 한껏 기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5일 뒤인 11일, 차 판사는 법원 내부 통신망에 상고법원에 대해 정면 반대하는 글을 올렸고 일부 판사들이 이에 크게 호응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양승태 사법부는 즉각 차 판사에 대한 설득 작업에 나선다.당시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의 지시를 받은 모 심의관은 일주일 뒤인 8월 18일 ‘차성안 판사 게시 글 관련 동향과 대응 방안’이라는 문건을 임 전 차장에게 보고한다. 해당 문건에는 차 판사가 동료들과 주고받은 메일 등을 분석하고 설득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차 판사는 입장을 접지 않고 오히려 한 발짝 더 나아가 언론 기고를 통해 상고법원 도입 반대 의견을 적극 개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법원행정처는 적극 대응에 나섰다. 그의 외부 기고가 법관윤리강령에 위반되는지 여부를 꼼꼼하게 들여다본 것으로 드러났다. 어떤 명분을 통해서든 그의 입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특조단의 결론이 흥미롭다. 특조단은 “재판과 관련해 특정 법관들에게 불이익을 줄 것인지를 검토한 것이나 특정 법관들에 대한 성향 등을 파악했다는 점만으로도 공정한 재판을 위해 헌법이 선언한 재판의 독립, 법관의 독립이라는 가치를 훼손하려는 것으로써 크게 비난받을 행위”라고 지적하면서도, “비판적인 법관들에 대해 리스트를 작성해 조직적, 체계적으로 인사상의 불이익을 부과했음을 인정할 만한 자료는 발견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갔던 판사들은 즉각 반발했다. 차 판사는 특조단 발표 다음 날 페이스북을 통해 “사법행정 조직을 동원해 나의 대학 시절, 재판, 인간관계, 재산 신고 내용까지 뒤진 사찰 행위가 바로 불이익 그 자체”라고 비판했다.  법원, 알아서 기다‘문제 법관에 대한 시그널링 및 감독 방안’, ‘원세훈 사건 항소심 판결 분석 보고’, ‘세월호 사건의 적정 관할 및 담당 재판부 검토’6월 5일 법원행정처가 공개한 문서들 가운데 상당수가 놀라운 내용이다. 그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문건은 ‘영장 없는 체포 활성화’, ‘영장항고제 도입’ 등이다. 영장 없는 체포구금은 유신 시절 ‘긴급조치 9호’의 핵심이다. 사법부가 인권 보호를 위한 스스로의 역할 내지 권한을 알아서 포기하는 내용이다. 양승태 사법부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독재 시절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일까. 영장항고제는 검찰이 구속영장 기각에 불복할 경우 다시 영장을 청구하는 제도다. 재차 청구한 영장이 발부되면 ‘유죄’라는 선입견을 주게 돼 법원 내에서 우려하는 제도다. 이는 상고법원 설립에 반대하는 법무부와 검찰을 달래기 위한 당근책으로 검토된 것으로 보인다. 문건 가운데는 박근혜 정부가 유독 민감해하던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사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사건을 비롯해 밀양 송전탑 사건, KTX 승무원 사건, 쌍용자동차 정리 해고 소송 등도 포함돼 있다. 승무원 한 명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계기가 됐던 KTX 승무원 해고 사건 등에 대해 문건은 “경제의 발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대통령이 추진 중인 노동교육 등 4대 부문 개혁을 강력하게 지원해왔다”고 자평하기도 한다. 밀양, KTX 승무원, 쌍용 노동자. 기억할 것은 이들 모두가 사회적 약자라는 점이다. 마지막 기댈 곳은 그나마 대법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몇 년 동안 달려온 사람들이다. 그랬던 이들의 삶이 누군가에게 먹기 좋게 요리된 재료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의 생존 문제가 누군가에겐 일회용 소모품이 됐던 것이다.  법조인들, 거리로 나오다 당시 재판 거래 의혹으로 피해를 본 수많은 사람이 법원에 몰려가 성토와 항의를 이어가고 있다. 당연히 재심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사법부가 대한민국을 또 한번 배반한 중대한 사건 앞에 직접 피해자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도 망연자실이다. 앞으로 어떤 재판 결과가 나온다 한들 신뢰를 얻기는 어려워 보인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각계 의견을 들으면서’ 2주를 보내고 있는 동안 참다 못한 법조인들이 거리로 나왔다. 전국 2000여 명의 변호사는 6월 11일 수사를 촉구하는 시국 선언을 했다. 이들은 성역 없는 조사를 주장하며 “책임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반드시 형사처벌, 징계, 탄핵 등 책임을 물어야 하고 대법원과 사법행정 개혁 등 재발 방지 대책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앞서 5일에는 변호사와 법학 교수 등 법률가로 구성된 ‘대법원 사법 농단 규탄 법률가 일동’이 대법원 앞에 천막을 치고 시국 농성에 돌입했다. 100명 이상 이름을 올린 이 단체는 “사법부가 재판을 정치권력과의 거래 수단으로 사용했다”며 “특히 법원이 거래한 재판이 모두, 노동자사회적 약자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가장 마지막으로 법원에 기댄 사건이기 때문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판사들, 저마다 계산기가 다르다 판사들 의견은 대체로 세대별로 갈렸다. 법원장 등 고참 판사들은 자체 내 해결을 강조한 반면, 상당수의 젊은 판사들은 철저한 진상 규명과 수사를 촉구했다. 각급 법원에서 판사들의 의견을 수렴한 전국 대표 판사들은 지난 6월 11일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형사 절차를 포함하는 성역 없는 진상 조사와 철저한 책임 추궁이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공보를 맡은 송승용 수원지법 부장판사는 “형사 절차를 포함한다는 것은 수사와 기소, 재판으로 이해하면 되겠다”고 부연했다. 직접 고발은 하지 않고 이미 고소고발 조치된 부분을 검찰이 수사하면 된다는 의미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직접 고발, 수사 협조, 법원 내 자체 해결, 국정조사나 특검 요구 등 다양한 선택지 앞에 6월 15일 결론을 내렸다. 결국 대표 판사들의 결론인 ‘수사 협조’를 선택했다. 관련자 중 현직 판사들에 대한 징계 절차에는 착수하지만 이 밖에 다른 전현직에 대한 형사 고발이나 수사 의뢰 등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비록 최종 판단을 담당하는 기관의 책임자로서 섣불리 고발이나 수사 의뢰와 같은 조치를 할 수는 없지만 재판을 거래 대상으로 삼으려 했다는 부분에 대해 의혹 해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자체 조사가 너무 부실해서 무려 3차 조사까지 해야 했던 현 상황을 감안하면 자체 해결은 민망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혐의 가능성에 대한 부담, 내부 고참 판사들의 반발 등을 고려했을 때 직접 고발 또한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게 수사 협조다. 과연 얼마나 ‘협조’가 가능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대한민국은 입법, 사법, 행정이라는 거대한 세 기둥으로 지탱된다. 어느 한쪽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사라지면 우리 사회는 지탱하기 어렵다. 그중 가장 중요한 기둥이 사법이다. 일반 국민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종 선택하는 곳이 바로 사법부, 대법원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일부 판사들은 자체 해결이라는 한가한 얘기를 하고 있다. 비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국민들의 충격을 이해한다면, 이번 사태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자각한다면 그들 스스로 가장 불편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산다. 상고법원이란대법원이 맡고 있는 상고심(2심 판결에 대한 불복신청) 사건 중 단순한 사건만을 별도로 맡는 법원. 상고법원이 설치되면 민형사 등 일반 사건은 상고법원이 맡고, 사회적으로 파장이 크거나 판례를 변경해야 하는 등의 사건은 대법원이 맡아 심리해 판결하게 된다. 특히 개인 간의 다툼은 상고법원이 담당하게 되어 보다 신속하고 합리적인 판결이 가능할 것이라 기대되는 부분이 있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국민들이 대법원에서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무엇보다 이번 상고법원 제도 도입 의도가 국민의 이해관계를 위한 선택이기보다는 일반 상고 사건을 전담하는 상고법원을 둠으로써 상대적으로 대법원의 위상을 강화시키고, 대법원장은 상고법관직 인사를 통해 권력을 극대화하려는 데 문제가 있다.양승태 사법부에 대한민국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