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으로 2015년부터 3년간 진행한 대담 프로젝트를 책으로 엮은 <부디 계속해주세요>에 일본 감독 니시카와 미와와 함께 나눈 대담이 실려 있더군요. 평소에 독서량이 상당해 보이던데요.
마음의 안정을 위해 뭔가를 읽어요.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이거든요. 겁도 많고. 그런데 뭔가를 읽으면 걱정을 잊을 수 있어서 습관적으로 읽는 것 같아요. 옛날부터 이야기를 좋아했어요. 그러다 한때 소설이 읽기 싫었는데 요즘은 다시 읽게 됐어요.
걱정을 잊기 위한 수단이라면 꼭 책일 필요는 없었을 텐데 왜 책이었을까요?
저한테는 영상보다는 활자가 더 익숙한 것 같아요. 그런 환경에서 자라기도 했고요. 아버지가TV를 못 보게 하고 어디 나가지도 못하게 해서 고등학생 때는 집에서 세계문학전집이나 보고 그랬죠. 다들 그러고 사는 줄 알았어요.(웃음) 그래서 중·고등학교 시절에 공부하기 싫으면 교과서 말고 다른 책 펼쳐놓고 봤어요. 공부하는 건 아니지만 책 읽고 있으면 엄마가 혼내지 않았거든요.(웃음) 일찍부터 그런 습관이 있어서 활자에는 쉽게 빠져드는데 영화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공연이나 연극은 많이 봤지만 영화는 그렇게 익숙하지 않았어요. 영화를 전공한 것도, 시네필도 아니고. 그리고 영화배우가 된 뒤로 영화는 공부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죠. 책은 그냥 독자가 될 수 있는데 영화를 보면 마냥 관객일 수가 없어요. 배우로서의 욕망도 올라오고, 이런저런 생각이 자라요. 책을 보는 것만큼 편하지 않은 거죠. 요즘은 예전보다는 편해졌지만.
원래는 교육학을 전공했다고 들었어요. 배우가 되려는 생각은 뒤늦게 찾아온 모양이군요.
대학생 때 최민식 선배가 나온 연극을 봤는데 머리에 도끼를 맞은 기분이었어요. 저런 게 있는데 방구석에서 책만 봤다니.(웃음) 그때부터 연극배우가 되고 싶어서 노력했죠. 그러다 이창동 감독님을 만나서 영화로 끌려간 거죠. 무슨 자석이라도 만난 것처럼 보자마자 ‘이분이 내 선생님이다. 이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면서.(웃음)
최근 18년 만에 재개봉한 <박하사탕>이 첫 영화였어요. 데뷔작인 만큼 당연히 남다른 의미가 있겠지만 <박하사탕>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단순히 데뷔작이라는 의미 이상의 애틋함을 갖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모든 배우가 데뷔작을 그렇게까지 느끼진 않더라고요.(웃음) 저도 이번에 알았어요. 친구들도 저한테 유난하다고 해요. 정작 그때는 제가 저렇게 좋은 작품으로 데뷔했다는 걸 몰랐죠. 그래서 세월이 지날수록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사실 그 영화 자체가 감독님한테도 엄청난 도전이었죠. 설경구, 문소리를 캐스팅한 것만 봐도 그래요. 영화의 형식상 하나의 산을 넘는 게 아니라 일곱 개의 산을 넘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감독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 일정과 무관하게 그 과정을 지켜보게 했어요. 저는 몇 신 나오지도 않았고, 영화 경험도 없는 듣보잡이었잖아요. 그런 저를 소외시키지 않으셨어요. 늘 그 영화가 가는 길에 자리할 수 있도록 해주셨기 때문에 그런 과정이 제게 쌓여서 굉장히 남다른 느낌이 되는 거 같아요.
당시 연기를 주문할 때 그 인물로 살고 그 인물로 말하는 걸 잠깐 찍을 뿐이니까 연기를 하지 말라 했다고 들었어요.
연기하지 말고 살라고 하셨죠.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심지어
<박하사탕>에 이어 <오아시스>까지 연이어 했기 때문에 더 큰 영향을 받았을 거 같아요.
<오아시스> 때 온몸이 남아나질 않았어요. 너무 아프고. 그때 명계남 선생님이 타던 벤이 있었는데 촬영 끝날 때까지 이 차 타고 다니라고 해주셔서 쉬는 시간에 거기서 마사지도 받고 그랬어요. 당시에는 매니저도 없어서 제작부에서 픽업해주던 시기였거든요. 그런데 이창동 감독님이 제가 그 벤 타고 다니는 거 보고 “이거 네 차 아니지 않냐”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라고 하니까 “자기 차가 아니라 생각해도 큰 차 타고 다니다 보면 작은 차 타기 싫어진다” 이러는 거예요. 삭신이 쑤셔 죽겠는데.(웃음) 그때는 사실 별걱정 다하신다 싶었죠. 그런데 제가 몇 년 뒤에 카니발 사이즈의 승합차를 타고 다녔는데 회사에서 갑자기 좀 더 좋은 외국 차로 바꿔준 거예요. 그러다 그 차가 수리 들어갈 때가 있어서 옛날에 타던 차를 탔더니 불편한 거예요. 그때 갑자기 생각나더라고요. 와, 정말 이창동 가라사대.(웃음) 살다가 문득문득 느껴요. 정말 감독님의 많은 것들이 각인돼 있구나.
단순히 좋은 감독님을 넘어서 인생의 스승 같은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저를 배우로 낳으신 분이기도 하고,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가치관 측면에서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분이죠. 거기서 벗어나기도 어려울 거예요. 가능하면 청출어람 해야겠지만.(웃음) 그래서 요즘 전종서 씨 인터뷰를 보면 남 얘기 같지 않아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게 느껴져요.
<오아시스>의 한공주 역할은 배우 입장에서는 정말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을 텐데요. 그래서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일 거 같기도 합니다.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해요. 그 영화를 보기도 어렵고요. 아니다. 이창동 감독님이 하라고 하면 하게 되려나?(웃음) 사실 누굴 탓할 수도 없어요. 그런 전례가 없어서 모두 다 방법을 잘 몰랐으니까요. 만약 다시 하게 되면 몸이 덜 상하도록 스케줄을 잘 짜고 곧바로 틀어진 몸을 정렬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때는 내 몸이 아픈 것도 중요하지 않았고, 그래서 골반도 돌아가고 쇄골도 틀어져서 온몸이 아픈데 공주 인생이 더 복잡하고 슬퍼 보이는 것에 집중했으니까. 사실 이창동 감독님도 신경을 많이 써주셨는데 감독님도 잘 몰랐던 거죠. 그런 부분에 대한 경험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아팠다는 말을 하기 민망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있어요.
왜 민망하고 부끄러운 걸까요?
그 작품을 통해 그 아픔 이상의 것을 받았고, 그 자체가 제게 큰 행운이자 복이었으니까요. 어린 나이에 이상한 사람 한 번 안 만나고 데뷔작부터 몇 년간 이창동 감독님의 그늘 아래서 작품을 했잖아요. 사실 그때는 몰랐죠. 그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대단한 보살핌과 사랑과 기회와 가르침을 받으며 데뷔했다는 걸. 그래서 힘들었다는 얘기를 하고 나면 무안해져요.
결국 <오아시스>로 베니스 영화제 신인연기상까지 받았어요. 영화배우를 꿈꾸지 않았는데 두 번째 작품으로 그런 상까지 받게 됐으니 배우로서 보다 진지한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요?
사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상태로 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오래 고민하기도 전에 <바람난 가족> 제안을 받았죠.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뒤 한국에서 <오아시스>가 개봉했는데 영화를 보고 심재명 대표가 바로 시나리오를 들고 왔거든요. 그래서 내가 계속 영화 일을 하는 건가 싶었죠. 주변에서는 그렇게 벗는 역할을 하면 계속 일하기 힘들다고 하는데, 사실 그 전에는 장애인 역할을 해도 계속 못 한다고 했거든요.(웃음) 그다음에 하나가 또 들어왔는데 정말 이것까지만 하고 못 하는 건가 싶었어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작품일까 싶었고요. 결국 세 번 거절하고 나서 하기로 했어요. 그냥 첫 작품이라 생각하고 해보자고. 그런데 임상수 감독님은 또 다른 세상이더라고요. 그렇게 이게 마지막인가 생각하면서 했어요.
혹시 <바람난 가족>과 반대로 앞으로 계속 배우 일을 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예감을 준 작품은 없었나요?
사실 대부분의 배우가 그럴걸요? 이제 내가 할 작품이 없어지나? 순식간에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나이 들면 더 그렇고요. 나를 안 찾으면 어쩌지? 작품이 없으면 어쩌지? 이런 불안은 어느 배우에게나 있어요. 한두 달 시나리오만 안 들어와도 그래요. 좋은 작품 열심히 했으니까 이게 마지막이면 그만 하자. 미련 없이 떠나자. 이런 생각. 6개월간 주말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제가 그 작품에 애정이 없었나 봐요. 그럴 때 배우는 정말 힘들거든요. 작품에 애정을 갖기 어려울 때. 그러고 나서 <하하하>를 촬영했는데 작품 하는 게 정말 재미있는 거예요. 그때 처음 생각했을 거예요. 이렇게 재미있는 걸 오래 하면 좋겠다. 그래서 작품을 하지 않을 때 일하는 것처럼 열심히 살고 오히려 작품을 할 때 노는 것처럼 즐거우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그럼 계속 연기할 수 있을 거 같다고, 나이 들어서도 계속 하고 싶을 거 같다고.
2016년에 <푸른 바다의 전설>로 8년 만에 TV 드라마에 복귀했습니다. <태왕사신기>와 <내 인생의 황금기> 이후로 오랜만에 드라마에 출연하는 건 두렵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다시 드라마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건 아니지만 애정을 가질 만한 작품을 만나지 못하니 할 수가 없었죠. 그런데 (이)선균이도 그렇고, 드라마가 재미있다는 배우들이 있어요. PD랑 마음이 맞아서 친구도 되고. 그래서 그렇게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드라마를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푸른 바다의 전설>을 쓴 박지은 작가님이 저를 찾는다고 해서 그냥 작가님을 믿고 갔어요. 비록 작은 역할이지만 그런 유명한 작가님이 찾았으니 몸 풀어본다는 생각으로 했죠. 그런데 나름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오는 7월 방영이 예정된 드라마 <라이프>는 <비밀의 숲> 각본을 쓴 이수연 작가님의 신작으로 병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라고 들었습니다. 신경외과 센터장인 오세화라는 역할을 맡았다고 들었는데, 다양한 캐릭터들 사이에서 한 축을 차지하는 역할처럼 보입니다.
조승우 씨랑 이동욱 씨가 중요하죠.(웃음) 두 사람과 러브라인이 있는 원진아 씨도 중요하고요. 센터장이 많아요. 흉부외과, 암센터, 신경외과, 정형외과, 안과, 산부인과, 소아과, 성형외과, 응급의학과, 장기이식센터까지, 10명이나 돼요. 저는 이 중에 한 명이니까 뭐 얼마나 중요하겠어요.(웃음) 물론 병원 내에서도 위세를 떨치는 의사 출신 부모님이 있는 집안을 배경으로 한 인물이라 다른 센터장들에 비해 큰 욕망을 품긴 하죠. 그리고 신경외과 자체가 터프한 곳이래요. EBS 다큐멘터리 중 <극한 직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병원에서 유일하게 신경외과가 나왔더라고요. 척추나 뇌를 관장하니까 수술 한번 하면 열 시간은 기본이고, 응급실과 연계돼서 24시간 일하는 상태나 다름없더라고요. 머리가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 뇌 사진부터 찍기도 하고.
의학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었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던데요.
그래서 JTBC에서 의학 드라마 한다고 하길래 주변에 내가 관심 있다고 좀 흘려달라고 했어요. 검은 바지에 가운만 입어도 되니까 의상 고민은 별로 안 해도 될 거 같기도 하고.(웃음) 그런데 사실 의학 드라마라 해도 되나 모르겠어요. 물론 의학 드라마이긴 한데, 드라마 포스터 보면 메스와 펜이 같이 있잖아요. 병원을 구조 조정하려는 기업과 병원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거든요. 그래서 펜이 있는 거죠. 메스가 주가 아니에요. 그래서 자꾸 환자는 안 만나고 의사들끼리 회의하고 기업 회장 만나서 싸우고, 이런 분위기예요.(웃음)
의학 드라마에 관심 있다는 말은 의사를 연기하고 싶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전문직 캐릭터를 맡고 싶다는 말처럼 들렸어요.
정확해요. 제가 <푸른 바다의 전설> 끝나고 매니저한테 그랬어요. 이제 드라마를 좀 알겠다고. 이제 현장 가면 쫄지 않고 할 수 있겠다고. 그래서 앞으로도 드라마를 하고 싶은데 두 가지 조건이 있다고. 전문직 드라마 아니면 멜로, 이 둘 중 하나면 가겠다고. 사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제 나이대 캐릭터들은 멜로도 없고 직업도 없고 그냥 말만 많은 여자인 경우가 많아요. <푸른 바다의 전설>이 끝난 뒤에도 청담동, 대치동 사모님 역할이 많이 들어와서 거절했어요. 그런데 <라이프>를 만난 거죠. 둘 중 하나에 확실히 부합하는.
올해 나온 드라마 중에서 <마더>와 <미스티>가 좋았던 건 여성들의 욕망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옳든 그르든 욕망을 가진 여자들도 남자들만큼 많이 등장하면 좋을 거 같아요.
사실 과거의 어머니들은 직업을 가질 기회가 드물었지만 요즘 여성들은 직업을 가진 경우가 많잖아요. 반대로 가사를 하는 남자들도 생겼고. 과거에 미드를 보면서 저기서는 화려한 직업을 가진 여자가 많은데 왜 한국 드라마에는 직업 없는 여자가 많은지 좀 이상했어요. 그리고 캐릭터에게 욕망이 있다는 건 그 캐릭터에게 주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기도 하죠. 제가 전문직 캐릭터나 멜로물을 하고 싶었던 건 결국 내가 연기할 인물에게도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의사도 해보고 싶고 판사도 해보고 싶고, 이런 욕망이 아닌 거죠.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면 그 캐릭터를 공부해야 되고 그런 사람들도 만나봐야 되는데, 낯선 사람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힘들어요. 그래도 <박하사탕>의 여공에서 시작해서 이제 의사가 됐으니까 출세했네요.(웃음) 이러다 대통령도 할 거 같아요. 사주에 관이 많대요.(웃음)
지난해에는 배우가 아니라 감독으로 <여배우는 오늘도>라는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어요. 원래 세 편의 단편을 연출해야 대학원 졸업 자격이 주어져서 만든 작품인데 그 작품들이 모여서 극장 개봉까지 됐어요.
덕분에 감독님들이 문 감독이라 놀려요.(웃음) 사실 계획했던 일도 아니었고, 극장 개봉할 생각은 1도 없었죠. 그런데 친구들이 영진위 저예산 영화배급지원에 신청서를 내버리는 바람에 그만.(웃음) 물론 저도 동의한 부분이 있죠. 할 수만 있다면 좋은 기회잖아요. 하지만 치밀하게 판을 짜서 밀어붙인 게 아니니까요. 제가 감독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도 아니고. 저는 그냥 배우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영화라는 직장이 제게 잠시 재미있는 기회를 열어준 거 같아요. 물론 감독 부서로 옮겼다는 건 아니고요. 그래서 공부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네오리얼리즘이 어쩌고 이런 걸 배워서가 아니라 재미있는 기획이나 다양한 생각과 새로운 시야를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줬으니까.
이왕 길이 열렸으니 다시 한번 시도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할리우드 여배우가 비행기에서 읽은 책의 판권을 사서 영화로 제작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마치 편의점에서 재료를 사서 요리했다는 말처럼 들리잖아요.(웃음) 그런데 막상 영화 하나를 만들어서 개봉해보니까 이게 그렇게 어마어마한 일인 것만은 아니구나, 여럿이서 잘 해보면 되는 일이구나, 그게 또 재미있는 일이 되기도 하는구나 싶어요. 또 연출할지는 모르겠지만 아예 배제하진 않고 있어요. 영화를 하는 재미있는 방법 중 하나가 된 거죠.
애초에 배우가 될 생각도 없었지만 여기까지 온 것처럼 알 수 없는 일이죠.
그러니까요. 제가 영화감독이랑 결혼하고 자식까지 낳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웃음) 정말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겪고 있잖아요.
감독이 돼보니 감독들의 고충을 잘 이해하고 존중하게 됐다는 말을 하셨어요. 단지 감독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는 의미만은 아닐 거 같아요. 배우로서 현장에 임하는 자세를 가다듬게 됐다는 의미 같기도 하거든요.
맞아요. 그래서 저는 배우들이 스마트폰으로라도 뭔가 만들어봤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배우는 주인공이 되기 전까지는 작품에 대한 책임감을 갖기가 어려워요. 그래도 작품 전체의 흐름을 보려고 노력했지만 연출을 해보니 뭔가 달라진 거 같아요. 그 전에도 감독이 제일 힘들고 어렵다는 건 알았죠. 고통스러운 감독의 모습을 집에서도 보고 있잖아요.(웃음) 그런데 겪어보니 아는 거랑 다르더라고요. 다들 출산의 고통을 안다고 하지만 그걸 겪어본 거랑은 다른 것처럼요. 모든 걸 몸으로 체험하고 알 순 없겠지만, 해봐야만 확실히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원래 커뮤니케이션에서 가장 어려운 게 입장 바꿔 생각하기에요. 남 입장에서 말하기가 어려워요. 그게 잘되면 부부싸움을 왜 하겠어요.(웃음) 다들 자기 입장이 있어서 그게 잘 안돼요. 그런데 그 입장이 돼보면 가능한 거죠.
사실 지금 여기에 카메라만 가져다 대면 <여배우는 오늘도 2>가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웃음) <여배우는 오늘도>가 흥미로운 건 실제 자신의 모습과 동일해 보이는 여배우 역할로 출연한 문소리 씨가 자기 자신을 희화화하는 데 두려움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어요.
하다 보면 오히려 더 하고 싶어져요.(웃음) 더 웃기게 만들려고 하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쉽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마음이 든다는 거예요. ‘완전 코미디로 만들어봐?’ 이런 욕심이 드는데 그걸 경계하는 게 어려웠어요. 나를 떨어뜨려놓고 보는 것도 쉽지 않고. 너무 떨어뜨려놓고 보면 진실에서 멀어지거든요. 너무 멀리 갈 수도 없어요. 지금의 결과물보다 더 신파로 갈 수도 있었고 더 코미디로 갈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가려는 마음을 경계해야 했어요. 이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진심을 전달해야 하면서도 이 인물과 너무 가까워져서는 안 되는 과정이 있었죠.
첫 번째 단편인 <여배우>는 관객 입장에서 정말 웃기지만 극 안의 문소리 씨가 겪는 고충을 보면 같이 울어줘야 할 거 같기도 해요. 유명해진다는 건 정말 외로워지는 일인 거 같기도 하고요.
배우가 되게 외로운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저마다 나름의 고통과 아픔 내지는 어려움이 있지만 쉽게 드러내놓고 얘기하기가 어려워요. 막상 드러나도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고. 그래도 잘 드러내고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거 같아요. 그러면서 생각해보고 정확히 판단해서 다시 전달하고 반응을 보고, 그런 과정을 통해 생각과 마음과 감정이 많이 정리되고 다듬어지고 훌훌 털어지는 거 같아요.
<여배우는 오늘도> 개봉 과정에서 도움을 준 분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주변에 좋은 분이 많이 있는 거 같아요.
남편이 <1987> 만들 때 <여배우는 오늘도> 개봉 과정을 보고 저한테 부럽다고 하더라고요. 고작 2000만원 지원받고 3000만원 당겨서 홍보하는 영화를. 자기는 정말 비싼 영화 만들고 있으면서.(웃음) 그런데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영화하면서 만난, 10여 년 된 친구들과 같이 배급하고 포스터 만들고 굿즈도 만들었으니까. 매니저가 뒤로 넘어갈 만큼 스케줄도 많았고 몸도 힘들었지만 함께 영화를 해온 동지들과의 우정도 확인하고, 여러모로 좋은 과정이었던 거 같아요.
이 작품 덕분에 여배우들의 대변인이 된 거 같기도 합니다.(웃음)
네. 여배우 노조 만들고 조합장 해야 될 분위기죠.(웃음)
여배우들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책임감을 짊어진 인상이기도 했어요. 그만큼 한 편의 영화를 만들고 개봉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고요.
결국 영화라는 게 개봉해서 관객에게 던져져야 완성된다는 걸 알았어요. 당시 시의적절하게 젠더 이슈가 나오고 미투 운동이 일어나서 제 영화를 통해서도 그런 담론이 많이 펼쳐진 게 저한테는 좋은 공부가 됐죠. 관객과의 대화를 준비하면서 페미니즘 공부도 하고 그랬어요.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며 많은 생각을 했고요. 그리고 많은 여배우들이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 동참해서 자신이 여배우로서 느낀 것을 솔직하게 얘기해줬어요. 그러니까 최민식 선배, 송강호 선배, 설경구 선배, 박해일 씨, 강동원 씨가 여배우들끼리만 돕느냐며 티켓을 100장씩 쐈고요. 좋은 경험이었죠.
부모님 영향으로 사범대 가서 선생님이 될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일찍이 장래 희망이 작가였다고도 했어요.
그냥 국어 선생님이 글을 잘 쓴다고 하니까 작가가 될 줄 알았어요.(웃음)
혹시 책을 써볼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요?
감독으로 연출한 것도 부끄럽지만 글을 쓴다는 건 훨씬 부끄러운 일이 될 거 같은데요. 너무 어려운 일이네요. 그런데 최근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낸 에세이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을 보니까 정말 담담하고 소박하게 썼더라고요. 마음에 와닿는 얘기가 많았어요. 예전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감독의 길>이라는 자서전은 너무 위대한 분의 자서전 같은 느낌이라 부담스러웠는데 고레에다 감독의 책은 소소하게 들려주는 느낌이라 영화하는 입장에서 정말 좋더라고요. 그래서 많은 감독님들이 책을 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전까지는 영화나 만들면 됐지 뭘 또 책까지 써서 설명하려 그래,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이렇게 담담하게 전할 수 있다면 저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사실 너무 창피해서.(웃음)
2016년에 김영하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으로 무대에 올랐어요. 한불 수교 130주년 기념으로 기획한 작품으로 프랑스에서 온 아르튀르 노지시엘 감독이 연출했는데, 외국 감독과 작업한 건 처음이었죠?
저한테는 이창동 감독님을 만난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경험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 작품이 저에게는 하나의 기둥처럼 느껴지거든요. 사실 <빛의 제국> 전까지는 좋은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이 커서 무대에 오른 거 같아요. 잘하고 싶었고, 공연에 누가 되지 않게 잘 어울리고 싶었죠. 그런데 <빛의 제국>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연극이란 게 뭔지, 무대에서 하는 게 어떤 행위인지, 이런 게 세상에 왜 존재해야 하는지, 지금 내가 하는 것의 본질과 핵심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 거 같아요. 그래서 배우로서 두 발로 무대에 선 건 <빛의 제국>이 처음이라 생각해요. 다른 건 그냥 기대서 한 거 같은데 <빛의 제국>은 잘했건 못했건 뭔가를 알고 했다는 기분이었어요. 저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 작품이자 감독이에요. 아마 내년쯤 노지시엘 감독과 또 한번 뭔가를 같이 할 거 같아요.
프랑스에 가서도 공연했다고 들었어요.
국립극단과 같이 가서 파리를 비롯해 세 도시를 투어했는데 관객들의 반응이나 태도가 한국 관객과 달라서 재미있었어요. 밤 10시에 공연이 끝나고 11시부터 관객과의 대화를 했는데 70세 정도 된 할머니들이 앉아서 막 질문해요. ‘그 신은 요즘 시대와 어떻게 연결돼 있냐’, ‘그건 고전에서 영감을 얻었냐’ 이렇게 지적인 질문들을 하는데 내 롤모델이다 싶었어요. 인생의 롤모델이 없었는데 저런 관객이 되는 게 내 꿈이라서.
올해 <낫심> 무대에도 올랐어요. 이란 감독 낫심 술리만푸어가 기획한 1인극인데 리허설도 없고, 대본도 공연이 시작한 뒤 무대에서 확인할 수 있고, 굉장히 특이한 공연이잖아요.
저도 궁금해서 보고 싶었는데 그냥 보러 갈 바에야 직접 출연해야겠다 싶었죠.(웃음) 그런데 좋았어요. 자기가 사는 베를린에 오면 술 살 테니 연락하라고 하더라고요.
직접 무대에 서보니 호기심만큼 만족감이 생기던가요?
재미있었어요. 진짜 연기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 낯선 이란 문화를 소재로 세상과 소통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결국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본인의 엄마와는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상황, 자신의 공연을 보여주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아이러니가 생기거든요. 굉장히 심플하면서도 전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이야기잖아요.
배우의 연기력보다는 배우의 인품이 드러나는 공연 같다는 평도 있던데, 아무래도 배우 입장에서는 돌발 상황도 많고, 즉흥극처럼 보이지만 감독에게 교묘하게 통제당하는 입장이 된다는 점에서 당혹감을 견뎌야 하는 공연처럼 보이기도 해요.
받아들여야 돼요. 그냥 품어주는 거죠. 혹시 문제라도 생기면 한국 관객들 앞이니까 내가 수습해줘야 될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잘 안되면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야죠. 물론 내 책임은 아니겠지만 내가 수습해야 될 거 같으니까요. 결국 나와 연출가가 무대에서 소통하는 과정에서 인품이 보이겠죠. 그게 굉장히 중요해요. 결국 관객에게로 이어지는 거니까.
배우가 되고 연기하는 것 자체는 좋지만 그 과정에서 해야 하는 것들이 쉽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했어요. 다 가짜 같고 꾸며야 되는 것 같아서 힘들었다고요. 지금은 괜찮은 걸까요?
사실 지금처럼 “예전에 이런 얘기 했잖아요”라고 하면 긴장돼요.(웃음) 또 헛소리한 건 아닌지, 지키지 못한 말을 한 건 아닌지. 말이란 게 가끔 소화되지 못할 걸 뱉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말을 많이 하면 걱정돼요. 그래도 지금은 화법이 많이 늘었겠죠. 그동안 많이 했으니까.(웃음) 거짓은 아니게 말하려 노력하되 꼭 진실일 필요도 없는, 진실에 가깝고 상황에 적절한, 목적에 부합하는 말을 하려고 해요.
<부디 계속해주세요>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거짓말은 않지만 진실도 말하지 않는 기술’이, ‘그렇게 나를 잃지 않는 고도의 기술’이 늘고 있다고 말했어요.
진실을 얘기한다고 해서 저 사람이 꼭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사실인지 아닌지도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거 같아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그게 중요하죠. 그러면서 거짓되거나, 나를 속이거나, 누구를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어쩌면 문소리 씨가 배우로 산다는 건 말의 무게를 견디는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시간의 무게도 견뎌야 되고요. 이런 말을 자꾸 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거죠.(웃음) /글_민용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