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힙합 신에서 가장 화제가 된 인물은 사이먼 도미닉이다. 그는 자신의 레이블 AOMG 대표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직서도 공개했다. 좀 특이한 사직서였다. 종이 대신 소리로 만든 그의 사직서 제목은 ‘Me No Jay Park’이었다. “사장님 대표님 소리도 징그럽게 들려 / 난 Park의 속도를 따라가는 게 힘들었네 그저 / 지금 사임서를 작성 중 이 노래가 그거.”
노래를 들으며 몇 가지 생각을 했다. 일단 래퍼가 랩으로 할 말을 전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로 세상에 말하는 광경이었다. 더불어 힙합의 자기 고백적 특성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 노래를 들은 후 당신은 굳이 네이버에서 사이먼 도미닉을 검색할 필요가 없다. ‘Me No Jay Park’이 내게 안겨준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치유였다. 이 노래는 음악이 아니라 마치 치료 과정처럼 느껴졌다. 그 속에서 사이먼 도미닉은 마치 운동선수가 재활하듯 랩으로 자신의 정신을 치유하고 있었다.
힙합과 정신 건강의 연결 고리는 한국에선 생소할지 몰라도 미국에선 그렇지 않다. 에미넴은 이미 <롤링 스톤>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스트레스를 랩으로 해소해. 내 모든 노래에서 나는 그렇게 하지. 말하자면 심리 치료 같은 거야. 실제로 나쁜 행동을 하는 대신 언어와 음악으로 승화하는 거지. 나한테 정신과 의사 따윈 필요 없어. 내 음악이 나만의 정신과 의사니까. 그리고 세상이 나의 치료사지. 나는 세상에 내 문제를 다 말한다고.” 테크 나인 역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나의 주치의야. 내가 나의 치료사이자 정신과 의사지.”
정신과 의사 대신 힙합을 내미는 래퍼들의 전통에는 복합적인 함의가 있다. 먼저 그것은 “흑인을 위한 치료는 없다”라는 오래된 문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제로 미국의 전국정신질환연맹에 따르면 매년 약 4380만 명의 미국인 성인이 정신 건강 문제로 고생하고 있다. 그중 흑인은 심각한 정신 건강 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다른 인종보다 20%나 더 높지만 치료 접근성은 백인과 황인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다음은 믹 밀의 말이다.
“내 고향은 총알 자국으로 뒤덮인 골목에서 어린 여자애들이 줄넘기를 하는 곳이야. 내 사촌 앤젤로도 거리에서 죽었고 난 충격을 받았지. 그런데 더 충격적인 건 고모의 모습이었어. 고모가 앤젤로의 시체 앞에서 망연자실해 있는 모습은 내게 큰 트라우마를 안겼지. 만약 당신이 군대에 들어갔다고 치자. 거기서 동료가 총에 맞아 죽는 걸 목격했다면 아마 당신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게 될 거야. 그런데 우리는 매일 이런 광경을 보고 살아. 그리고 이런 환경에서 형성된 사고방식 때문에 또 처벌을 받지.”
힙합을 정신 건강과 연관 짓는 태도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오랜 역사적 불균형에 기인한다. 물론 정신 건강 치유를 위해 힙합이 탄생한 것은 아닐 테다. 하지만 흑인들은 힙합이 정신과 의사 대신 자신을 치유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힙합은 우리만의 치료법이야. 당신이 내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겠어? 당신이 내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어. 내가 지금껏 겪은 것이 당신의 말보다 더 많은 걸 나 자신에게 말해줄 테니까.” 이 같은 프로디지의 말은 힙합의 치유 기능에 대한 래퍼들의 믿음을 대변한다. 그 속에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예술에 대한 자부심이 녹아 있다.
물론 누군가는 래퍼들의 이런 태도를 자기 합리화나 확증 편향으로 볼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렇게 볼 여지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참에 논지를 정확히 해보자. 나는 지금 힙합이 완전한 의료 기술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힙합이 정신과 치료를 완벽히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힙합의 형식과 내용에 사람들의 정신 건강에 좋은 영향을 줄 요소가 많다고 믿는다. 또 힙합의 이러한 면모를 한국에서는 대체로 외면하고 있으며 심지어 곡해할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착하고 기특한 김하온이 병들고 얼룩진 한국 힙합의 구세주라고 주장하는 신문이 있는 나라니까.
힙합은 여러 치유 요소를 품고 있다. 먼저 랩의 발화 형식 자체를 예로 들 수 있다. 멜로디 대신 리듬에 의거한 랩의 발화 형식은 노래를 부를 때와 달리 ‘일상에서 말하듯 감정을 표출하는 행위’가 가능하다. 또 랩은 구조상 노래보다 훨씬 방대한 이야기를 품을 수 있기에 더 구체적인 표현을 할 수 있다.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를 노래보다 훨씬 자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장창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이렇게 말한다.
“랩을 내뱉는 것은 결정적인 치유 요소다. 내면에 머물러 있던 목소리를 내적 장벽 너머 바깥을 향해, 세상을 향해 표출하는 과정이다. 랩 가사가 진짜 내 것이 되어가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찌질한 나’가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담대한 나’가 되는 것이다. 랩을 내뱉는 내 안의 격정이 랩을 듣는 이들의 마음에 닿아 또 다른 격정을 일으키고 감정의 정화를 경험하게 한다.”
집단주의의 병폐와 만연한 눈치 보기, 그로 인해 억눌린 감정을 가장 나쁜 방식으로 풀어내는 이 슬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이 힙합에 대부분 포함돼 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사실 힙합은 태생적으로 치유와 연계될 수밖에 없다. 1970년대 브롱크스는 버림받은 땅이었다. 흑인 인권 운동이 남긴 아쉬움과 울분이 갱 문화로 이어져 많은 폭력과 희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고 느낀 갱 단원들이 극적으로 평화협정을 맺게 된다. 그 후 그들은 총과 칼을 버리고 음악과 춤으로 경쟁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힙합 태동의 중요한 지점이다. 폭력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 과정은 다큐멘터리 <러블 킹스>에 상세하게 나온다.
이렇게 보면 힙합 자체가 치유의 결과물이다. 물론 안전하고 좋은 환경에서 자란 이들은 공감을 못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힙합은 소외된 자들의 결핍과 좌절, 분노가 가장 긍정적인 방식으로 표출된 결과물이다. 현실에서 잘못을 저지르거나 자기 파멸로 이르는 대신 힙합은 예술 안에서 그것을 내뱉고 정화하게 만든다. 래퍼들이 “힙합이 자신의 삶을 구원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스윙스가 말한다.
“나 같은 사람을 힙합은 다 받아줬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너는 랩 못했으면 그냥 양아치 새끼’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어떤 의사 선생님도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훈아, 음악이 널 살렸다. 너 음악 안 했으면 감옥 가 있거나 거지 됐을 거야.’ 그래서 난 음악이 날 살렸고 음악이 내 구원자라고 말하는 게 오그라들지 않는다. 나 같은 사람이 힙합을 통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고 기적이다. 한때의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에너지를 이렇게 음악으로 배출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힙합이 기본적으로 가난하고 위험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서사라는 점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 래퍼들이 가난, 범죄, 약물, 비극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존재하는 문제를 떠올린다. 사람들은 힙합을 들으며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그리고 자신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님을 깨닫고 힘을 얻는다. 우원재와 이병재의 인기에는 이러한 맥락이 포함되어 있다. 이 두 래퍼는 스스로의 문제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힙합의 특성을 자기화해 표현했고 이에 대중이 화답한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힙합이 문제를 드러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늘 희망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정신의학과 신경과학자들은 힙합 음악을 분석한 후 이렇게 발표했다.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한다는 래퍼들 특유의 메시지가 사람들의 정신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열망을 녹여내고 바닥에서 위로 올라가려는 의지를 투영한 음악. 내가 이뤄낸 것에서 너도 좋은 기운과 에너지를 얻어가라고, 내가 해낸 것처럼 너도 삶 속에서 의미 있는 것을 해내라고 말하는 음악. 늘 방향성을 위로 두는 음악이 바로 힙합이다.
더 나아가 나는 힙합이 한국 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내가 느끼는 한국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주 부당한 꼬리표를 붙이며 깎아내리는 사회다. 입고 싶은 옷을 입고 하고 싶은 머리 스타일을 한 것만으로도 손가락질을 받는다. 또 내 감정을 솔직히 말한 것만으로도 조화를 깨뜨리는 문제아 취급을 한다. 게다가 겸손함은 훌륭한 가치로 쳐주지만 자부심은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가짜 겸손과 진짜 자랑이 맞붙으면 전자가 늘 이긴다. 후자가 아무리 진실하다 해도.
이렇듯 집단주의의 병폐와 만연한 눈치 보기, 그로 인해 억눌린 감정을 가장 나쁜 방식으로 풀어내는 이 슬픈 사회에 필요한 것이 힙합에 대부분 포함돼 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감정의 다양성, 솔직함과 진실함, 주관과 신념,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건강함 말이다. 문득 누군가가 나에게 보낸 인스타그램 메시지가 떠오른다. “정말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그동안 눈치 보며 살면서 제 자신이 없어지는 걸 느꼈고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힙합을 많이 좋아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지난 40년간 힙합은 음악이자 목소리였으며 정치였고 문화였다. 그러나 이제는 치유에 관해 말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