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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할배를 기다리며

올드보이들이 귀환했다. 손학규, 이해찬, 정동영이 11년 만에 다시 정치 무대에 올랐다.

ESQUIRE BY ESQUIRE 2018.10.12

8월 5일 민주평화당,

당대표 정동영 선출(1953년생/65세)

8월 25일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이해찬 선출(1952년생/66세)

9월 2일 바른미래당,

당대표 손학규 선출(1947년생/71세)

7월 17일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김병준 교수 추인(1954년생/64세)

# 흥행 실패

‘올드보이의 귀환’. 요즘 쉽게 듣는 말이다. ‘손학규, 이해찬, 정동영’(연령순). 돌고 돌아 다시 ‘손학규, 이해찬, 정동영’.

2007년 같은 당(대통합민주신당) 소속으로 대선 경선 후보로서 치열하게 경쟁하던 이들은 2018년 오늘, 여의도의 얼굴 혹은 여의도의 간판이 됐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각자 다른 당 간판을 달고 무대에 재등장했다는 점이다.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본다. 노무현 정부가 거의 끝날 무렵인 2007년 10월 당시 대통합민주신당(더불어민주당 전신)은 대통령 후보로 정동영을 선출한다. 그러고는 선거대책위원회를 꾸렸다. 공동선대위원장에는 손학규이해찬, 정책지원위원장에는 김진표(올해전당대회에서 이해찬 후보에게 패함), 2020 국가비전위원회 문희상(현재 국회의장) 등이 이름을 올렸다. 한솥밥을 먹던 이들은 이후 찢어지고 갈라지기를 반복, 10여 년이 지난 현재는 각 당의 대표로 꽤나 어색한 사이가 됐다. 현재 홍준표 체제 몰락 이후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병준 교수는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 정책실장을 지낸 인물이다. 정치적 좌표 이동 면에서 가장 극적이다.

2000년대 중반 국회 출입을 계기로(당시 거대 양당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었다) 이들을 관찰했던 필자의 첫 느낌은 단적으로 이렇다. ‘철 지난 재방송, 지루한 도돌이표’. 미안하지만 솔직한 심정이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 동의와 비동의의 영역이 아니다. 심지어 이들과 의견을 같이한다고 하더라도 느낌이 달라지지 않는다. 첫 번째 우려되는 게 바로 이 지점이다. 한마디로 흥행 실패다. 그러잖아도 정치에 무관심한 많은 유권자, 정치를 ‘그들만의 리그’로 보는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영화가 언제 개봉했는지도 모른 채 막을 내린 꼴이다. 대체로 유권자는 (대부분 인정하지 않지만) 객관적 사실과 논리보다 주관적 감성과 감정에 더 많이 지배당하고는 한다. 괜히 좋고 괜히 싫다. 이유 없이 좋고 이유 없이 싫다. 올드보이들의 화려한 경력, 풍부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예상대로’ 흘러갔고 딱 그만큼 대중은 무관심해졌다.

# 그들 사이에는 자기장이 흐른다

‘이해찬이 될 것 같으니까 정동영이 됐고, 이해찬이 됐으니까 손학규가 됐다.’

지난여름 전당대회를 일제히 치른 더불어민주당, 바른미래당 그리고 민주평화당 간의 역학 관계에 대한 한 줄 정리다. 마치 대표로 선출된 3명 사이에 보이지 않는 인력이 작용하는 듯했다. 이 말을 정동영은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설명한다.

“이해찬 후보가 대표에 출마하고 손학규 대표도 (전당대회에) 나온다고 하니까, 그러면 말 상대할 사람이 누구냐(는 얘기가 나왔다). 평생 이해찬 덕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제가 됐으니까 (이해찬) 선배도 조금 덕을 봤으면 좋겠다.”(8월 6일 TBS 라디오 인터뷰)

‘평생 이해찬 덕 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정동영의 한마디에 무수한 시간 동안 흐르고 쌓였을 둘 간의 앙금이 저절로 느껴진다. 실제 정동영의 예언처럼 이해찬은 곧 대표로 선출됐고 민주평화당만큼이나 당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바른미래당 당원들은 자의 반 타의 반 손학규를 선택했다.

2007년 대선 경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이들은 2018년 들어 시즌 2를 맞은 형국이다. 다만 각자의 당으로 갈라진 만큼 더욱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구도와 힘의 변화도 만만치 않다.

참여정부 시절 국무총리까지 지낸 이해찬은 문재인 정부 2년 차에 재등판했다. 당대표 2년을 꽉 채운다면 2020년까지 함께하는 운명이다. 어느 정부든 5년 임기 동안 실질적인 힘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시간은 3년 정도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해찬과 청와대가 호흡을 맞춰야 한다는 의미다. 지난 8월부터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한 문재인 대통령 국정 수행 지지율은 집권 여당 대표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찬이 선택된 배경이기도 하다. 특히 2020년 총선은 2022년 대선과도 직결된다. 청와대와 호흡은 물론 당 장악력, 야당과의 전투력. 산전수전 다 겪은 올드보이가 소환된 이유다.

반면 손학규와 정동영은 처지가 다르다. 제1 야당도 아닌 제2, 제3 야당 대표로서 이들은 당의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나마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수 있는 바른미래당이라고 하지만 미래는 그렇게 밝지 않다.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에서 탈당한 바른정당 사람들과, 민주당에서 탈당한 호남 기반의 국민의당 사람들이 깨진 유리창처럼 붙어 있는 형국이다.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들이 당을 무리하게 합쳤고 결과적으로 정체성 혼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남북북미 관계의 획기적 변화 속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가 터져 나와 매 순간 어지럽다. 결국 당의 존립 문제와 당 내부 정리 그리고 멀리는 정계 개편, 즉 자유한국당과의 통합까지 고려한 여러 가능성을 두고 당원들은 고민했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정동영, 이해찬이다. 딱히 대안도 없다. 결론은 손학규다. 높은 인지도와 중도-합리적 이미지, 그리고 한나라당(자유한국당 전신) 출신이라는 편리함(?)까지 갖춘 올드보이의 또 다른 소환 이유다(물론 손학규는 대표 수락 연설에서 “한국 정치를 어지럽히는 두 정당과 온 힘을 다해 맞서 싸우겠다”고 말했다. 두고 볼 일이다).

# 꽃할배를 기다리며

“나 같으면 ‘잘되길 바란다’, ‘다음 기회에 가겠다’라고 말했을 겁니다올드보이의 귀환이라 할 정도로 충분한 경험을 가진 분들인데 그분들마저도 들러리, 체통, 교통편의 불편 등을 (거절) 이유로 말하는 것은 아쉽습니다.” (9월 12일 이낙연 총리, 손학규 등이 평양 남북 정상회담 동행을 거부한 데 대해)

“언론은 ‘올드보이들의 귀환’이라고 폄훼했지만 어쩌면 후배들에게, 또 국민에게 (과거에 우리에게도 있었던) 새로운 정치 문화를 보여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마음 한쪽에 가지고 있다이미 당리당략과 정쟁으로 어지러운 한국 정치에 꽃할배 같은 신선함으로 우리에게 오셨으면 한다.” (9월 11일 임종석 비서실장 페이스북, 정상회담에 국회의장단 및 5당 대표 등의 동행을 촉구하며)

올드보이라는 말에는 큰 감동이 없다. 약간의 안정감을 배제한다면 오히려 우려와 시큰둥함이 묘하게 뒤섞인 표현이다. 그래서 찾은 말이 ‘꽃할배’였을 것이다. 임종석 비서실장의 레토릭이 정치적 맥락에서 결과적으로 비판을 받는 건 사실이지만 정치 대선배들에 대한 일종의 마지막 희망이자 기대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들 표정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장 김병준은 “나는 할배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라고 일축하며 “어려운 문제를 이런저런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손학규는 더욱 격앙된 모습이었다. “임종석 비서실장이 SNS에서 말하는 것은 비서실장이 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나아가 “자기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라고도 했다. 그는 청와대가 ‘성의를 보이는데 이야기를 안 듣는다는 식으로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다’고 의심했다(이 의혹에 필자도 동의한다).

당사자들에게는 일단 불쾌감이, 그다음에는 부담감이 밀려왔을 것이다. 경륜 있는 ‘어른’인 만큼 실망시키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자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특히나 손학규는 민주당 대표를 두 번(2008년, 2010년)이나 역임한 데다 평양 정상회담에 함께 가겠다고 나선 정동영과의 비교도 부담된다. 이들이 표정 관리가 안 됐던 이유다.

문제는 비단 대통령 비서실장과 각 당 대표 간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올드보이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을 어느 정도 대변한다. 사람들은 올드보이보다는 꽃할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국회의원 선수로 밀어붙이는 공허한 리더십과 매너리즘보다는 능수능란한 정치술, 좀 더 욕심을 내자면 품격 있는 정치를 통해 그들의 경력과 연륜을 스스로 빛내주기를 내심 바란다. 그마저도 없다면 대중에게는 올드보이가 굳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11년 전 대선 경선에서 힘겨루기를 했던 이들이지만 60~70대이자 대권 실패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여러 조건상 대권 도전 가능성은 낮은 상황이다. 당사자들에게 유쾌한 일은 아니겠지만 당의 안정적인 관리라는 차원에서 다수에게는 장점일 수 있다. 대권 주자가 당권을 장악할 경우 임기 말에 인기가 떨어지기 마련인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정치를 위해 무리수를 두기 마련이다.

당장 2년 앞으로 다가온 2020년 총선, 그리고 2022년 대선을 바라보는 현시점에서 올드보이들은 마지막 역할을 해야 한다. 어쩌면 수십 년 정치를 해온 이들이 마지막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마지막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올드보이보다는 꽃할배. 품격과 능력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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