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프로에 나가보니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경련이 왔습니다. 중풍이 올 것 같던데요? | ESQUIRE,에스콰이어,ESQUIREKOREA,에스콰이어코리아,셰프

A와 B라는 셰프들이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그 어려운(!) 요리들을 뚝딱 해내는 걸 보면 용하기도 하다. 땀은 좀 흘리시더만. 혹시 찬스나 재촬영 같은 게 있는지 물었더니 그런 건 없단다. 생방은 아니어도 뜨거운 조명 아래서 카메라는 돌아간다. 누가 딱딱이(슬레이트)를 치고, 카메라가 돌아간다는 신호가 온다. 냉장고를 열었더니 시들어빠진 김치 꽁다리와 참치 캔, 반쯤 먹다 던져둔 사과 한 쪽과 마요네즈정해진 시간 안에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용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출연한 셰프들에게 대단들 하다고 했더니 어깨를 으쓱한다. “뭐, 다 하게 되어 있어요, 하다 보면. 라면 수프를 먼저 집는 게 중요하죠.”원래 세상 일이 그렇다. 하다 보면 다 한다. 경영 수업 제대로 안 받고 술이나 마시던 재벌 2세도 부친이 별세하면 회사를 잘만 돌린다(물론 망하기도 한다). 다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게 세상이니까. 사실 같은 프로는 외국에 좀 있었다. 아주 오랜전의 일이라 그 후에 얼마나 많은 카피 프로가 나왔는지 몰라도, 내가 20여 년 전에 이탈리아에 있을 때는 이라는 게 있었다. 물론 도 뭘 베꼈을 수는 있다. 하여튼 그 프로는 이랬다. 꽤 뛰어난 요리사가 도전자와 겨룬다. 각자 박스 한 개가 주어진다. 개봉하자마자 20분 안에 그럴싸한 요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탈리아답게 밀가루와 토마토소스, 올리브유 같은 기본 재료는 사용 가능하다. 박스에서 가지 한 개와 개구리 뒷다리 두 개가 나온 적도 있었다. 캔 참치와 달걀 한 개, 스시용 김 한 장이 나오기도 했다. 출연한 요리사는 김 한 장을 칼로 다지더니(다져진 게 용하다) 참치와 달걀 스크램블에 뿌리더군. 나 같으면 참치와 계란말이 롤을 만들었을 텐데.다 먹고살자고 한 일이다. 실은 나도 알게 모르게 이런 요리 프로에 나온 적이 조금 있다. 토론이나 인터뷰, 강연 같은 고리타분한 것 말고 말이지. 그때마다 결심한 게 있었다. 다시는 안 나간다! 하지만 결국 또 카메라 앞에 섰다. 이번에는 어쩌다가 지방을 돌며 요리를 했다. D 도시의 맛을 무려 셰프의 솜씨로 풀어본다는 게 취지였다. 아마도 이런저런 알 만한 셰프들이 출연료나 다른 이유로 거절한 게 내 차지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아무 말 않고 해야 할 때가 있다. 딸 등록금을 내야 할 시기가 가까워졌으니까. 어느 서해안 해변에서 나는 질 좋은 가오리를 썰었다. 지역 아주머니는 내가 가오리 써는 걸 보시더니 이렇게 말했다.“셰프님은 가오리는 처음 썰어보는 것 같아요.”아, 그 놀라운 눈썰미라니. 사실 이탈리아 요리 하는 사람들이 가오리 썰 일이 얼마나 있겠나. 아주머니가 녹슨 무쇠 칼로 가오리의 꼬리와 성기를 무참하게 자르고, 눈과 내장을 도려내고. 먹을 만한 살점만 두 장 척 하고 떠내는 솜씨를 보여주었다. 나는 몇 번이고 가오리를 썰었다. 다섯 대의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고, ‘감독님’의 마음에 드는 신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야 했다. 누가 텔레비전과 영화는 기다림의 예술이라고 했던가. 천만의 말씀. 천당도 이렇게 기다리면 난 안 가련다. 조명 겨우 맞추고 다섯 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돌아가고 딱딱이가 ‘딱!’ 울리자 나는 미친놈처럼 가오리를 붙들고 씨름했다. 그때 하늘에서 멋진 소리가 났다.푸두두두두두두두두.아, 맞아. 여기는 군사 지역과 가깝지. 군인도 훈련을 해야지. 내가 가오리를 써는지 문어와 뽀뽀를 하는지 그네들이 형편 봐줄 리 없다. 피디는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직업이다. “죄송합니다, 셰프님. 딱 한 번, 마지막 가실게요. 자 다시 돌립니다!”그래, 딱 한 번.분량이란 말은 요즘 시청자도 안다. 예능에서 워낙 대놓고 쓰는 말. 나라고 그 분량의 마법사가 오지 않겠는가. 나는 수없이 산길과 바다와 능선과 마을 길을 걸었다. 길 가다가 농부가 계시면 말을 걸고 고개를 끄덕이며 올해 벼 수매가에 대해 토론하는 척했고,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 하락이 정말 한국당과 조중동의 개수작 때문인지 분석했다. 환하게 웃으며. 왜냐하면 피디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좀 환하게 가실게요.”내 얼굴은 어떻게 찍어도 안 환하다. 나는 안다. 하루키가 예루살렘상을 받을까 말까 고민할 때의 표정을 닮은 나다. 인중도 비슷하게 길다.(하필 하루키를 거론한 건 마침 내가 원고를 쓰는 카페 옆자리에서 누가 라는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 내용을 안다. 채소가 바다표범과 키스를 한다는 설정이다).입가에 경련이 일었다.“저 감독님, 결혼식 스냅사진 촬영 이후 처음 경련이 왔습니다. 이러다간 아마 중풍이 올지도 몰라요. 우리 모두 필름, 아니 데이터를 아껴 씁시다요.”원래 방송은 오야, 아니 피디 맘이다. 이런 하소연이 씨가 먹힐 리 없다. 그때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웃으래도 안 웃고 아무리 더 찍어봐야 앞서 찍은 것보다 못하다는 확신을 주는 거다. 피디는 머리가 좋았고 인내심이 강하지 않았다.다음 날 병원에 갔다. 의사가 말했다.“이런 걸 호사병이라고 하는 거예요. 휴가 가서 아주 제대로 태우셨네요. 이거 바르시고 찬물 마사지 하세요.”그가 혼잣말로 “2도 화상 입을 뻔하셨네” 하는 걸 듣고는 그의 책임도 아닌 걸 물어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어쨌든 딸 등록금에는 몇 푼 보태야 하니까. 이런 프로를 찍고 나면 어디선가 귀신같이 보는 놈이 있다. 대개 전혀 안 친했고 한 번도 같은 반을 한 적 없는 중학교 동창이다. 동창생 명부를 뒤져서 기어이 전화를 건다.“야, 너 출세했더라. 너 옛날에 키도 좀만 했는데 많이 컸더라.”그래 새끼야. 오랜만이다.